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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경 Aug 05. 2021

누군가의오븐속2-미국맛 도넛

짜릿한 설탕 세계로의 여행

나는 엄청나게 달고, 기름진 음식을 먹을 때 누군가 "무슨 맛이야?"라고 물으면, "완전 미국 맛이야."라고 대답한다. 한 입 먹자마자 압도적으로 달고 기름진 맛이 느껴지면, 그 음식은 '미국 맛'이라는 이름표를 달 수 있는 조건을 훌륭하게 충족한 것이다. 건강에 치명적임을 본능적으로 알지만 끊을 수 없는 맛이다. '미국 맛'의 대표적인 음식은 단연 도넛이다. 기름에 튀긴 밀가루에 달달한 토핑을 얹었으니 이것보다 상징적으로 미국 맛을 담아낸 음식은 없을 것이다. 


어느 날 인터넷에서 랜디스 도넛이라는 미국 도넛 가게가 한국에 상륙한다는 소식을 봤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위치를 알아봤지만, 그곳은 쉽게 갈 수 없는 제주도였다. 언젠가 제주도에 가면 제주도의 산해진미를 재쳐두고 도넛을 먹으러 가야겠다 굳은 다짐을 하며 때를 노리고 있었다. 제주도 여행은 계속 미뤄졌지만 내 마음속에는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랜디스를 향한 탐욕이 여전히 불타고 있었다. 

이런 나의 간절한 마음이 랜디스에 닿았는지 서울에 랜디스 도넛이 지점을 새로 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갈 날을 잡아두고 먼저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를 정성스레 읽었다. 철저한 예습 끝에 어떤 도넛을 사 올지 미리 계획했고, 드디어 D-day 비장한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워낙 인기가 많아 오픈 전에 가서 줄을 서야 한다는 조언들을 많이 봐서, 나도 오픈 시간인 오전 11시를 10분 정도 앞두고 가게에 도착했다. 충분히 서둘렀다고 생각했으나 가게 앞은 인산인해였으며 이미 대기 줄은 꽤 길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기에 차분히 줄을 선 후에 다시 메뉴 예습에 들어갔다. 시험을 앞둔 수험생 마냥 메뉴를 정독하고 있으니 어느새 내 차례가 다가왔다. 사진으로만 본 도넛들이 꽉 차 있던 쇼케이스는 그야말로 황홀했다.



눈으로 빠르게 내가 살 것들을 스캔하면서 다른 빵들도 보니 괜스레 욕심이 난다. 어쩜 다들 저렇게 먹음직스러울까.. 하지만 오늘은 계획한 것들만 사 오기로 마음을 다잡고 살면서 냈던 소리 중 가장 명랑한 소리로 캐셔분께 도넛을 주문했다. 한치의 오차도 있어선 안되기 때문에...


도넛을 한 아름 들고 다오니, 마음이 그렇게 풍족할 수가 없다. 기쁜 마음으로 랜디스의 첫 방문 기념사진을 한 장 찍었다.

이 날 첫 스케줄이 랜디스 도넛 방문이라, 노는 내내 하루 종일 도넛 박스를 손에 들고 다녔어야 했지만,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오늘의 상전 "도넛님"







어딜 가나 잘 모시고 다녀야 온전하게 집까지 같이 갈 수 있기 때문에 상전 모시듯이 들고 다녔다.  당연히 밥 먹으러 식당에 갔을 때에도 가장 좋은 자리를 내어드렸다.









그렇게 애지중지 모시고 온 나의 도넛들. '미국 맛'의 가장 기본적인 맛을 느껴보고 싶어서 클래식 메뉴를 주로 주문했다. 모든지 기본기부터 탄탄히 배워야 하기 때문에.  글레이즈 도넛, 버터 크럼 도넛, 글레이즈 크론디, 메이플 크룰러,  베이컨 메이플 롱존 , 베어 클라우 모두 5개를 사 왔다. 이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도넛은 버터 크럼 도넛이었다.

도넛을 한입 베어 먹으니 반죽이 숨을 쉬는 듯 확 줄어들었다 펴진다. 나는 이런 식감의 빵들을 매우 좋아하는데, 마치 정말 싱싱한 빵을 먹고 있다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반죽 같다고 할까? 마음에 쏙 드는 반죽 위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베이킹 재료인 버터가 솔솔 부러져 있고, 게다가 슈가 파우더까지 듬뿍 올려져 있으니 이건 '미국 맛'이 아니고 '천국 맛'이다. 

도넛들이 전체적으로 지금까지 먹어왔던 도넛을 포함한 빵 들 중에 가장 달았다. 본토 미국 맛이니 여태까지 먹었던 미국 맛 그 이상을 보여주겠구나 예상은 했지만 상상 이상으로 달았다. "미국 맛은 요 정도는 돼야 미국 맛이지 요놈아!" 하고 잔뜩 혼쭐난 기분이었다. 


확실히 랜디스 도넛은 여태까지 내가 '미국 맛'이름을 붙여온 맛들과는 비슷하지만 달랐다. 내 입맛에는 내가 멋대로 정한 '미국 맛'이 더욱 잘 맞았다. 어쩔 때는 경험하기 전에 맘껏 상상하고 기대할 수 있는 시점이 제일 재밌다. 여행 가기 전 계획을 짜고 준비를 할 때, 소풍 가기 전 날 밤, 며칠 후면 보러 갈 기대작 모두 딱 그때가 제일 설레고 신난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기대보다 별로. 하면서 한껏 부푼 마음이 식어버리지만, 한번 마음이 설레었던 일들은 다음에도 꼭 기다리게 된다. 설령 실망했더라도, "이번에는 다르겠지." 하며 기대감은 두배가 되기도 한다. 언제 내가 내 입맛에 꼭 맞는 정통 본토 '미국 맛'을 맛볼진 모르겠다. 몇 번의 실패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까지 나에게 '미국 맛'은 여전히 가장 지친 날  나를 달래줄 수 있는 설레는, 짜릿한 단맛 그 자체일 것이다. '생각보다 훨씬 더 짜고 달 수도 있는 음식'이라는 설명이 덧붙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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