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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경 Sep 07. 2021

오븐 속 일기6-호두파이내고 운전연수받기

초보운전 +초보 베이커

9월 초, 드디어 운전에 도전하게 됐다. 사람들이 붐비는 대중교통에 질려가고 자유롭게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건 정말 멋지고 편하겠다는 생각을 마음 한편에 묵혀놓은지 꽤 오래되었지만, 용기가 없어 계속 운전 연수를 미뤘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든 건지, 지금 아니면 또 언제 하겠냐는 마음으로 운전연수를 신청했다.


운전 연수 첫날은 잔뜩 겁먹어 속도를 전혀 내지 못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보행자와 속도가 비슷하자 '이럴 거면 걸어 다니는  낫겠는데..?' 싶어 약간의 회의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3 동안의 운전연수가 그럭저럭 만족스럽게 끝나고 이제는 정말 실전으로 운전 연습을 시작해야  때가 됐다.

3일 운전 경력으로 혼자 연습을 할 수는 없었기에, 내 옆자리에서 거의 매일 운전 연습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유력 후보는 엄마였다.


엄마는 내가 운전을 시작한다는 걸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제안을 아주 흔쾌히 받아주셨다.  아주 큰 위험을 감수하고 나를 도와주겠다고 나선 엄마에게 작게나마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어 엄마에게 슬쩍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물어봤다. 엄마는 "호두파이 한번 해봐 봐." 대답했고 나는 즉시 호두를 사러 나갔다. 그렇게 엄마와 나의 운전 연수 계약은 체결되었다. 혈연관계에서만 가능한 얼렁뚱땅 계약이다.


엄마가 말을 바꾸기 전에 재빠르게 호두파이 베이킹을 시작해본다.

호두 전처리 과정은 여전히 귀찮았지만, 베이킹 과정은 순탄했다.



밀가루, 버터, 설탕, 소금, 노른자를 뭉쳐 만든 샛노란 반죽이 금세 완성되었다.



완성된 반죽을 냉장고에서 휴지 시키는 동안 필링을 만들어놓는다. 딱히 어려운 구간은 없었지만, 중탕하고, 채에 한번 걸러내는 아주 사소하지만 번거로운 과정이 조금 고통스러웠다. 눈으로 봤을 때 크게 티가 나는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으니 더욱 성가시게 느껴진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작은 정성이 큰 역할을 해줄 거라는 믿음으로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가 본다.



휴지를 끝낸 반죽을 파이 틀에 맞춰 넣고 필링을 부어주니 그럴듯한 비주얼이 나왔다. 어설프지만 처음 치고는 만족스럽다. "처음"은 아주 고마운 면죄부다.  첫 운전 연수를 할 때도 공포감을 달래주는 기적의 멘트는 '처음이니까.'였다. 추락하는 자존감과 죄책감을 혼자 짊어지고 버텨주는 처음이라는 단어를 믿고 더 많은 도전을 해봐야겠다. 처음 저지르는 일에 따르는 실수와 잘못은 당연한 도전의 증거라 생각하며, 나를 더 응원해줘야지. 원래 "첫판은 무효!" 아닌가?


오븐 속에서 40분 구워낸 나의 첫 호두파이! 고소하고 맛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의뢰인이자 계약의 슈퍼 갑 엄마께서도 마음에 들어 하셔서 우리의 계약은 무사히 성사되었다. 나중에 엄마가 나의 운전 실력에 질려 중도하차하려고 한다면 그때 먹은 호두파이 내놓으라며 생떼를 써야겠다는 못된 계획도 세워본다.


엄마를 위한 호두파이라는 말이 머쓱할 정도로 혼자서 아주 맛있는 디저트 타임을 즐겨버렸다.

호두파이에 흰 우유를 곁들여 먹으니, 내일 있을 운전연수 때문에 생긴 긴장감이 한 번에 진정된다.

내일도 벌벌 떨며 깜빡이를 켜고 애처롭게 끼어들기를 시도하겠지만 작은 시도들이 모인다면 언젠가는 자유롭게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해방감 같은 완벽한 결과물을 얻을 수 있겠지.

운전으로  넓어진 나의 삶에  어떤 새로운 경험이 찾아올까? 어떤 경험이든 낯설고 두렵겠지만 처음이라는 면죄부와 호두파이를 가득 구워 먹으면 기꺼이 환영하며 반갑게 맞이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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