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오븐 밖 일기-레몬 딜 버터
우리 집은 사시사철 항상 푸르다. 식물을 좋아하시는 할머니와 엄마 덕분에 집 안 곳곳마다 녹색의 무언가가 있다. 어렸을 때는 흙에서 나오는 괴상한 벌레도 싫고 덩치 큰 화분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것도 싫었다. 나는 식물은 그저 '우리의 공간을 침범한 녹색 것'으로 여겼다.
성인이 되고 나서 한참 후 까지 나의 불평을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기나 긴 시절 동안 축적된 불평이 무색할 만큼 급격한 취향의 변화를 겪게 됐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사람의 손을 거친 인위적인 공간 속에 존재하는 자그마한 자연이 눈에 띄기 시작하고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나도 내가 책임지고 키우는 식물을 들여야겠다는 마음이 불쑥 커져
내 방에는 벌써 식물 3개가 자리 잡고 있다.
날이 갈수록 잎사귀도 풍성해지고 새 잎도 눈에 띄게 많아지고 있다.
주는 거라곤 물 밖에 없는데, 어떻게 물만 먹고도 이렇게 잘 자라는지 화분을 들여다볼 때마다 기특하면서도 궁금하다.
나는 필요한 것도 고픈 것도 많은데.
다 받아도 어느 하나 모자라다 싶으면 잎을 바짝 말려 소중한 것들을 잃곤 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괜히 작아지는 기분이다.
요즘 나의 관심을 듬뿍 받고 있는 식물을 이용해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나면 궁금증이 풀릴 것만 같다.
4일에 한번 물만 먹고 어쩜 그렇게 푸르게 자라나는지.
답을 얻지 못하더라도, 상큼한 '레몬 딜 버터'를 식빵에 발라 먹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되어줄 거다!
레몬, 딜, 버터를 모두 꺼내와 재료 준비를 한다. 지독한 무더위에 가열 음식을 하지 않으니 너무 편하고 좋다. 식물 예찬을 하다 얻게 된 시원한 요리시간이다. 소제목에 달았듯이 오늘은 완전히 오븐 밖, 오븐 근처에도 가지 않고 완성될 감사한 버터이시다.
레몬 제스트와 버터, 딜을 준비한 후 마구 섞는다. 향긋한 허브 향을 맡으며 버터를 뒤적이는 동작을 반복하자, 물을 한껏 머금고 자랐던 순간이 떠오른다. 대학교 1학년 글쓰기 수업 때였다. 발표가 점수에 들어가는 수업이었는데, 나는 필수로 채워야 하는 발표 횟수를 채우면 절대 손을 들지 않았다. 그날도 겨우 발표를 마치고 강의실을 떠나려는데, 교수님이 나에게 말을 거셨다. 도경 씨 글이 참 좋으니, 발표를 더 자주 해달라는 말씀이셨다. 단순한 인사말에 가까운 칭찬으로 나는 꾸준히 글에 대한 애정을 키웠고 그렇게 나의 가지는 한 뼘 자라 손을 들고 말하지 않아도 나의 글을 보여 줄 수 있는 이 작은 공간까지 닿게 되었다.
누군가가 날 알아봐 줬을 때 피어나는 생명력은 쉽게 마르지 않는다. 몇 년이 흐른 지금도 내가 그 말을 들은 강의실, 교수님의 말투, 칭찬에 어쩔 줄 모르는 내 표정 모든 걸 기억하듯이.
물을 줘보기도, 물을 받아보기도 한 기억들이 우연히 겹쳐지자
물을 주기 전에는 항상 무언가가 바르게 자라나기를 바라는 따뜻한 시선이 머물러있다는 걸 알았다.
흙이 얼마큼 말랐는지 만져보고, 잎의 상태는 어떤지 살펴보고,
새로 난 잎이 있는지 이리저리 들여다보는 일들이.
나의 글을 들어주고 읽어주는 것. 상냥한 진심을 전하는 것.
진한 관심이 물과 섞여 뿌리까지 흘러들어 가는구나.
완성된 버터를 사탕 모양으로 돌돌 말며
허브 딜에게 '너네도 단순하게 먹고사는 건 아니구나.' 속으로 한마디 붙여본다.
노릇노릇하게 구운 식빵 위에 버터를 턱 올렸다. 꽤나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 만들었는데 버터의 맛은 단순했다. 단순한 만큼 명쾌한 맛이라 좋았다. 레몬, 버터, 딜 각자의 맛이 적절히 나는 예측 가능한 싱그러운 맛.
누군가 나를 정성 들여 봐주는 것은 간절할 만큼 소중하지만, 내가 나를 돌보는 정성 없인 단 하나의 잎도 피워낼 수 없음을 항상 명심하도록 하자.
나를 자주 들여다봐야지. 어쨌든 내가 영원히 뿌리내릴 토양은 나 자신이니까.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들꽃도 아름답듯이.
앞으로 더 맛있는걸 스스로에게 먹여줘야겠다. 지치지 않고 셀프 물 주기가 가능하도록!
이번 주말에 버터를 잔뜩 더 사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