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약 1년 전,
그러니까 2023년 2월 22일,
다섯 번의 도전 끝에 마침내 웨이브 퍼밋을 획득했다.
팬데믹 기간 중이던
2022년 6월에도 미국 출사를 왔지만
그 때는 웨이브가 목적이 아닌
은하수 촬영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웨이브에는 들어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팬데믹 이후에
웨이브 추첨 시스템에 변화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전에 있던 현장 추첨이 사라지고
기존에 있던 Advanced Lottery 외에
현장 추첨을 대신한 Daily Lottery가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Advanced Lottery는
전 세계 어디서든지 신청이 가능하지만
Daily Lottery는 위치 기반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BLM에서 정한 커냅(Kanab) 인근의 지역에서만 신청이 가능했다.
현장에서 숨죽이며
극도의 긴장과 스릴 속에서 진행되던
현장 추첨의 흥미진진한 모습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2월 23일,
일행 모두와 함께
들뜬 마음을 가지고 웨이브로 향했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이날의 웨이브 입성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엄청난 고난의 시작이었음을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번 웨이브 추첨은 커냅에서 이틀,
나머지는 페이지 인근에 머물면서 신청했는데
웨이브 퍼밋을 받기 2∼3일 전부터 아침식사를 할 때마다
TV 뉴스 화면에는
동부에 눈폭풍이 몰아쳐서 항공기가 결항되고
도로가 눈으로 막혀 사람들이 고립되어 있다는 뉴스가 계속 흘러 나왔다.
하지만
우리가 있는 곳은 서부였고
또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동부의 눈폭풍이
서부로 올 일은 거의 없었기에
그다지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메일로
웨이브에 당첨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커냅에서 페이지로 돌아오는 도중에 보니
어제와 그제 내린 눈이
길 양옆으로 상당히 많이 쌓여 있었다.
커냅은 페이지보다
고도가 높아서 눈이 많지만
페이지로 갈수록 눈이 없을 것이라 기대하고
89번 길을 계속 내달렸지만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오는 길에 커냅과 페이지의
중간 지점 즈음에 웨이브로 들어가는
하우스 락 밸리 길이 있는데 그쪽을 바라보니
길이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 앉았다.
게다가 2월 22일,
웨이브로 들어가기 하루 전날 밤에
페이지에는 많은 눈이 내렸고 날씨 예보를 보니
웨이브가 있는 버밀리언 클리프에도 많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2월 23일,
아침을 먹자 마자
전날 밤에 추가 비용을 내고
미리 렌트해둔 짚 랭글러의 운전대를 잡았다.
다행히도
하우스 락 밸리 입구까지는
아무런 문제없이 갈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하우스 락 밸리 전체는
모두 비포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웃 락 밸리 입구에 도달하니 깊이 쌓인 눈 위로
자동차가 지나간 흔적이 전혀 없었다.
팬데믹 이전에는
인터넷 추첨 10명, 현장 추첨 10명,
모두 20명만 웨이브에 입장할 수 있었지만
팬데믹 이후로는
어드밴스트 추첨 최대 48명,
매일 추첨 최대 16명, 최대 64명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하우스 락 밸리 입구에
오전 8시경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깊게 쌓여 있어서
지금 들어가야 좋을지 아니면
다른 차를 뒤따라 가야 좋을지 선뜻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거기서 약 10분 정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때
다른 차 한 대가 오더니 기다리고 있던 차에 옮겨타고
기다리고 있던 차는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차가 눈앞에서 사라질 무렵
나는 그 차가 낸 길을 따라 운전하기 시작했다.
10분 정도 달리자 평소에는 물이 전혀없던 개울이 나타났다.
나는 평소에
개울이 움푹 들어간 것을 알고 있었기에,
또 눈녹은 물이 개울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개울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위해 일단 차에서 내렸다.
비가 올 때, 혹은 눈이 내리거나
눈이 녹을 때 이 길이 위험한 이유는
진흙과 급커브와 길옆의 구덩이 때문이다.
내리막길에 브레이크를 잡지 않으면
속도가 빨라져서 앞에 있는 급경사 길을 돌기 전에
차가 오른쪽으로 밀리면서 구덩이에 빠질 위험성이 있고
브레이크를 잡자니
살짝만 잡아도 진흙이나 눈 때문에
차가 컨트롤이 힘들 정도로 미끌리기 때문이다.
나는 최대한
가볍게 풋브레이크를 밟았다가
미끄러지기 전에 신속하게 발을 떼면서 내려갔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앗다.
한 번의 내리막 길을 갈 때마다 10번 정도씩 반복했다.
웨이브 가는 길은
이런 길이 수없이 계속된다.
내리막 길이 나올 때마다 손에 땀을 쥐며 운전했다.
돌아 나올 때 눈이 녹을텐데
그러면 길들이 진흙탕으로 변해서
올 때보다 훨씬 더 힘들 것이란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무사히 웨이브 주차장에 도착했다.
웨이브로 들어가는 길은 온통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때 나는
웨이브로 들어가는 길의
모든 오르막길이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던
2017년 1월의 악몽이 떠올랐다.
다행히 밤 사이에
눈이 더 내렸기 때문에
오르막 길의 얼음은 눈으로 덮여있어서
2017년 겨울의 얼음길보다는 덜 미끄러웠다.
웨이브에 내린 눈은
모두 일정한 높이로 쌓인 것이 아니라
특정 지역은 더 깊은 눈으로 쌓여있어서
발이 눈속에 파묻히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어떤 지역은 눈이 덜 쌓였거나
햇볕이 잘 드는 쪽은 일부 녹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메인 웨이브에 도착했지만
녹지 않은 눈 때문에 웨이브의 라인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행들은 모두 생전 처음보는
이 세상 풍경이 아닌듯한 웨이브의
오묘한 실제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잠시 모여서
이곳의 상황을 설명한 다음에
다함께 세컨드 웨이브로 가려고 했지만
모두들 촬영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할 수 없이
1시간 정도 자유 시간을 주고
나는 홀로 세켄 웨이브로 올라갔다.
눈과 얼음 때문에 세컨 웨이브로 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세컨 웨이브에 도착했지만
흐린 날씨와 눈으로 인한 얼룩 때문에
세컨 웨이브의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한 두 컷만 촬영하고
곧바로 다시 메인 웨이브쪽으로 내려왔다.
하늘은 곧 다시금 눈이 내릴 것처럼 잔뜩 흐려있었다.
처음에 웨이브로 들어올 때는
간간이 햇빛이 비치기도 했기 때문에
몇몇 군데 눈이 녹은 부분도 있긴 했지만
메인 웨이브에 도달하기 직전부터 날은 계속 흐렸다.
메인 웨이브에서
다시 일행들과 만나서
이곳 저곳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날씨가 서서히 점점 더 나빠지기 시작했다.
눈이 더 내리면
나가는 길이 힘들 것 같아서
우리는 서둘러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웨이브에 들어올 수 있는
최대 인원이 64명이지만
오늘 우리가 본 사람은 10명이 채되지 않았다.
퍼밋을 받은
나머지의 사람들은
하우스 락 밸리 입구에서
눈 때문에 들어오기 힘들어서 포기했을 것이다.
메인 웨이브를 내려오자마자
폭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머지않아 폭설이 멈추었지만
진짜 험난한 고난은 주차장에 도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주차장을 떠나 1분쯤 운전한 후에
길 상태가 너무나 좋지 않아서 일단 주차창으로 다시 돌아왔다.
돌아와서 팀원들에게
저녁 때까지 기다렸다가
땅이 얼면 그 때 돌아갈 것이지
아니면 지금 돌아갈 것인지 의견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선쯧 이렇게 하자는 말이 없었다.
나는 고민 끝에 지금 출발하기로 했다.
땅이 얼면
운전하기가 훠씬 더 편해질테지만
땅이 얼려면 앞으로 3-4시간은 더 기다려야 하고
또 밤이 되면 주변이 어두워서
길에 대한 상황 판단을 하기 어려울 수도 있어서
생각처럼 나가는 길이 안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가는 길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길은
차량 바퀴자국들 때문에
온전한 곳이 한군데도 없었고
응달쪽의 눈은 녹지 않아 빙판이 되었으며
양달 쪽의 눈은 녹아서 땅이 뻘처럼 되어 있었다.
오르막 길에서 천천히 가자니
뻘과 같은 진흙 때문에 올라가기 힘들었고
빨리 가자니 엉망이 된 길 때문에 차량이 미끄러져 길옆에 처박힐 것만 같았다.
얼마가지 않아서 차량 바퀴는
마치 신발에 진흙이 잔뜩묻은 것처럼
악셀을 밟아도 겉돌기 시작했다.
운전 도중에 차가 여러 번 미끄러지고
또 차량이 뒤집힐지도 모르는 위험한 순간들이 있어서
그 때마다 일행들을 차에서 내리게 했다.
한 번은 차가 반바퀴 빙그르르 돌면서
왼쪽 구덩이에 빠지기 직전에 겨우 멈춰 섰는데
그 진흙탕 길을 나올 때 차가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이 때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간절하게 주님의 이름을 부른적이 없었다.
이전에 웨이브 갈 때나
White Pocket 갈 때 수 십번 이 길을 지나왔지만
이 날은 정말 살 떨리는 최악의 날이었다.
갑자기 폭설이 내려
체인없이 겨울 폭설을 뚫고
구절양장같은 요세미티 갈 때도 살 떨리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30분이면 충분히 나갈 수 있는 길을
4륜 구동의 지프 랭글러로 1시간 넘게 걸렸다.
악전 고투하며 마침내 길을 빠져 나왔을 때
89번 도로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고 강풍에 폭설로 인해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날 2023년 2월 23일,
LA는 34년 만에 눈보라 경보가 발령되었고
동부와 중부 29개주 또한 겨울 폭풍 경보가 내려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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