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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반지 Apr 22. 2023

 "조직 안의 사람을 조심해라"

고용센터 김주무관 이야기

영화 신세계에 나오는 대사 같았다. 범죄 조직 내부에 치열한 혈투, 늘 적은 내부에 있다.

하지만 저 대사는 근무경력 20년 차 이상의 선배주무관님이 5년 차 미만 주무관들에게 건넨 따뜻한 조언이었다.



악성민원이 많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고용노동부는 공시생들에게 '노병우'로 불리는 험지 직렬 중 하나였다. 나야 콜센터 근무 8년 차로 숱한 진상 민원들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저 말이 의미가 있지는 않았다.


실제로도 난 콜센터에서 만난 '개진상'보더 더한 '개진상'을 고용노동부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아직 만나지는 못했다.  뭐든 상대적이다 보니 그런 거 같고 실제로 동기 몇몇은 악성 민원으로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실업급여 수급자격 심사 업무를 맡았던 동기는 민원인에게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안 다고 하자  "그래 너는 그렇게 잘서 그 자리에서 9급 공무원 하고 있냐? 넌 얼마나 똑똑한데? 너도 공부 못해서 겨우 그 자리에 있는 거잖아"라면서 독극물 같은 말을 몇 분간 쏟아내서 그 자리에서 펑펑 울어버렸다고 한다.


고용노동부= 악성민원, 이런 공식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올초 대규모 인사이동이 있었을 때, 우리 팀에서도 일 잘하기로 유명한 한 선배님이 다른 지청으로 가시게 됐다. 고용센터 근무 경력 20년 이상이었던 그 선배 주무관님은 송별회의 끝자락 즈음 이런 말을 하셨다. 평소 묵묵하게 일만 하시고 말이 많지 않았던 주무관님이라 어떤 말을 하실지 더욱 궁금했다.


"악성민원이 아무리 화가 났다 해도 급하게 풀려고 하지 말고 너의 기준을 가지고 천천히 풀어가려고 하면  시간이 걸려도 많이 헝클어지지는 않을 거다. 결국엔 어느 정도는 풀리게 돼 있고 그 사람들은 다시 보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지만 앞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진짜 조심해야 하는 것은 조직 내 사람들이다."

나는 공포영화를 본 것처럼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선배 주무관님은 본인이 겪었던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이었던 팀장님, 과장님 들을 얘기하셨다.(물론 실명은 거론하지 않으셨다.)  선비 같은 같은 품성을 지닌 분이라 들으면서도 충격적이었다. 그들로 인해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한 동료들을 옆에서 보는 게 더 힘들었다고 하셨다. "나를 지켜라. 그런 사람들 때문에 쓰러지지 말고 너를 지켜야 한다."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만약에 만나면 말이야." 웃으셨지만, 옅은 미소는 씁쓸했다.


그리고 얼마 전 또 다른 30년 가깝게 근무하신 선배님도 같은 말을 하셨다.

"나야 몇 년 안 남아서 가면 되지만, 20년도 넘게 일해야 하는 너희들은 꼭 '너희를 지켜라'"라고 하셨다.

"조직 내 이상한 사람들은 5년에 한 번씩은 만난다.

 내가 지금 생각해 보면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인 거 같아.

하나는 그런 사람을 만나면 피해라. 휴직을 할 수 있으면 하고 부서 이동을 할 수 있으면 하고 피해라.

그게 안 된다면 몇 년만 로봇처럼 감정 없이 살아라. 그래야 너의 인간성을 지킬 수 있다."


나는 겨우 3년 차라 그런 지 그런 인간성 자체를 위협하는 분들은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선배님들이 우려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어렴풋하게 알 수 있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그것을 두 번 세 번 겪으신 분들이 우리 부에 발을 딛는 신규들에게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말

"악성 민원이 아닌 조직 내 사람을 조심해라"

 오로지 '사람' 때문에 사람으로서 본질을 위협받을 수 있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는 것,

그분들은 알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 부여서가 아니라 회사원이라면 통과의례처럼 겪어야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고용노동부의 공무원 선배가 아니라 생의 삼분의 이 이상을 회사라는 곳에서 보낸 한 명의 사람으로서 하는 충고일 수도 있다.


'나를 지켜라 아무도 너를 지켜주지 않는다.

너를 지켜라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농담처럼 던지셨지만 잘 붙들어서 마음 한편에 곱게 모셔야겠다. 그리고 마침내 선배들이 말한 그러한 사람이 나타났을 때 꺼내서 봐야겠다. 보고 있노라면 나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생길 것 같다.


'사람'으로 내 본질이 위협받을 수 있지만 결국 그 사람들을 견뎌냈던 '사람'들의 지혜로 내 본질을 지킬 수 있다. 잊지 말자, 기억하자, 혹시 앞으로 만나게 돼도 당황하지 말자. 그리고 단정하게 나를 지켜내자.  


<사진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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