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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반지 Jan 14. 2023

공무원도 사람, 회사원, 그리고 시인

고용센터 김주무관 이야기

출근을 하면 각종 시스템에 로그인을 하자마자 서둘러 달려가는 곳이 있다.  

선배님들의 퇴임사가 올라오는 게시판이다. 그곳에서 가장 먼저 올라온 퇴임사를 하나 읽는다.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 이후 일을 시작한다. 글을 읽은 첫날이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어느 순간 나의 하루 루틴이 돼버렸다.


처음에는 단순 호기심에서 읽기 시작했다. 그 어떤 일터에서도 10년을 채우지 못했던 김주무관은 한 인간이 한 곳에서 30년 이상 일을 한 후 드는 생각이 무엇인지 진짜 너무 궁금했다.


여기서 잠깐, 김주무관의 노동의 역사를 정리하자면 책 한 권은 쓸 수 있다.

하루 일하고 짤린 퀵서비스에서부터 일주일 일하고 짤린 화장품 상품 판매, 한 달 일하고 짤린 pc방 그리고 8년을 일한 콜센터까지 쓰려고 마음먹으면 한 달은 매일매일 글을 쓸 수 있다.


하루 일한 퀵서비스 알바 이야기는 짧다. 오전 10시, 서울 시청에서 받은 어떤 서류를 경기도 안양의 모 동사무소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서류는 오후 5시 30분에 전달됐다. 그리고 난 짤렸다.

(변명: 논 건 아니에요. 지방에서 20년 살다 서울에 상경하자마자 처음 한 알바가 퀵서비스였어요. 서울과 경기도의 지리를 모르는 20살 어른 같지만 학생이었던 여자사람임을 고려해 주세요.)


그런 내게 수십 년을 한 직장에서 일하고 퇴사를 한 사람들이 남긴 퇴임사 게시판은 보물창고 같은 곳이었다.


내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이 아닌가.

나는 이때까지 가져보지도 못한, 들어보지도 못한

그 반짝거리는 보석 같은 한 인간의 숭고한 감정들.

심지어 픽션도 아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논픽션 퇴임사들은 '마지막'이어서일까.  모두'시'였다.


나는 퇴임사들을 읽으면서 '모든 인간은 결국엔 단어로, 글로, 나를 표현하고 싶어 하는구나'를 절절히 느꼈다.


동사무소 민원대에 세상 재미없게 앉아서 일을 하는 공무원들을 떠올려보면,

시장통 같은 고용센터의 실업급여 창구에 앉아 반복된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하고 있는 샌님 같은 공무원들을 떠올려보면,

우리는 시인을 생각할 수 있을까.   




22년 가을, 그날 아침 '문밖으로 나서려 합니다'라는 퇴임사를 클릭했다.

첫마디가


   머리는 허여지고, 등은 굽어지고

   몸은 이곳저곳 아파와

   늙음이 다가옴을 느낍니다.


   철 모를 나이에 공직에 들어와

   다른 짓 할 용기가 없어

   환갑이 되는  이 나이까지

   여기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콧등이 시렸다. 나도 모르게.

아~이런 마음이구나.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한 선배님 감사합니다. 이런 감성을 느끼게 해 주셔서)


 이제 창문에 드는 햇볕으로 눈을 떠 보고

  몇 일 수염을 깍지 않아도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못 먹는 술 마시고 헛소리도 지껄여보고

  그저 멍 때리는 시간도 가져볼까 합니다.


   '안녕'이라는 두 글자 이정표 이곳에 남겨두고

   어떨지 모를 문 밖의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둥지 떠나는 000이 인사드렸습니다.


수십 년을 일하게 되면 일터는 둥지가 되는구나.

수십 년을 한 곳에서 일하게 되면 이젠 일터를 떠나는 것이 두려운 것이 되는 거구나.


'안녕'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둥지'라는 단어 때문이었는지

슬펐다.



마구마구 좋아서가 아니라,

무지하게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네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저 철이 없어,

다른 짓 할 용기 없어

그토록 오랜 시간 고용노동부에 있었다는 선배님.


고용센터 김주무관은 나름 철 들어서 공직에 들어왔는데, 또 다른 길을 걸을까?

아님 퇴임사 속 선배들과 비슷한 길을 걸어갈까?

2023년 철이 든 것 같지만 철이 없는 질문을 심장에 담고 답을 찾아가는 여행을 시작해 본다.


(퇴임사 출처 : 허락을 받고 글을 올려야 하는데 선배님 성함만 알고 연락할 수 있는 이메일이나 연락처 등이 더 이상 다우리에 남아있지 않아 허락을 받지 못하고 일부 글을 사용했습니다.

혹시라도 이 글을 보시다가 불편해지셨다면 댓글을 남겨주시면 바로 내리겠습니다.


하지만 선배님의 글에 위로를 받아 어느 하루 즐겁게 공직생활을 하고 있는 고용센터 김주무관에게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시길 바라봅니다. 다시 한번 너그러운 용서를 구해봅니다. 선배님. ^^)


(사진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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