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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반지 Jul 09. 2022

민원인과 36분의 통화

고용센터 김주무관 이야기

전화 수화기를 내려놓으니 통화시간이 36:00이라고 적혀 있었다.

저기서부터 오는 한 줄기 바람이 이마에 시원하게 불었다. 나는 드디어 만났다. 경청의 고수를.


경청의 고수는 달변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도로 단련된 경청의 기운은 나에게 전달되었고 나도 어느새 경청을 하면서 시간의 흐름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고용센터에서 육아휴직급여와 출산휴가급여를 담당하고 있다.  최근 육아휴직급여 정책도 꽤 바뀌었고 본부와 지방센터에서 육아사후지급금 찾아가기를 적극 리고 있기 때문에 전화 문의들이 많다.


사실 '육아휴직급여' 이렇게 끝인 거 같은데, 급여 산출방식은 복잡하다. 일단 통상임금(센터 담당자들끼리도 논쟁이 빈번하다.) 개념부터 막히고 상한액 하한액, 75%,25%, 급여 감액 등 일반인들이 보기엔 어렵다.



오늘 만난 경청의 고수분도 각 종 산식을 통해 산정된 본인의 육아휴직급여 및 그에 따른 육아휴직급여 사후지급금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생기신 것 같다. 이미 관련 자료들을 많이 섭렵하신 듯 첫 질문부터 깔끔했다.

"오늘 입금된 2년 치의 육아사후지급금의 정확한 산정방식을 알고 싶습니다."

성우톤의 목소리를 소유한 은행원이셨다.


나는 '와, 2년 치 육아휴직급여를 다 ~~~~??' 순간 머리가 까매졌다. 일부 은행은 육아휴직기간동안 회사에서 기본급의 몇퍼센트를 지급하기 때문에 센터에서 지급하는 육아휴직급여의 감액이 발생되고, 심지어 매달 지급하는 급여가 다를 수도 있다. 그걸 일일이 24개월을 하나하나 다 ~~, 심지어 법 개정 이전,

순간 까만 머리는 이제 노래졌다.


하지만 김주무관에겐 엄청난 비밀 무기가 있다.

그건 바로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라는 백두산 같은 무게의 생각이다. 마음속 한편에 항상 모셔두고 있다. 그 무기를 오랜만에 꺼내 들었다.


김 주무관은 답하기 시작했다. " 아, 네 2년 치이고, 매달 금액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감액이 발생되어 좀 복잡하게 들릴 수도 있어서 천천히 알려드리겠습니다."


민원인은 침착한 목소리로 "네 제가 적겠습니다."라고 답하셨다. 그리고 나는 24개월 육아휴직 급여를 십원 단위까지 약 7분 넘게 알려드렸다. 글을 읽고 계신 분들도 7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보면 알 것다. 짧지 않은 시간이라는 것을.


중간에 치고 들어올 수 있음에도 끝까지 들어주시는 게 고마워서 '까매졌다 노래진 머리'는 다시 파란 하늘에 둥둥 구름도 생겨났다. 생각해보면, 이 분을 제외한 모든 민원인들 , 내 가족, 친구, 심지어 신랑도 7분여의 시간 동안 나의 말을 끊지 않고 들어주는 이가 있었던가.

보통 민원인이 아님을 나의 귀는 알아챘다.


이제 경청의 고수 차례였다. "그럼 이번 급여에 대한 저의 의문점을 얘기해 보겠습니다." 하시면서 8분이 넘게 막힘없이 정확한 발음으로 말씀하셨다. 마치 논리적으로 정리가 잘 된 답안지를 낭독하시는 것 같았다. 오히려 짧은 낭독회 같아 아쉬움마저 들었다.


높은 전달력 때문인지 고수의 답안지에서 오류는 빨리 발견할 수 있었다. 애초 잘못된 공식에 숫자를 넣었기 때문에 답이 틀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경청의 고수의 기를 이어받은 담당자의 차례였다. "아, 선생님이 의문을 가지게 만든 오류의 시작을 발견했습니다. 그 부분은 ~~" 나의 의견도 5분이 넘었다. 경청의 고수는 중간중간 네에~ 하면서 이해를 잘하고 있다는 추임새 외에는 대화를 막는 어떤 발언도 하지 않으셨다.


이런 식의 몇 번의 질문과 답을 주고받았다.  

진정한 경청에서 오는 그 고요함이란, 평화로웠다.

 

경청의 고수와 담당자는 하나둘씩 매듭을 풀어갔고 '마침내' 엉켜진 실타래를 풀었다.


경청의 고수는 담당자에게, 나는 민원인에게 "수고하셨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마지막의 말 한마디까지 겹치지 않게 그렇게 돌림노래처럼 "수고하셨습니다"를 두 번 말한 후 대화는 끝이 났다.



담당자라는 이유로 말이 앞서갈 때가 많다.

'너는 모르니까, 내가 아니까, 내가 수정해줄 수 있으니까, 내가 지급 결정하는 거니까'

시간을 아끼려고, 그렇게 아낀 시간에 신청서 하나 더 보고 한 명이라도 더 빨리 급여를 주려고,

그게 민원인에게 더 좋은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나는 민원인과 대화 중에 항상 어느 부분에서 말을 끊고 치고 들어가는 게 적당할지 머릿속 회로들을 돌리면서 정신없는 말들을 난잡하게 쏟아냈다.


특히 오늘 같은 이런 문의는 알려줄 수는 있으나 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는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문의들을 '시간 낭비'라고 치부했다. 하지만 본인이 받은 급여의 정확한 산출방식을 알고 싶어 하는 것, 그 자체가 시간낭비는 아닐 것이다.


경청의 고수가 알려준 것은 단순했다. '상대방이 말을 할 때는 듣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청하다 보니 그 질문의 중요도를 판단하지 않고 오로지 질문의 요지에만 집중하게 됐다. 보고 배운다는 단순한 진리, 오늘 나는 경청의 고수분에게 듣고 배웠다.

우리 동네 노을의 따뜻함처럼 '경청'도 따뜻했다

 


저녁을 먹은 후 신랑과 매미소리를 들으며 어둑해진 동네 산책길을 걷고 있는데 경청의 고수가 생각이 났다. 신랑은 "그렇게 긴 시간을 통화한 것 만으로 이미 악성 민원인이 아니냐"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콜센터에서 8년, 고용센터에서 1년 6개월 통틀어 처음 만났다고 했다.


'경청의 고수를, 좋았다. 이제라도 만나게 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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