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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반지 Sep 09. 2022

"주무관님, 법 조문을 보세요."

40대 늦깎이 공무원의 슬기로운(?) 공직생활

내게 본부 무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본부 담당자로 말하자면 나에겐 '엔젤'같은 분이다. 직접 만나 뵌 적은 없지만, 작년 모성보호 업무를 할 때부터 내가 심적으로 의지하는 분이시다. 직무교육 때 줌 영상으로 본 게 전부인데, 어려울 때마다 막힌 돌을 뚫어주셔서 왠지 어느새 우리 팀의 저만치 앉아계신 선배 같기도 하다.


항상 판단이 어려운 케이스로 전화 문의를 할 때마다 본부 무관님은 나에게 원칙을 다시 일깨워 주셨다. 복잡한 상황에 길을 읽은 나에게 '바닥을 보세요. 풀에 가려진 길이 있을 거예요. 그걸 보고 가세요'하셨다. 무관님 말씀을 듣다 보면 놓치고 있었던 것이 자연스레 떠올랐고 흐려진 길은 선명해졌다.


이번에도 역시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고 무관님께 전화를 했다. 044로 시작하는 본부 전화번호를 누를 때마다 떨린다. '겨우 이런 문제로 바쁜 본부 무관에게 전화를 한 건가'라고 생각할까 봐 그렇다.


그럼에도 어느 한 근로자의 결코 가볍지 않은 권리를 나의 좁은 판단으로 지켜드리지 못하는 것보단, 내가 잠깐 창피하고 말자라는 심정으로 전화벨이 울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알 수 없는 사명감을 다져본다.



이 케이스는 자세 설명은 할 수 없지만 핵심은 이미 지급받은 육아휴직급여에 대한 반환 건이다. 사업장에선 '육아휴직 취소' 공문을 정식으로 송부한 상태였다. 육아휴직급여를 지급할 때도 법에 근거해서 지급하는 것이고 환수를 할 때도 법에 근거해서 환수를 해야 한다.


이번 육아휴직급여 환수 건은 센터별로 판단도 달랐고, 바로 옆 주무관님과 내 판단도 엇갈렸다. 환수에 대한 법정 근거는 물론 부정 일지, 부당 일지에 대한 여러 의견들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았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난 이런 상황들을 나름 정리해서 말했다. 하지만 산만한 내 모습이 나도 부끄러웠다. 전국에서 이런 주무관들이 얼마나 많이 전화를 할 것인가. 그럼에도 엔젤 무관님은 침착하게 말씀하셨다.


"음, 주무관님 고민이 뭔지 알겠습니다. 주무관님 이런 상황은 일괄적으로 본부에서 동일 지침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에요. 세세하게 들여다보면 케이스별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무관님, 이번 케이스의 경우는 두 가지를 기준에 두고 판단해보세요. "


나는 귀를 쫑긋했다. 판단의 기준은 뭘까?


엔젤 무관님은 이어 말씀하셨다.

"주무관님, 법 조문을 보세요. 조문대로 법의 취지를 생각해보세요. 그것이 환수의 근거규정입니다.


"아??----, 네 -----, "

너무나도 담백한 답이었다. 이게 뭐야 할 수도 있겠지만, 쌓여가는 신청건수를 시간에 쫓겨 급하게 처리하기 바빴던 나에겐 경종을 울리는 듯했다.


"그리고 주무관님, 노동법은 근로자를 위해서 있는 거잖아요. 근로자에게 너무 가혹하게 잣대를 들이대지 마세요.  이 두 가지를 중심에 두고 판단을 해보십시오."

 

5분 정도의 길지 않은 통화였지만, 나는 가장 '기본'을 놓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번에도 뒤늦게 깨달았다. 머리가 멍해지면서 내가 이 문제를 어떻게 풀려고 했는지 지난날들을 뒤쫓아봤다.


 나는 '부정 또는 부당'이라는 단어에 집중했었고, 환수 절차와 각종 공문을 어떻게 깔끔하게 쓸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무관님이 말한 위의 두 가지를, 처음부터 나는 고민하지 않았다. 오히려 실무자가 되기 전에 공시생때 책에서 봤던 거 같다. 그리고 누군가에 듣기도 했던 거 같다. 예전에.


사실은 실무자가 된 이후, 법령집을 더 보지 못했다. 지침과 전산시스템, 그리고 공문 작성 등에 관심을 더 가졌던 것 같다. 엔젤 무관님의 조언대로 답은 법 조문에 있다. 다른 곳에서 답을 찾기 위해 필요 없는 수많은 말들을 쏟아내며 시간을 허비했음을 나는 되돌아본다.  


이제는 법 조문을 보자, 그리고 가혹하게 법의 잣대를 들이대지 말자.  


<사진 출처:픽사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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