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딱히 꿈이 없이 초, 중을 보내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 꿈이 생겼다. 국어 시간에 한참 선생님 얘기를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기자가 되고 싶었다. 그동안 뭔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때부터 내 꿈은 기자였다. 대학교 입학식 때 입학식 하는 강당보다는 학교 신문사 건물을 찾아 헤맸다. 대학 4년 동안 열심히 내 영혼을 바쳐 신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졸업 후 기자가 됐다. 하지만 너무 안타깝게도 난 기자 생활을 버틸 수 있는 체력이 없었다. 취재는 새벽에 시작해서 다음 날 새벽에 끝이 났다. 1년 정도 기자생활을 붙잡고 있었지만 나로 인해 피해를 보는 동료 기자들과 조직에 미안해서 사직서를 냈다.
그 이후론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기에 학원에서 영혼까지 바치진 못했지만 온 열정을 불태우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전업주부가 됐다. 임신과 출산을 두 번 반복하면서 난 전업주부가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즈음부터 밤마다 심하게 가려웠고 잠결에 피가 나게 팔을 긁어대곤 했다.
당시 이 병의 원인을 알기 위해 00시에서 유명한 00 한의원을 찾아갔다. 한의사는 맥을 짚어보고 말했다.
"이런 사람은 집에서 애만 못 키워요. 계속 병이 날 거예요. 그리고 살림도 잘하는 스타일이 아니야. 그냥 나가서 일을 해야 없어지는 병이에요. 비싼 보약을 지어달라고 하면 지어주겠지만, 일시적으로 좋아질 뿐 이 병은 못 고쳐요. 나가서 돈을 벌어요. 그러면 나을 테니. 오늘은 그냥 간단히 침만 한 개 놔줄게요."
때마침 혁신도시 정책에 의해 우리 지역도 공공기관들이 내려오고 해당 기관의 콜센터에서 상담사를 대거 채용했다. '일 할 기회다' 생각하고 3과목 시험 보는 콜센터 상담사 시험에 응시했다. 근무시간도 4.5시간이라서 그런지 나와 같은 주부들이 대거 응시했고 나름 경쟁률도 20대 1이었다. 다행히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그리고 8년을 근무했다. 그리고 한의사의 예언대로 가려움도 사라졌다.
그 남자 이야기
대학교 때 사귀었던 남자 친구는 꿈이 공무원이었다. 국가정책을 집행하면서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겠다는 것이 이유였다. 기자가 꿈이었던 나는 남자 친구의 그 꿈이 너무 현실성이 없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내게 공무원이란 책상에 앉아서 같은 일을 반복하는 심심하고 지루하고 딱딱하고 변하지 않고 새로움이 없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일'을 하는 '가장 재미없는 사람들'이었다.
남자 친구는 2008년, 당시 로또에 당첨될 확률과 비슷하다는 지방직 공무원을 두 번이나 합격했다. 00시에 먼저 합격했고 시험공부한 게 아까워 봤다는 나머지 시험도 두 달 후에 합격했다. 나는 그때도 남자 친구가 부럽지 않았다. 공무원에 대한 내 생각은 여전했다. 안정성이라는 블랙홀에 빠져 인생을 고리타분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입장은 불변했다.
하지만 그 무시했던 '안정성' 덕분에 모아둔 돈이 없었지만 남자 친구는 시보만 떼고 나와 결혼을 했다. 그런데 결혼 후 남편이 공무원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난 충격에 빠졌다.
남편은 동사무소에서 일할 땐 00동 주민들이 동사무소에 바라는 것을 제안받아 실제 주민들이 참여하는 사업을 만들어냈다. 동네 정육점 사장님, 과일가게 사장님, 빵집 사장님, 통장님들, 부녀회 등 동네의 입소문을 낼 수 있는 분들과 친분을 유지하면서 만든 사업들을 주민들이 주인이 되어 운영할 수 있게끔 조직화했다.
구청으로 발령이 났을 때도 주민들이 바라는 편의시설들의 타당성을 조사해서 예산을 집행해 실제 건물을 만들었다. 주민 대상 퀴즈쇼도 했다. 신기했다. 각종 문화사업, 관광사업, 정책 홍보사업 등 구체적인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는 것조차 재미있었다. 물론 남편은 잠도 못 자고 별을 세어가며 힘들게 일을 했지만 그 모습도 놀라웠다.
공무원은 단순한 일을 심심하게 딱 6시까지만 하는 거 아니었나?
아니었다. 남편은 항상 동네를 관찰했고 사업을 구상했다.
어떨 땐 무대 기획자도 되고, 어떨 땐 방송국 pd도 되고, 어떨 땐 시나리오 작가도 되고, 어떨 땐 설계사도 됐다가 건축 사무실 소장도 됐다가 변화는 끝이 없었다. 심지어 구청장님 비서를 하는 모습을 볼 땐 남편이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보였다. 비서 캐릭터는 남편의 성격상 생각해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매일 잘 다려진 빳빳한 와이셔츠에 네이비 양복을 입고 조신하게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남편을 보면서 공무원에 대한 '내 생각'에 희미하게 금이 가고 있었다.
남편이 공무원으로 일한 모습들을 5년 즈음 보고 내가 그랬다.
"그거 공무원, 나한테 1억에 파는 거 어때요? 아 그거 탐나네."
남편이 공무원을 10년 즈음하고 나도 콜센터 업무를 7년 즈음했을 때, 남편은 계장님이 되어 새로운 업무에 눈이 총총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반복되는 전화상담 업무에 지겨워지면서, 지루해져가고 있었다. 그래서 자격증 공부를 했고 내친김에 욕심을 내봤다.
"공무원 시험공부해 볼까? 당신이 팔지도 않으니 내가 시험 봐 볼까?"
남편은 그랬다.
"상담사 김 00도, 공무원 김 00도 선택은 당신이 하는 것이지.
그런데 공무원 김 00이 되면 멋지긴 할 거야. 나이가 많으니깐.^^
그리고 당신 동안이잖아, 괜찮을 거야."
지방직 공무원인 남편을 10년간 보면서 공무원이 되고 싶어졌다.
'공무원은 멋지구나. 공무원은 그 누구보다 역동적으로 일을 하는 거구나'
나와 가족이 아닌 완전한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데 나라에서 월급을 받는 일, 그것이 공무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양한 드라마의 주인공 또는 조연 역할은 덤이다. 누군가는 이것을 공무원의 비전문성이라고 한다.
하지만 '하는 척' 하면 명배우가 못 되듯이 공무원도 '하는 척'만 하면 국민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진짜 행정을 하는 공무원이 국민에게 감동을 준다. 남편은 이것을 경험했고 끊임없는 '적극행정'을 위한 설계도를 그려가고 있었다. 나도 아내로 더 나아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 모습에 매료됐던 것이다.
p.s : 인생은 항상 반전이 있는 법.
막상 공무원이 되어 보니, 공무원이라 다 같은 공무원이 아니었다. 남편은 지방직 행정직 공무원이었고 난 국가직 공무원이라 남편처럼 내가 기획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는 이미 기획되고 설계된 일을 집행만 하는 직렬이었다. ㅎㅎ 그래도 공통점이 있다면 국민을 위해 일을 하고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통점을 하나 더 찾는다면 나도 동일 업무를 3년 이상은 하지 못하니깐 다양한 업무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편만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