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식을 여름에 맞게 바꾸어봤습니다
40대 늦깎이 공무원의 슬기로운(?) 공직생활
자주 내부 조직도가 바뀐다.
느낌상 일주일에 한 번은 바뀐 내부 조직도가 메일로 오는 것 같다. 내부 조직도엔 소종한 자료들이 있기 때문에 난 놓치지 않고 꼼꼼히 챙기는 편이다.
그런데 이번에 온 내부 조직도엔 저 말이 머리에 리본을 단 것처럼 예쁘게 매달려 있었다.
처음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고용관리과 k주무관님은 항상 메일에 활기를 동봉하여 보내셨다. 그래서 이번에도 주무관님의 방식으로 더위에 지친 직원들에게 '얼음 같은 시원함'을 심심하고 딱딱하기 그지없는 내부 조직도에 담아서 보낸 것 같다.
내부 조직도는 작은 칸칸마다 직급과 직위, 이름이 쓰여 있고 해당 주무관의 담당 업무와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그리고 여름용 서식(ㅎ)이라 그 밑에 바다로 놀러 간 넥타이를 매고 반바지를 입은 회사원이 튜브를 들고 있는 그림이 있었다. 또 다른 그림엔 머리를 잔뜩 위로 치켜세워 멋을 낸 회사원이 알록달록 해먹에 누워 선글라스를 끼고 빨간색 과일 주스를 노란색 스트로우를 통해 마시고 있었다.
나 같은 신규는 1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지청장님 뿐만 아니라 과장님들 그리고 소장님, 팀장님, 줄줄이 딸린 우리 고노부 공무원들 이름들로 빽빽한 내부 조직도에 이게 웬 말인가.
그런데 닮고 싶었다.
마음속으로 파도의 일렁임 같은 것들이 생겨났다.
내가 공무원이 되고 나서 닮고 싶은 공무원이 있었던가?
나보다 한참 나이도 어리신 젊은 주무관님이었지만 공직생활을 한 이후 처음으로 뭔지 모를 어렴풋하게 나도 저분처럼 공직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똑같은 화면을 재생하는 것처럼 사무실 문을 열고 자리에 앉고 컴퓨터 전원을 켜고 커피를 가지러 탕비실에 가고 자리에 앉은 후 다시 일어나 사물함 열쇠를 들고 서류 바구니를 꺼내어 저리에 앉는다. 커피를 한잔 들이마신 후 마스크를 끼고 안경을 그 위로 편하게 안착시킨 후 키보드에 손가락을 얹는다. 시스템을 켜고 OTP 비번을 누르면 하루가 시작된다.
지금 같은 일상의 반복은 바위처럼 굳어져 가고 있기 때문에 땅이 두쪽이 나지 않는 이상 나는 항상 그 시간에 사무실 문을 열고 커피를 마시고 그렇게 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살아갈 것 같다.
모든 공무원들이 이런 반복된 삶을 살면서 '자연스러운 활기'를 '자연스럽게' 잃어버리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k주무관님의 그런 소소한, 청량한 아이디어들을 결합해 업무를 처리하는 방식은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고 즐거움이었다.
그런 것이 반복된 일상의 고리를 끊어주는 것이 아닐까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닐까.
나도 저런 공무원이 돼야겠다.
업무를 빠르게 처리하는 공무원도 있고, 업무를 꼼꼼하게 처리하는 공무원도 있고,
업무를 적당히 처리하면서 워라밸을 추구하시는 공무원도 있고,
각각의 주특기들이 다 있다.
나는 아직 주특기라 할 게 없다.
결재서류 담당자란에 아직도 종종 내 이름을 적지 않아 팀장님에게 불려 가고
시스템에서 결재요청을 하지도 않는 채 결재서류만 제출하여 팀장님에게 불려 가고
아주 가끔 검토보고서를 빠트린 채 결재서류를 냈다가 팀장님에게 불려 가고
처리 속도가 느려 팀장님에게 한소리 듣기도 하고
결재를 회수하라는 팀장님 말에 '넵' 해놓고 다른 결재서류를 회수하기도 하고
부당이득 처리 순서를 헛갈려 내부결재의 내용과 외부 결재 내용을 섞어서 결재를 올리기도 해서 여러 번 팀장님에게 불려 가기도 하고
6개월 차 신규가 할 수 있는 실수라는 것은 골고루 다 해보고 있는 중이기에 '주특기' 만들기 이전에 '주실수'를 줄이는 게 관건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덧 나도 공직생활의 롤모델을 찾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대통령상을 탄 공무원보다 기껏해야 3년 차 선배인 k주무관님의 공직 스타일이 정말로 내 맘에 들었다.
저 말이 얼마나 예쁜가, 얼마나 청량한가.
"서식을 여름에 맞게 바꾸어 보았습니다."
서식을 여름에 맞게 바꾸어 보겠다는 저 생각, 저 마음,
진심을 담아 닮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