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회사에서 심리상담을 받았었다. 먼저 꽤 장수가 있는 설문지도 작성하고 '하마 입'이 연상되는 기계에 내 손가락을 넣은 뒤 숨을 참아가며 검사도 받았다. '하마 입'을 통해 나의 무언가가 기계로 전달되자 기계는 빠르게 나의 몸과 정신세계를 숫자로 변환해서 결과를 내놓았다. (딱히 들키고 싶지 않았으나 기계들은 나의 기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
심리 상담사분이 각종 숫자들로 분석된 나의 몸과 정신을 훑어보시더니 갑자기 눈이 동그래지셨다. "오옷, 최근 이런 수치 실제로 처음 보는데, 와 신기하네 오랜만에 이런 수치를 보네요" 하시면서 나에게 물었다.
"취미가 뭐예요? "
나는 숫자들이 말하는 의미를 모르니 불쑥 나온 질문에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말했다.
"글쓰기?"
심리 상담사분이 다시 말했다.
"혹시 등단하셨어요? 무슨 종류의 글을 쓰는데요?"
내가 말했다.
"그냥 글쓰기인데 그러니까 일기? 에세이? 몇 자 적는 정도인데, 아 등단은 안 했고요."
심리 상담사분이 "보통 성인의 스트레스 회복 탄력성이 30점에서 40점인데 선생님은 70점으로 아주 높게 나와서요. 전 이런 분 실제로 보면 취미를 꼭 물어보고 싶더라고요. 그럼 혹시 전공은 뭐했어요? 운동은 뭐해요?" 상담사분은 계속 질문을 던지셨다.
선생님이 생각하기엔 이렇게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은 특이한 취미나 특이한 전공이나 특이한 운동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같이 답변이 너무 평범했나 보다. 그래서질문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취미는 글쓰기에 전공은 경영 쪽, 운동은 걷기, 내가 봐도 흐름도 없고 인상 깊은 대목도 없긴 하다. 상담사분은 풀리지 않는 의문의 답을 찾기 위해 그다음은 사주풀이를 선택하셨다. 나의 높은 회복탄력성의 비밀을 풀기 위해 기계가 아닌 통계학 쪽으로 옮긴 셈이다. 일단 출생 연도와 생일을 말하고 태어난 시는 모른다고 했다. 아쉬워하셨다. '태어난 시를 알아야 정확한데'하며 말이다.
심플하게 나무와 흙만 있다는 나의 사주 이야기는 이렇다. 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36살 이후 물이 있어 잘 풀린다는 것이었다. 딱히 여기서도 상담사분이 궁금해하는 질문에 답은 없는 듯했다. 상담사분은 답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물을 많이 마시고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게 좋겠다'는 조언과 함께 심리상담을 마무리하셨다.
그런데 1시간 정도의 삼담이 끝난 후 상담사분은 답을 못 찾은 듯했지만, 나는 답을 찾은 것 같았다. 내가 왜 회복탄력성이 높은 지 알 것 같았다. 주변 주무관님들에게 말했더니 다들 '엥 심리상담이 좀 특이한데, 사주는 맞는 거 같고?'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난 기분이 좋았다.
나는 상담사 분하고 얘기하는 게 재미있었다. 그분이 나를 궁금해하는 것도 재미있고 사주 이야기도 재미있고 마지막에 주신 조언도 재미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세상과 사람들이 재미있다. 그래서 스트레스도 재미있다. 이게 답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를 스쳐간 숱한 모든 것들이 다 재미있었고 지금도 재미있으니까, 엔딩이 어떻게 되든 지금은 재미있으니까 그걸로 끝.
(사주처럼 물이 부족했던 겨울의 뿌리 같았던 김주무관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다. 물이 언제 올지 알 수 없잖아. 지금 흙이랑 친하게 잘 지내면 되지. 너도 물을 기다리고 있니? 그냥 우리끼리 재미있는 이야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자. 그래서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에 나를 견디게 해주는 힘은 '지금은 재미있다'였다. 늦깎이 공무원으로 살아가면서도 '지금은 재미있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