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컬러텔레비전 도난 사건

by 후안

컬러텔레비전을 도둑맞았다는 신고가 강력반으로 접수되었다. 사건이 발생한 장소는 미군 기지 뒤편의 산중에 자리잡은 동네로, 무허가 판잣집들이 수십 채 모여있는 곳이었다. 강력반에서는 당장 거기까지 올라갈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일주일 가까이 현장에 출동을 하지 않았다. 형사들이 그 동네 방문을 꺼리며 서로 미루고 있는 속내가 뻔히 드러나 보였지만 인력이 부족하다는 핑계가 거짓말은 아니었다. 서울 올림픽 개최일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강력반의 인력까지 모조리 환경정비사업에 동원된 탓이었다. 한여름 열기가 절절 끓어오르고 매연이 가득한 대로변에서 잡상인들이 끌어내고 흉측한 가건물들을 깨부수는 일에, 강력반 형사들의 큰 체격과 지구력은 꽤 도움이 되었다.

다만 이번 도난 사건의 피해자 역시 형사들과 비교해 조금도 밀리지 않는 끈기를 가졌다는 점이 문제였다. 신고를 한 사내는 아침저녁으로 경찰서를 찾아와 어서 수사를 시작해 달라며 눈에 보이는 형사들마다 팔을 붙들고 매달렸다. 반장이 나서서 곧 형사들을 올려 보내겠다며 달래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 업무를 방해하면 사건 청탁으로 입건할 수밖에 없다며 겁을 줘보기도 했지만, 사내는 조금도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고 더욱 막무가내로 경찰서에 숨어들어 소동을 일으켰다. 결국 일주일째 신고자의 방문이 이어지자 반장은 강력반의 가장 막내인 신참 형사를 불러 이번 사건을 전담시켰다. 경력상 아직 이르지만 사건을 단독으로 수사할 수 있는 기회를 줄 테니 멋지게 해결해보라는 격려가 좋은 명분이 되어주었다.


사건을 맡게 된 김창기 경장은 그동안 선배들에게서 배운 수사기법을 써먹을 생각에 가슴이 떨려왔다. 최대한 신속하게 범인을 가려내어 손목에 수갑을 채우는 짜릿한 순간을 만끽하리라. 하지만 창기는 사건 발생 장소가 어디인지 알아내는 데부터 한참의 시간을 보내어야 했다.

“그런 곳에 마을이 있다고요?”

선배 형사들이 벽에 붙은 관내 지도 위에 손가락을 대고 보이지 않는 선을 그려가며 마을의 위치와 경로를 알려주었다. 창기는 선배들이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먼저 들었지만, 신고자가 남겨 놓은 약도와 정확히 위치가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자 그는 순수 혈통들에게만 전수되는 비밀의 장소가 자신에게도 허락된 것 같아 짜릿한 기분에 휩싸였다.

고작 석 달 전에 이곳으로 발령되어 온 신입 형사의 입장에서는 그 마을의 존재를 모르고 있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쩔 수 없이 그곳을 방문해야 할 사정이 생기는 공무원들이나 차비를 아끼기 위해 산을 넘어 다니는 아랫동네 주민 몇 명을 빼고는 미군 기지 뒷산에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 알지 못했다. 산세가 가파른 데다 높이가 만만치 않은 그 산은 얼핏 봐서는 미군들이 관리하고 있는 군사 지역의 일부로 보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쉽게 금단의 구역으로 오인되었다. 마을은 산 아래에서 올려다봐야 지붕 하나도 찾아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산중에 숨어 있었다. 제대로 길이 닦여있지 않아 차로 들어갈 수 없는 데다 험준한 산길을 한참 동안 올라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경찰이나 우체부, 동사무소나 구청의 공무원들은 아예 그러한 곳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모르는 척하며, 그곳을 올라야 할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산 위의 사람들은 산 아래 사람들의 이런 기대를 무시하고 종종 세상을 향해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일례로 마당에 둥글게 돌을 쌓아 그 위에 솥을 걸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를 삶느라 나무 태우는 연기를 봉화처럼 피워 올려대는 통에, 사람들이 달려와 미군기지 뒤에 산불이 났다는 신고가 이어지게 해 소방서를 시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대충 사태를 눈치챈 소방관들은 구청으로 전화를 걸어 그쪽에서 산림과 직원들을 올려 보내 계도를 하는 게 맞다고 옥신각신 설전을 벌이면서 고기가 얼른 삶아지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물론 덕분에 올림픽을 앞두고 대대적으로 벌어진 환경정비사업에서도 그곳은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흉한 동네를 보이지 않게 만들자는 취지의 사업인데 이미 보이지 않는 동네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암묵적인 동의가 공권력을 집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합의를 이룬 것이다.


그곳은 가난한 동네였다. 애초에 한국전기통신공사에서 선을 연결하려 들지도 않았겠지만, 마을에는 전화기가 놓인 집도 하나 없었다. 누군가의 안부를 물을 일도, 안부를 물어 줄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일 년에 한 번 정도 필요가 생길까 말까 한 전화기가 없더라도 사람들은 크게 불편할 일이 없었다. 다만 거의 집집마다 텔레비전 한 대씩은 가지고 있었다. 텔레비전이 없는 집 세 곳은 노인 혼자 혹은 둘만 살아가는 집이었고, 그중 한 노인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서서히 실명이 진행되어 작년부터는 아무런 빛도 보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이들은 대신 건전지를 아껴가며 하루에 서너 시간 조용히 라디오를 듣는 것으로 족했다.

주말 연속극 방송 시간이면 텔레비전이 있는 집을 찾아 문을 두드리던 이 마을에, 이렇게 순식간에 텔레비전이 늘어난 것은 이 년 전쯤의 일이다. 아시안 게임 중계는 남 눈치 보지 않고 내 집에서 편하게 누워서 시청하겠다며 너도나도 주머니를 털어 중고 텔레비전을 한 대씩 구해다가 산으로 들고 올라온 것이다. 얼핏 보아도 성치 않아 보이는 그 텔레비전들은 오래전에 미군의 부대나 관사에서 버려진 것을 인근 전파상에서 그러모아 적당히 손을 본 후 헐값에 팔고 있는 물건들이거나 출처를 알 수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세월에 값어치를 잃어버린 오래된 장물들이었다.

그것들은 모조리 흑백텔레비전이었다. 애초에 새 컬러텔레비전은 마을 사람들이 아예 꿈도 꿀 수 없는 물건이었다. 중고 제품을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해도 그 가격이 중고 흑백텔레비전을 열 대도 더 살 수 있을 돈이 되었다. 컬러텔레비전은 전화기처럼 없어도 그만인 물건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이토록 허름한 판잣집에 감히 들여놓을 수 없는 거룩한 성물처럼 여겨졌다. 마을의 누구든 산 아래에 갔다가 컬러텔레비전을 볼 기회가 생기면 원 없이 눈호강을 즐기곤 했다. 아이들은 전파상을 옮겨 다니며 커다란 컬러텔레비전을 몇 시간이고 보다가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다 자기집 텔레비전을 켜보고 두 눈이 이상을 일으켜 색맹이 되어버린 것 같은 마비감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러던 마을에 얼마 전 컬러텔레비전 한 대가 등장하면서 마침내 그곳은 흑백텔레비전 밖에 없는 동네라는 오명을 벗어던졌다. 하지만 그것도 한 계절을 넘기지 못한 잠깐의 영광이었다. 두 달도 지나지 않아 그 신성한 컬러텔레비전이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도난 신고를 해 온 피해자는 기지촌 입구에 있는 맞춤 양복점에서 시다로 일하면서 때때로 가봉일을 돕기도 하는 사내였는데, 겉모습으로는 족히 쉰 살은 넘어 보였지만 실제로는 서른 중반의 나이였다. 한 번 만난 사람은 누구나 쉽게 기억하는 인상으로 키는 작지만 체구가 다부지고 짧은 머리에 눈 한쪽이 사팔눈이었다. 본인 입으로 종종 말하기를 젊은 시절에는 주먹이 아주 빨라서 복싱 선수로도 활약했었는데,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고 했다. 사내는 자신의 짧았던 전성기가 끝나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하지만 그 쇠락이 노름에 빠지면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기지촌 사람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나중에 사내와 동향 출신이라는 어떤 불량배가 흘린 소문이 이야기에 살을 붙였는데, 시장 노름판에서 돈을 잃은 후 난동을 피우다 하우스 주인과 그 패거리에게 심하게 뭇매질을 당하게 되었고, 그중 누군가가 휘두른 맥주병이 하필 눈가에 맞아 얼굴뼈가 부서졌다고 했다. 그 후로 돈 한 푼 없이 안와골절을 치료하지 못해 한쪽 눈이 사시가 되어 동네에서 사라졌다는 이야기였다. 사내가 종종 술에 취하면 제 아들의 머리통을 붙들고 다른 건 몰라도 이 눈알 만은 절대 타고난 것이 아니며 결코 유전될 일이 없을 테니까 너는 걱정하지 말고 두 눈 크게 뜨고 당당하게 살라는 술주정을 외치곤 한다는 아이 엄마의 하소연이 이 이야기의 진실성을 뒷받침해주었다.


사내의 본명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저 어린 아들의 이름이 경도였으므로, 다들 경도 아빠 정도로 그를 불렀다. 어린 경도는 엄마를 닮아 깡마르고 주근깨박이에 누가 보아도 못생긴 얼굴이었지만, 성품은 아버지를 닮아 예의가 바르고 머리도 제법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 똑똑한 머리로도 제 어린 시절 아버지의 모습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경도가 돌을 지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감옥에 들어가 육 년 반을 살다 나왔기 때문이다.

그 죄목을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그가 감옥에 갔다 왔다는 사실을 마을 사람들도 대부분 알고는 있었다. 다만 이 마을에서는 그것이 특별히 수군거릴 만한 말밑천이 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 중에는 교도소 생활을 겪은 자가 한두 집 건너 하나쯤은 되었고, 종종 감방 동기나 형님 동생으로 인연이 맺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조만간 교도소 신세를 지게 될 것이 뻔히 보이는 자들이나 이미 수배가 내려진 이들도 있어서, 이 마을에서는 죄짓지 않은 무고한 어른을 찾아내는 일이 더욱 어려웠다. 이들은 주로 해가 기울면 집을 나섰다가 동틀 무렵의 귀갓길에 마주치곤 하는 사이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고된 산행길을 함께 하는 처지였지만 그렇다고 서로 등을 떠밀어주거나 격려의 인사를 나누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바퀴벌레를 잡아먹는 바퀴벌레처럼 서로 경멸하는 티를 감추지 않았을 뿐이다. 앞에 보이는 이웃의 뒤통수를 향해 깡패는 삐끼를, 삐끼는 날치기를, 날치기는 뽕쟁이를, 뽕쟁이는 기지촌 매춘부를, 매춘부는 카바레 남창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험담하고 저주하였다. 살기등등한 전과자들의 집합소인 이곳에서 큰 싸움이 잘 벌어지지 않는 이유는 누구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아마 적어도 이곳이라면 모든 죄인들이 긴장을 내려놓고 하룻밤 깊은 잠을 청할 수 있는 성역의 공간으로 여겨졌거나, 아니면 저마다 핵폭탄을 하나씩 떠안고 있는 것처럼 내일이 없는 말종들 사이에 일단 불씨가 붙으면 반드시 누군가는 죽어서 싸움이 끝날 것 같은 긴장감을 공유하며 생존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경도 아버지의 수감 경력을 알 리 없는 양복점의 손님들은 그를 살짝 얕잡아 보고 나이에 상관없이 초면에 반말을 하거나 잔심부름을 시키는 등 함부로 사람을 부렸다. 그래도 사내는 수완이 좋고 나긋나긋한 성격으로 항상 웃으면서 너스레를 잘 떨어 손님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양복점 사장도 그런 그를 대견히 여겨 몇 달 전부터는 정식으로 재단일을 가르치기로 허락하고 월급도 몇 만 원 더 얹어 주기로 하였다. 시내 어디를 가든 양복점에는 손님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어 호황이었고, 그중에 기지촌은 팁을 주는 멋쟁이 외국인 손님도 많았다. 거기에 평소 경도를 애처롭게 보던 양복점 사장은 애 맛있는 것 좀 사 먹이고 살 좀 찌우라면서 가끔 보너스를 쥐어주기도 했다. 매달 사채빚을 갚고도 이제 그의 손에 조금씩 남는 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 같았다면 몇 푼 되지도 않는 돈을 쥐고 벌써 노름판으로 달려갔을 위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재작년 아들의 국민학교 입학과 아내의 자살 기도를 계기로 큰 마음을 먹고 노름판에 발길을 끊었다. 양복점에 찾아가 시다일을 사정한 이후로는 두 번 다시 노름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아시안 게임 이후 컬러텔레비전을 구입하기로 결심하고 선급금을 마련하기 위해 여윳돈을 몇 달간 차곡차곡 저축해 온 것이다. 올림픽 중계만은 반드시 아들에게 컬러 화면으로 보여주겠다는 다짐이었다. 도난 신고를 한 피해자, 경도 아빠의 이러한 굳은 결심은 아래와 같은 그의 진술을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형사님은 자녀가⋯⋯? 아, 아직 결혼을 안 하셨나? 저는 아들내미가 하나 있습니다. 외동아들이지요. 이름이 경도라고요, 저를 닮아서 운동도 많이 좋아하고요, 뭐 정식으로 체육관은 못 보내고 있지만 혼자 산에서 복싱 연습하는 걸 보면 형사님 눈에도 아주 대견할 겁니다. 모두 저한테 배운 기술이지요, 예. 거기다가 애국심도 또 얼마나 투철한데요. 아무래도 다음번 올림픽까지는 힘들겠지만, 그다음 올림픽에는 자기도 한 번 나가보고 싶다고 하면서 학교 체육복에 태극기를 그려 넣기도 하고요.

아니 그런데 그런 애가 지난번 아시안 게임 때 레슬링 중계를 보다가 훌쩍훌쩍 울더라고요. 우리나라가 또 금메달을 따서 감격해서 그런가 보다 했더니 그런 게 아니고, 선수들이 한두 바퀴 구르고 나면 누가 우리나라 선수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아시잖아요, 이게 흑백으로 보면 빨간색이나 파란색이나 그게 그거라는 거. 거기에 체급도 같고, 머리도 다 빡빡 깎아서는……. 그러더니 복싱을 또 보다가 그냥 밖으로 나가 버리더라고요. 공장 다녀오던 제 애미가 전파상 앞에서 테레비를 보고 있던 애를 보고 집에 가자고 하니까 싫다고 손을 뿌리치더랍니다. 집에서 흑백 테레비 보다가 자기도 아빠처럼 사팔뜨기 되겠다면서⋯⋯. 애가 탔는지 그다음 날 마누라가 문방구에서 셀로판지를 몇십 원 치 사 와서 텔레비전에 발라주었습니다. 애가 그걸 보자마자 다 뜯어내서 구겨 버리더니 또 한참을 울더군요. 제가 얼마나 속이 상했을지 짐작이나 되십니까? 아, 아직 애가 없으시다니⋯⋯, 참.


하여간 제가 걔를 데리고 직접, 전파상도 아니고 대리점까지 찾아가서는, 이십사 개월 할부로 계약을 하고 구입한 테레비입니다. 이게 할부라 치면 제값보다 훨씬 더 내야 하는 거, 형사님도 잘 아시죠? 어쨌거나, 이제 근데 계약서를 써야 하는데, 형사님도 아시다시피 이 동네는 주소라는 게 없잖아요. 그래서 주소 쓰는 칸에다가 제가 일하는 양복점 주소를 써넣기는 했지요. 그래도 대리점 신 사장님이랑 저희 양복점 사장님이…… 거, 형사님도 잘 아시죠? 저 밑에서는 그래도 제일 유명하신 테일러 박 선생님. 아, 양복을 잘 안 입으시는구나. 하여간 그래도 언제 한 번 들러서 구경이라도 해보세요. 미군 장교들도 모두 저희 가게 단골입니다. 하여간 저희 테일러 박 사장님이 성품 훌륭하신 걸로도 또 유명하신 분인데, 그분이랑 대리점 신 사장님이 꽤 친하셔서 그냥 양복점 주소를 써넣고 계약을 해주셨거든요.


계약을 하고 나오면요, 이게 지로 용지가 한 뭉텅입니다. 이거 보십시오, 여기, 이게 다 지로 용지예요. 이건 안 가져갔더라고요, 이건 못 봤는지 니미랄 새끼가, 어휴, 죄송합니다. 못 들은 걸로 하십쇼. 형사님, 하여간 이 숫자 보이시죠? 삼 번부터 시작하죠? 아직 일 번, 이 번, 두 장 밖에 안 뜯었다는 거죠. 이게 뭘 말하는지 아시겠죠? 어이 참, 형사님이 말귀도 참. 그만큼, 텔레비전이 새 거라는 거 아닙니까. 두 달도 못 봤습니다, 두 달. 그나마도 테레비 아끼고 전기 아낀다고 하루에 몇 시간 켜지도 않았지요.

하여간 매달 말일에 월급 타면 날짜 넘기기 전에 한 장씩 뜯어서 은행 가서 돈 부치고 그 영수증을 스물 넉 장을 딱 모아야, 그제서야 그 테레비가 온전히 제 것이 된다고 했단 말입니다. 만약에요, 만약에, 몇 달씩 대금이 밀리면 대리점이든 본사든 누가 와서 테레비를 떼 갈 거라고 하대요. 근데 이거 이제 어쩝니까. 떼어 갈래도 테레비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 테레비는 제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영수증을 보세요, 두 장 밖에 없잖아요. 이게 스물두 장이 더 남았잖아요. 그럼 제 테레비가 아니라는 소린데, 아니 그 신 사장님이 이걸 제가 마저 내라고 하네요. 제가 그건 힘들겠다고 하니까, 그렇다면 테레비를 내놓으라고요. 근데 테레비가 없는데 내놓기는 뭘 내놔요? 안 그렇습니까, 형사님? 내놓을 게 있어야 내놓죠. 아니, 이거 안 내면, 예? 누가 와서 테레비 떼어 간다면서요. 그럼 떼어가라죠. 어디 떼어갈 수 있으면 떼어가 보라지요.

어허이, 형사님도 셈을 이상하게 하시네. 찬찬히 생각을 해보시면 잘 아실 텐데 그걸 참. 뭐 하여간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요. 그건 나중에라도 제가, 그 양반들 포카 치는 데를 아니까, 제가 알아서 하면 되고요.


그러니까 진짜 중요한 건 이겁니다, 형사님. 제가 딱 감이 오는 게 있단 말입니다. 뭐긴요? 범인 말이죠, 도둑놈! 형사님도 이 감이란 게 어떤 건지 잘 아시잖아요. 뭐 이런 걸 육감이라고 하지요? 어쨌든 저도 카드를 손에 좀 쥐어봐서 그런 거를 그래도 좀 알지요.

여하튼 그날 계약을 딱 하고, 제가 테레비 상자를 들고, 제 아들 경도가 제 키만 한 새 안테나를 공중에 붕붕 휘두르면서 딱 동네에 나타났단 말입니다. 어땠을 것 같습니까? 그 테레비 상자라는 게, 일단 그 상자부터가 그냥 보통 상자가 아니거든요. 저기 보시면 아직 버리지도 않았잖아요. 보세요, 상자부터가 컬러로 딱 되어 있어서, 빨주노초파남보, 이건 누가 봐도 컬러 테레비죠? 거기에 경도가 들고 있던 안테나는 신형 안테나인데, 오다가 못 보셨나? 동네 딱 들어서자마자 저는 그것부터 따악 보이던데. 번쩍번쩍 얼마나 멋지게 서 있습니까. 동네에 그런 안테나는 우리 집 것 하나 밖에는 없어요. 나중에 나가서 한 번 보세요, 진짜라니까요.

하여간 그걸 둘이 들고 동네에 척 나타나니까, 공터에 나와 있던 애새끼들이 벌써 딱 알아본 거예요. 흙놀이하던 걸 다 멈추고는, 우리한테 막 달려옵디다. 내 그럴 줄은 알고는 있었지요. 그래도 그 더러운 손으로 테레비 상자를 두들기는 새끼 몇 놈은 제가 발로 좀 떼밀긴 했습니다. 에이, 남의 집 새끼를 걷어찬 건 아니구요. 애들이 막 소란을 떠니까, 이제는 어른들도 하나둘씩 나와서는 구경을 하더라고요.

제가 그 무거운 걸 여기까지 들고 올라온다고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그래서 저기 평상에 좀 내려놓고 앉아서 쉬었지요. 뭐 몇 발만 더 가면 집이긴 했지만요, 애도 애대로 숨이 차고 그래서 좀 앉았다 들어가자 했지요. 동네 애들이란 애들은 아마 다 몰려나왔을 겁니다. 전부 다 우리 경도한테 들러붙어서는, 자기도 컬러 테레비 같이 보자고 조르더라구요. 저녁 다섯 시에 만화 보러 가도 되냐고 하더니, 경도가 집이 좁아서 안 된다고 하니까 지들끼리 알아서 순서를 정하기도 하고, 장난감을 빌려주겠다는 애들도 있고, 허허.

뭐 애들은 애들이니까 그렇다 치고, 동네 어른이라는 인간들은 어땠는지 아십니까? 어휴, 아주 그냥 벌레 씹은 표정을 해가지고는, 형사님도 그걸 보셨어야 하는데. 자기 애 머리 끄덩이를 잡아서 끌고 들어가는 인간도 있고, 괜히 바닥을 차서 흙먼지를 내는 놈도 있고. 아 그리고, 침을 찍찍 뱉어가면서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합디다. 누가 내 걱정해달랬나? 돈이 얼마 짜린데 노름해서 돈을 땄나 보네, 애 공부는 안 하고 테레비만 보겠네, 전기를 많이 먹어서 밤에 동네 전기 떨어지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하는 소리만 해대고. 아 그리고, 애도 뻔히 듣고 있는데, 뒤에 숨어 가지고는 사팔 눈깔도 보는 건 컬러로 보이나 보네 어쩌고 한 새끼는⋯⋯ 제가 지금이라도 알아내면 두 눈깔을 후벼 파 버릴 겁니다. 컬러건 흑백이건 아예 아무것도 못 보게 해 버려야지 나쁜 새끼⋯⋯. 어휴, 말이 그렇다는 거죠 형사님. 어쨌거나 경도가 막 신이 나 있다가 기분이 많이 상했는지 얼른 집에 들어가자고 먼저 일어나지 뭡니까. 예 그러니까요, 제 말씀은, 동네에 없던 컬러 테레비가 한 대 들어왔으면, 인지상정 이웃 간에 축하도 해주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냔 말입니다.


하여간 오늘 경도가 막 울며불며 제가 일하는 양복점으로 뛰어들어왔습니다. 그런 애가 아니거든요. 아빠 일하는 직장에는 막 찾아오고 그러는 거 아니다, 테일러 박 사장님께도 예의가 아니다 단단히 교육을 해놨단 말입니다. 근데 애가 문이 부서져라 열고 들어와서는 바닥에 쓰러지는 겁니다. 테일러 박 사장님도 그렇고 그 단골로 오시는 스티븐슨 상병이던가 아마? 하여간 두 분도 채촌을 하던 중에 얼마나 놀라시던지요. 그런데 애를 다그칠 새도 없이 한다는 말이, 학교를 다녀와보니 테레비가 사라지고 없다는 겁니다. 제가 거울을 닦다가 말고 마른걸레를 집어던지고는요, 뒤에 애가 따라오거나 말거나 정말 한달음에 산에 뛰어올랐습니다. 지금에야 마음을 좀 안정을 시키고 보니까, 저 보십쇼, 뛰다가 구두 뒷굽이 떨어져 나간 것도 몰랐지 뭡니까.

그렇게 집 앞에 딱 도착을 했는데 숨이 어찌나 차던지, 심장은 또 어찌나 뛰던지 이 가슴을 찢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니까요 정말. 그래서 어지러워서 문을 못 열고 문고리만 잡고 안 쓰러지려고 몸을 버티고 있었지요. 한참 지나니까 숨도 좀 잡히고, 이 눈앞이 뿌옇던 것이 조금씩 돌아오면서, 저기 문에 점 세 개가 요렇게 콕콕콕 찍혀있는 게 보이더란 말입니다. 자물쇠를 딴 게 아니었어요! 자물쇠 걸쇠를 아예 뽑아버려 가지고 그 자리에 못 구멍 세 개만 휑하니 뚫려있지 뭡니까!

자물통만 큰 걸로 바꾸고는 싸구려 걸쇠에 걸어두는 바보짓을 했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다섯 살짜리도 마음만 먹으면 뜯어낼 수 있을 물건이기는 했거든요.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문이 이런 널판때기 문인데요. 맘만 먹으면 아예 문을 떼어버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부엌으로 들어오니까, 애가 열어둔 건지⋯⋯ 예, 부엌이요? 여기가 부엌이지요, 그럼. 물 쓰고 불 쓰는 곳이면 부엌 아니겠습니까? 여하튼 애가 열어둔 건지 도둑이 닫지 않고 간 건지 방문이 훤하게 열려 있었죠. 신발을 벗을 새도 없이 무릎으로 기어서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보세요, 이것뿐입니다. 이 안테나 줄, 지붕에서 벽을 타고 내려와서 이 창틀에 뚫어둔 구멍으로 이어놓은 안테나 줄, 이것밖에 없는 겁니다. 이게 무슨 소용입니까. 이거 개도둑 지나간 자리에 쓸모 없어진 개목줄 같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볼 때는, 그날 거기 있던 놈들 중에 한 놈입니다. 배알이 꼴린 거죠. 제가 그 테일러 박 사장님 밑으로 들어가서 후계자가 된다고 했을 때부터 하여간 배가 아파서 어찌나 뒷얘기들이 오고 갔는지 아십니까? 아, 그렇죠, 뭐 꼭 박 사장님이 후계자다 아니다 지목을 하시고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요. 그래도 그 훌륭한 박 사장님 실력을 누군가는 넘겨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어쨌거나 그렇게 배알이 꼴릴 대로 꼴린 놈이라도 이제 제 눈에 우리집 컬러 테레비가 안 보이면 그만이었겠지요. 그런데 어디 그랬겠습니까? 공터에 딱 나가 보십쇼. 그 녹슬고 구부러진 안테나들 사이에 저희 집 안테나가 번쩍번쩍하니 딱 보인단 말입니다. 안 보일 수가 없어요. 그걸 볼 때마다 저희 컬러 테레비가 얼마나 눈앞에 맴돌아쳤겠습니까. 집으로 돌아가서 제 흑백 테레비를 켤 때마다 얼마나 부아가 치밀었겠느냐 말입니다.

이제 형사님도 아시겠죠? 어느 미친놈이 테레비 하나 훔치겠다고 이 산중에 올라오겠습니까. 밑에도 쌔고 쌘 게 칼라 테레빈데요. 그걸 들고 산을 내려가기는 또 얼마나 어렵구요. 그러니까 범인은 이 개 같은 동네 놈들 가운데 하나가 분명한데요. 그날, 그러니까 제가 테레비를 들고 들어오던 그날, 밖에 나와서 저희를 도끼눈으로 보던 놈을 제가 서넛 정도 찍어드리겠습니다. 그 놈들 가운데, 최근에 공터를 자주 배회하면서, 저희 집 안테나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던 놈을 찾아내시면 되는 겁니다. 물론 제가 한 놈 한 놈 잡아서 조지면 또 금방 나오겠지만, 아무래도 형사님이 딱 나서시면 금방 쉽게 일이 풀리지 않겠습니까?”



며칠 후 창기는 정성스럽게 작성한 보고서를 반장에게 제출했다. 처음 작성해 본 창기의 수사 보고서는 두서없이 어지럽게 정리가 되어 있어, 반장은 두 번이나 빨간 색연필로 교정을 봐주었는데, 거기에 들어가 있는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미군 기지 뒷산의 마을에서 벌어진 컬러텔레비전 도난 사건은 범죄 현장에서 증거라고 할 만한 것이 마땅히 발견되지 않았고 목격자도 전혀 없어 용의자를 특정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한다. 고작 텔레비전 하나로 감식반을 요청해 이 산골짜기로 불러 올린다는 건 신입 형사로서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경도 아빠의 말대로 텔레비전을 짊어지고 순식간에 산길을 달릴 수 있는 체격과 나이에 드는 자들로 용의선상을 좁혀 이웃사람들을 탐문해 보았지만, 심증이든 물증이든 걸려드는 사람도 하나 없고 수상한 다른 이웃을 지목하는 제보자도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이곳에는 직업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가지고 정해진 시간에 직장에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도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었으며, 그래서 모두가 용의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날 그 집 아들이, 도둑맞은 텔레비전이 발견되었다며 경찰서를 찾아오면서 사건은 급진전되었다. 밤사이 누군가 아무도 모르게 마을 위쪽 도랑물 속에 처박아 놓았더라는 것이다. 창기의 추리에 따르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산 아래로 컬러텔레비전을 반출하기에도 어려움이 있고, 그렇다고 자기 집에 놓아두고 보기에는 형사까지 등장해 위험이 따르자, 야음을 틈타 증거물을 감추어 놓으려다 그만 도랑에 빠트리고 그 자리에서 도주한 것 같았다. 사실 현장을 방문한 창기는, 잘난 척 이 마을에 컬러텔레비전을 들여온 죄로 보란 듯 처형식을 거행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보고서에는 그런 말을 조금도 끼워 넣지 않았다.

증거물이 될 텔레비전은 현장에 남아있지 않았다. 경도 아빠가 담당 수사관의 허락도 없이 증거물을 이미 회수하였기 때문이다. 경도의 증언에 따르면 아빠가 그것은 건져 올려서 물을 털어낸 후 집으로 가져와 전원을 다시 꽂았는데, 지잉지잉 소리를 잠시 낸 후 시커먼 연기가 새어 나오나 싶더니 불꽃을 몇 번 튀기고는 이내 솟구치는 불길에 휩싸여 녹아내렸다고 한다. 경도 아빠는 그 불을 끄느라 아끼던 솜이불까지 한 채 태워먹어야 했다. 그는 겨우 불길을 잡아 대형참사를 면한 후에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공터 한가운데 서서 온 마을에 메아리가 칠 정도의 큰 목소리로 이 개새끼들아 개새끼들아 하고 한참을 울부짖으며 몸을 떨었고, 그런 그를 어린 아들이 의젓하게 나서서 그까짓 테레비 없어도 된다며 아빠를 겨우 진정시켰다고 한다. 여기까지 보고서를 마무리한 창기는 이제 두 번 다시 그 마을에 올라가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창기의 보고서에 적힌 이 마지막 부분은 사실과는 조금 달랐다. 어린 경도는 이 사건을 조금도 의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그 뒤로도 며칠을 쉬지 않고 울어서 두 눈이 퉁퉁 부어오른 채 툭하면 길에서 넘어지며 밖을 돌아다녔다. 아이들이 경도의 집 앞에 몰려들어 지붕의 신형 안테나를 향해 돌을 던지면서 이 집은 안테나집이래요 하고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놀려 대었기 때문에 더욱 집에 들어오기가 싫었다. 경도는 아버지한테 저깟 아무짝에 쓸모도 없는 안테나를 얼른 떼어 버리자고 졸랐지만, 경도 아빠는 형사님이 반드시 범인을 잡고 텔레비전을 되찾아 올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며 아들을 달랬다.

이 사건은 어린 경도의 장래 희망마저 조금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게 되었다. 동네 놀림거리가 된 아들을 위로하기 위해 아버지가 쥐어 준 몇 푼 용돈으로, 경도는 학교 뒷골목의 분식집에서 혼자 떡볶이를 사 먹으며 기분을 달래고 있었다. 경도가 치른 가격이 어느덧 백 원을 넘기자 분식집 주인은 자신의 도장이 찍힌 종이 조각에 손수 날짜를 적어 경도에게 건네주었다. 경도는 그것으로 비디오가 상영되는 분식집 뒷방에 난생처음으로 입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조심스레 널빤지 문을 열고 앞을 가로막는 검은 커튼마저 젖히자 컴컴한 방 안에 바글바글 모여 앉은 십여 명의 또래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이 마주한 안쪽 벽에는 사각으로 뚫어 놓은 창문처럼 컬러텔레비전 한 대가 놓여있었다. 예전에 몇 번 교회에 가 본 적이 있는 경도는 그곳에서 느꼈던 황홀한 현기증이 떠올라 다시 한번 오금이 마려워 왔다. 성물에서 번쩍번쩍 쏘아대는 총천연색의 빛 때문에 신전 속에서 혼이 빠져나간 어린 신도들의 깡마른 얼굴이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 경도는 벽을 더듬어 들어가 겨우 한 자리를 끼어 앉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성룡이 나오는 영화 폴리스 스토리에 완전히 넋을 잃고 빠져들었다.

잠시 후 분식집 밖으로 아이들이 몰려나왔을 때 경도의 장래희망은 조금 다른 것이 되어 있었다. 이제 복싱은 그만두고 쿵후를 연마해서 반드시 훌륭한 경찰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경도는 당장 헌책방으로 달려가 종종 훔쳐 읽곤 했던 쿵후 교본을 정식으로 구입했다. 동물의 동작에서 따온 몇 가지 권법을 구분동작으로 그려진 그림으로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책이었다. 경도는 이제 밖으로 나가지 않고 매일 집안에서 쿵후를 연마를 하기 시작했다. 경도의 아버지는 쿵후는 올림픽 종목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렸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경도는 이제 올림픽 같은 데는 나가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선언함으로써 아버지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슬픔에 잠긴 경도의 아버지는 장례를 지내듯 탄내 나는 텔레비전을 며칠 동안 방에 놓아두었다. 그러다 참다못한 아내가 이 년 전처럼 발작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이번에는 정말로 자살에 성공해서 이 꼴을 안 보고 말겠다고 발버둥 칠 때가 되어서야 겨우 정신이 차리고 녹아 붙은 텔레비전을 산비탈 숲속으로 던져 굴렸다.

그는 그 길로 텔레비전을 구입했던 대리점을 찾아가 신 사장의 응접 테이블 위에 할부금 지로 용지를 올려놓았다. 소파에 앉은 신 사장은 딱한 사정은 이미 전해 들어서 잘 알겠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위로했다. 그는 그 말을 들은 체 만 체하고 남은 이십 이 개월 어치의 할부금을 자기는 결코 낼 수 없다고 선언하고 지로 용지 위에 침을 뱉은 후 대리점을 나섰다. 그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양복점에서 시다 일을 하였고, 때때로 경찰서에 들러 창기에게 인사를 하고 범인은 좀 가려졌는지 물은 후 매번 소득 없이 빈손으로 돌아 나오곤 했다.


한 달가량 지난 후, 창기는 자신의 경력에서 처음 단독으로 범인을 검거해 경찰서로 끌고 오는 성과를 이루었다. 무려 살인미수 강력범이었다. 강력반의 선배들 모두가 신삥 딱지를 뗀 것을 축하한다며 크게 한 턱 쏠 것을 부추겼지만 그는 그다지 즐거운 기색이 아니었다. 창기가 손목에 첫 수갑을 채운 범인이 경도의 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창기가 쓴 두 번째 사건 보고서에 적힌 사정은 이러했다.

경도의 아버지는 월급날이 며칠 지나도 양복점 박 사장의 입에서 돈 이야기가 나올 낌새가 전혀 없자, 용기를 내어 먼저 말을 꺼내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테일러 박 사장은 마네킹의 목에 걸어놓은 줄자를 풀더니 채찍처럼 길게 늘어뜨렸다. 그리고 그것으로 요점이 하나씩 정리될 때마다 경도 아버지의 볼을 찰싹 때려가며 월급이 끊긴 연유를 알아듣기 좋게 설명해 주었다. 첫째, 월급 인상분은 취소되었으며, 찰싹, 둘째, 앞으로 월급은 컬러텔레비전 할부금이 다 될 때까지 대리점 신 사장한테 그대로 넘어갈 것이고, 찰싹, 셋째, 돈이 급하면 가불을 해줄 수는 있지만, 찰싹, 넷째 그렇더라도 선이자를 떼고 주는 게 맞을 것 같다, 찰싹, 마지막으로 지금 당장 대리점 신 사장을 찾아가서 무릎 꿇고 사죄부터 하고 와라, 찰싹, 하는 내용이었다. 테일러 박 사장의 말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경도의 아버지는 갑자기 바닥에 고무공이 튕기듯 제자리에서 깡총깡총 뛰기 시작했다. 그의 두 눈에서는 곧은 눈물이 흘러나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테일러 박 사장이 다시 줄자를 휘두르려 할 때, 그는 재빨리 허리를 숙이며 박 사장의 옆구리에 라이트 훅을 한 방 꽂아 넣었다. 그리고 고통에 빠진 박 사장이 채 몸을 숙이기도 전에 그의 얼굴을 향해 잽과 원투 펀치, 어퍼컷을 섞어 몇 차례 더 주먹을 날렸다. 너무도 빠른 움직임이라 때린 사람도 맞은 사람도 정확히 몇 번의 펀치가 적중했는지 알 수 없었다. 박 사장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어 옆에 서 있던 마네킹과 함께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스티븐슨 상병과 저스틴 병장의 증언에 따르면 육체와 영혼이 함께 쓰러지는 것 같은 장면이었다고 했다. 주문한 연미복을 찾으려고 양복점에 들른 두 미군은 쓰러진 박 사장의 목에 줄자를 감으려 드는 경도 아버지에게 달려들어 그의 팔다리를 힘으로 제압하고 바닥에 깔아뭉갰다. 두 미군의 큰 덩치에 깔린 채 옴짝달싹 못 하고 덫에 걸린 짐승처럼 울부짖던 그는 “플리즈 콜 더 폴리스, 우드 유 라이크 투 콜 더 폴리스, 써!”를 외치며 김창기 경사의 직통 전화번호를 반복했다. 몇 마디 영어를 할 줄 알았던 창기가 미군들의 신고 내용을 파악하고 서둘러 양복점으로 달려왔을 때, 그는 정확히 누가 누구를 때린 사건인지 알 수가 없어 어느 손목에 수갑을 채워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바닥에 앉아있는 저스틴 병장의 엉덩이 밑으로 잔뜩 구겨져 있는 사람의 얼굴이 보였으나 그것이 경도의 아버지임을 알아보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는, 형사님 여기 미군놈들이 대한민국 사람을 죽이려 합니다 살려주세요 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스티븐슨과 저스틴은 혼신의 손짓 발짓과 할리우드 액션을 동원해 자신들이 목격한 것을 그 자리에서 증언하였다. 몇 차례 폭력 전과가 있는 살인미수범의 제압과 신속한 신고 등 범인 검거에 혁혁한 기여를 한 공로를 인정받아, 나중에 이들의 이름이 적힌 표창장이 경찰서장으로부터 미군 부대 측으로 전달되는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행사에 참석한 두 미군과 김창기가 입고 나온 정복은, 테일러 박 사장이 성치 못한 몸으로도 최선을 다해 만들어 준 최고급 원단의 맞춤옷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