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무능한 지구는,
올해도 또 한 번 멸망에 실패한다.
북반구의 어느 도시 어느 동네 어느 골목에는
징벌 같은 냉골의 밤이 찾아오고,
작년에도 지구를 탈출하는 데 실패했던 저 남자
이제 완연한 중년의 몸을 끌고 다시 나타나
빙글빙글 원심력을 모으며
지구의 바깥으로 투신을 시도한다.
남자의 쉰내 나는 입 밖으로,
차마 삭히지 못한 소화불량의 웅변들이
고스란히 역류되어 지표로 쏟아진다.
이보시오, 이 별에,
장기 무임승차 중이신 지구인들이여.
시속 일천삼백 킬로미터의 몸부림에도
서로의 피부와 체모를 그러쥐어
저 무한의 우주 밖으로 튕겨 나가떨어지지 않고
올해도 행성의 가을을 보는 데 성공한
중늙은이 우주인들은 들으시오.
우리, 이 나이 먹도록 태양계를 뺑뺑이 돌면서
이제는 자연스럽게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사랑을 하는 것도 행성 운동의 일부라
고통스레 반복되는 접선과 고별의 타원 궤도,
채우고 또 비워지면 다시 채워야 하는
섭식과 분해의 대사라는 것을.
시민 여러분, 저는 괜찮습니다.
이것은 지구의 어지럼증 고문이 아니라
제 선량한 양심의 고백입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사랑은 오래된 공상의 과학,
저 별들을 올려다보며 생긴 결정적인 오해였다는 것을
저는 이제 털어놓고 가려 합니다.
우리 마주 앉아 주고받은 낱장의 말과 말들이 엮여
제목도 없는 단행본 연애 소설 한 권 떡제본 붙듯이
맨다리 위에 맨다리 놓아 씨와 날로 얽어가다 보면
우리 아주 아주 늙은 어느 날,
모든 다툼이 끝나 버린 어느 부전不戰의 가을밤이나
독한 마음 다 씻겨 나간 중성中性의 겨울밤에,
시린 샅 밑에 끼워 넣고 돌아 누울
체취 진한 이불 한 채 누비는 일이라는 것을,
이 정도 가을바람 맞아 딱딱해진 머리라면
이제 우리
조금이라도 알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열사병 상사병 앓던 지구는 아무 대답도 없이
태양의 뒤편에 기대어 차가운 숨을 고른다.
숙취의 지구가 잠들지도 않고 또 일어나
비틀비틀 공회전의 시동을 걸기 전에,
남자는, 이 무정한 지구를
오늘밤 죽어도 탈출하리라 결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