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AFKN에서는

by 후안

80년대의 차가운 소낙비가

소년의 머리 위로 쏟아질 때

이국적인 이 가도의 포장 위에는

버림받은 비니루 한 장이 없습니다.


미군이 쌓아올린 쎄멘 보로꼬 장벽에

기관총 탄흔처럼 물자국이 찍히고

철조망에 칭칭 몸이 휘어 감겨

탈영에 실패한 장미 덩굴 한 중대가

할리우드 액션으로 발작하는 그 아래로,

소년은 흘부들한 천 가방을 끌어안아

몇 권의 공책을 수난水難에서 구조하려 듭니다.


그때, 소년은 혼자가 아닙니다.

대통령이 될 거라는 사람들의 얼굴이

미군의 담벼락에 납작 붙어 나란히 섰으니까요.

풀물 녹아 오그라드는 듬직한 미소들 옆으로

소년은 수직의 벽에 꼿꼿이 등을 붙이고

제9의 후보로 저기에 섰습니다.


어젯밤도 소년은 이곳을 향해

채널2의 조난신호를 띄웠습니다.

앙상한 VHF 안테나를 한 손으로 쥐고

다른 한 손을 허공으로 높이 뻗은 채

난시청을 돌파하는 인간 안테나가 되어,


나를 데려가 줘요 거기로

아세니오 홀이 주먹을 흔드는 곳

마키 마크가 춤추는 바로 거기로

플로리다로 하이얼리어로 오렌지빛 그 도시로

집 떠난 쿠바인들이 춤추고 말하고 노래하는

그곳 그 땅으로

햄버거로 기름기 통통 올린 몸뚱이에

콜라에 절여 독기 싹 뺀 마음을 넣어주세요

그래 주시기만 한다면

미군이든 소련군이든 저는 상관없겠어요

이곳이 그립지 않은 그곳에

그 꿈을 꾸게 하신 분

이 꿈에서 깨워주실 님이라면

저는 그저 좋겠어요.


담벼락은 고허古墟의 유적처럼

아무런 대답을 들려주지도 않고

고고히 초단파 신호만을 흘려보냅니다.

소년은 나지막한 소금 기둥처럼

천천히 비에 녹아 하류로 흘러갑니다.


물 젖은 최루가루와 장미들의 아찔한 향내 속에

인체가 머물렀던 총살형의 마른 자국을 남기고,

소년은 이제 그 어디에도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