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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가 유럽입니까?

경계에 선 나라 아제르바이잔에서 묻다

by 후안

“아제르바이잔이 유럽인가요?”

독일에서 온 한 할머니가 던진 이 한마디의 질문이 투어버스를 삽시간에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다. 가이드 후세인이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벌떡 일어나 뒤돌아섰다.

‘올 것이 왔구나!’ 나는 잠이 확 달아났다.

이제 버스는 궤도를 이탈하여 내가 줄곧 궁금해했던 비밀의 행간을 덜컹이며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그것은 여행 배낭을 챙기던 아내와 내가 해답도 없이 주거니 받거니 한 질문이기도 했다.

“우리가 지금 유럽으로 가는 건가?”

그리고 그 답을 얻기 위해 필요 이상 많은 양의 웹문서를 탐독했지만, 여전히 확실한 대답을 구하지 못하고 알쏭달쏭한 상태로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그뿐인가. 여행을 다녀온 후 지인과 여행 후일담을 나누던 중에, 이 물음은 고스란히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에게 반복 질의되기도 했다.

“아제르바이잔을 갔어요? 거기가 어디에 있더라?”

“캅카스 산맥 아래?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유럽의 가장 동쪽 끝⋯⋯

“아제르바이잔이 유럽이에요?”


거의 반나절 가량 열정적으로 투어를 진행해 준, 넘치는 친절함과 프라이드로 무장한 가이드에게, 그 독일의 교양미 넘치는 여인이 승강이를 한 번 걸어보겠다는 심산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정말로 알 수 없다는 듯 아리송해하는 그 표정은 “쇠로 만든 배가 왜 물에 가라앉지 않나요?”하고 물어보는 천진난만한 아이의 것이었다.

자, 유러피언임을 자처하는 ‘후세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아파 무슬림이자, 직업적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열혈 가이드이며 애국심마저 투철한 이 아제르바이잔 청년은, 이제 이 나이 든 독일의 아이에게 부력의 원리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떠맡게 된 것이다.


발단은, 잠시도 쉬지 않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설명하고 있던 후세인의 눈에 들어온 한 건물 때문이었다. 가로 길이 70m에 이르는 초대형 국기가 펄럭이고 있던 깃발 광장,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던 크리스털 홀 경기장이 빌미를 제공했다.


“깃발 뒤로 보이는 납작한 건물은 크리스털 홀입니다. 2012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가 열린 장소예요. 대회를 위해서 단 7개월 만에 지어야 했지요.”

그러자, 누군가 먼저 나지막이 말했다.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가 왜 여기서 열렸지?”

그리고는 그 독일의 여인이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그러게. 아제르바이잔이 유럽인가요?”

굳이 영어로 말한 걸로 보아 그저 혼잣말은 아닌 방백쯤에 가까웠으나, 그 총알은 후세인에게 오발되어 맹렬하게 날아들었다.


후세인은 양팔을 벌려 버스 양쪽의 선반을 잡고 단단히 버티어 섰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를 응원했다. 말해, 말하라고. 그러면 어디까지가 유럽이냐고 따지고 들란 말이야. 국토의 97%가 아시아 땅인 터키는 그럼 왜 UEFA 유로피언 챔피언십 대회에 가서 공을 차고 있느냐고 되물어. 아시아 땅이 분명한 이스라엘은 또 어떻고. 서아시아 키프로스는 어쩌다가 유로화를 갖다 쓰고 있는지 물어봐. 왜 우리는 유러피언이면 안 되냐고 반박하란 말이야.


하지만 미니버스라는 국지적인 장소에서 화끈하게 한 판 벌어지는 국제적인 논쟁을 예견한 나의 기대와는 달리, 후세인은 온화한 표정으로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을 해나갔는데, 내가 공상했던 대답과는 거리가 먼 미적지근한 대응에 그쳤다.

“독일에서 오셨다고 했죠? 2011년에 독일에서 열린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아제르바이잔 가수가 우승을 했지요. 엘과 니키. 전통에 따라 다음 개최지는 우승자의 국가가 되기 때문에, 이 곳 바쿠에서 개최를 하게 된 거예요.”


그러고 나서 특유의 커다란 웃음을 벙글벙글 지으며 솔직한 심정을 덧붙였다.

“인종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조금 차이는 있어 보이지만, 유럽 모든 국가들의 인종과 종교가 같지는 않아요. 우리는 유럽에 속하기를 원하고 또 거기서 공헌하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바쿠의 시내 번화가인 니자미 거리를 걸으며 바라본 도심의 모습은 유럽의 다른 대도시들과 (그리고 서울과도) 모양새가 크게 다르지 않다. 고쳐 말하면, 오늘날 자본으로 새롭게 리모델링되고 있는 도시들, 세계 어디든 획일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복제 도시들 가운데 하나로 보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누군가 당신의 눈을 가린 채 지구를 몇 바퀴 돌아 이곳에 떨궈놓는다 해도, (주머니에 마스터카드 한 장만 있다면) 어느 길에서든 맥도날드가 당신의 허기를 달래줄 것이며, 친절한 스타벅스가 충분한 카페인을 제공하고, 거대한 ZARA 매장이 채 옷을 챙겨 오지 못한 당신에게 계절에 맞는 외투를 입혀줄 것이다. (그렇다. 바쿠의 기온을 잘못 예측한 나는 헐레벌떡 이 스페인 의류매장으로 달려들어가 긴팔 셔츠를 벗어던지고 new arrival 한 메이드 인 방글라데시 반팔 셔츠를 사 입었다.)


눈가리개를 푼 당신이, ‘이 곳은 적어도 유럽은 아니군.’하고 생각한다면 그 단서는 거리를 가득 메운 페르시아 계통 후손들의 생김새 때문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최신 팝이 흘러나오는 거리를 활보하고, 밤이 되면 클럽 앞에 줄을 서는 패셔너블한 이 젊은이들을 만나게 된다면, 그마저도 미심쩍어질 수 있다. 그 어디서도 시간에 맞춰 양탄자를 펼치고 절을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없으니 이들의 감춰진 종교마저도 힌트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천 년 넘게 실크로드의 경계에 버티고 서서 그리스, 페르시아, 튀르크, 러시아가 넘나든, 그리고 이제 시장경제라는 초국가적인 정신이 날아들어 뿌리내린 이 나라를, 어떻게 유럽이라고 또는 아니라고 속단할 수가 있을까.



나는 친절한 후세인의 대답에 한마디 말을 보태주었다.

“우리는 아시안컵 축구 대회에서 오세아니아 호주와 시합을 해요. 아마 한국에서 호주가 여기보다 멀리 있을걸요? 어느 나라가 어디에 속하는지는 복잡한 문제이긴 하지만,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게 중요하죠.”

서로에게 이국의 언어인 (거기에 유창하지도 못한) 영어에 실린 응원을 뜻을 이해했을까. 후세인이 활짝 웃으며 커다란 주먹을 내밀어 피스트 범프를 청해 왔다.


한편으로는 유럽을 그리워하는 아제르바이잔인의 마음이 공감이 가면서도 동시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던 것은, 소위 유럽병이라고도 할 만한 탈아입구(脱亜入欧)적 사고와, “Do you know?”로 시작하는 낯간지러운 내셔널리즘의 사회 안에 내가 살아가는 집이 있기 때문이었다.

TV를 켜면, 한국을 처음 여행하는 외국인들의 감탄 어린 표정을 클로즈업하는 예능 프로그램의 사이에, ‘유럽 감성, 유럽형 프리미엄 제품’임을 자화자찬하는 광고가 쏟아져 나오는 곳이며, 금발벽안의 외국인에게는 열심히 공부한 영어 한마디를 써먹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면서도 지하철 안에서 마주친 동남아인의 옆자리는 멀찍이 피해 앉는 이 국가공동체의 여권을 소지한 자이기 때문에 말이다.


물론, 나는 유럽을 좋아한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유럽은 ‘정신적 공동체’로서의 유럽이다. 이것은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체 내의 관계를, 동화보다는 문화적 다양성을, 부의 축적보다 삶의 질을, 무제한적 발전보다 환경 보존을 염두에 둔 지속 가능한 개발을, 무자비한 노력보다 온전함을 느낄 수 있는 '심오한 놀이'(완전한 몰입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닫고 희열을 느낄 수 있는 활동)를, 재산권보다 보편적 인권과 자연의 권리를, 일방적 무력 행사보다 다원적 협력을 강조”하는 정신을 <유러피언 드림>이라 정의한 제러미 러프킨의 뜻과도 일맥상통한다.


“아제르바이잔이 유럽인가요?”

이 질문을 던지고 싶다면 우선 유럽이 무엇인지부터 정의를 내려야 한다. 그러고 나서, (이해타산적 논리로 몇몇 민족국가들이 뒤흔들고 있는) 그 가치를 이들이 공감하고 그 가치에 맞게 행동하고 있는지를 짚어야 옳다. 그마저 어렵다면 우리는, 정치적, 문화적, 지정학적, 언어적, 인종적, 경제적인 어느 한 부분에 한해서만 잠깐의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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