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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앓느니 쓰지 Aug 11. 2018

미야베미유키라는 확률 높은 복권을 긁으러 가자

No.4 <흑백>

넓은 세상에는 온갖 불행이 있다. 갖가지 종류의 죄와 벌이 있다.
각각의 속죄가 있다. 어둠을 껴안고 있는 사람은 오치카 혼자가 아님을,
뻔한 설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체험담을 들려줌으써,
오치카가 뼈져리게 깨닫도록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미야베 미유키를 애정합니다. 그녀가 쓰는 추리소설들을. <화차>는 내 인생의 책 목록에 언제나 의심의 여지 없이 올라가 있고 <모방범> 이나 <이름없는 독> 같은 소위 미미여사 특유의 '사회파 미스테리'를 나는 늘 애정해 왔습니다. 그녀를 좋아했기에 그녀의 사부격에 해당되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책들도 재미있게 읽었고(모래그릇을 추천합니다) 우리나라에는 미미여사보다 팬층이 두꺼운 (데이터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느껴지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들은 뭔가 알 수 없는 반감 같은게 생깁니다. 웬지 젝스키스 팬이 바라보는 HOT 같은 거랄까. 그래도 종종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들을 읽기는 하지만 언제나 추리소설에 대한 내 바로미터는 미야베 미유키 였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그녀의 책들을 좋아합니다.


그녀의 책들을 좋아함에도 그녀가 낸 모든 책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내 기준에서 미미여사의 책은 크게 두 종류였습니다. 위에서 설명한 사회파 미스테리가 그 하나이고 또 한 분류는 똑같이 일본의 근현대를 기본 바탕으로 하지만 그 주요 소재가 '예지력' '주인공이 어떤 매개체를 따라 다른 차원의 세계로 넘어가 버리는 이야기들' '염력' '초능력' 등 소위 판타지 장르에 속하는 책들입니다. 제가 읽었던 책들 중에는 <낙원>, <사라진 왕국의 성> 같은 책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안타깝게도 전자에 비해 후자의 책들은 조금 실망한 경험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두 장르 모두 일본 근현대사의 다양한 사회 군상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결말에 문 해결 방식이 비현실을 토대로 할 때 마다 뭔가 맥이 빠지는 면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한 동안 미미여사의 책들을 제 위시리스트에서 멀리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미야베미유키는 언제나 제게 확률 높은 복권과도 같은 작가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미미를 좋아하는 지인의 추천으로 <흑백>을 열게 되었습니다. <흑백>은 제가 분류한 미미여사 소설의 두 축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류의 소설입니다. 이 책은 '국내 미미여사 전문 출판사'인 북스피어의 분류에 따르면 "미야베 월드 제2막"에 해당하는 책입니다. 어려서부터 시대물을 좋아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늘 '시대물을 쓰고 싶어' 하는 미미여사의 욕망을 실현시킨 시리즈 물입니다. 참고로 다작의 아이콘인 미미여사가 현대 일본 추리물을 쓰다가 잘 풀리지 않을 때 머리를 식힐 요량으로 쓴 시리즈가 바로 '에도 시대 시리즈'라고 합니다. 책쓰기의 피로를 책쓰기로 푸는 사람이라니. 60년생인 그녀의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존경심을 갖게되는 한 편 무섭기도 합니다.


책 <흑백>은 '미시마야 변조괴담1' 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미시마야라는 주머니 상점 주인은 어느날 가게 한 귀퉁이 방에 바둑을 두는 방을 만듭니다. 원래 처음에는 그 방이 순수하게 바둑을 두는 공간(의 의미로 이 책의 한국어판을 '흑백'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이었는데 몇 가지 사건과 함께 이 공간은 에도지방 각지의 사람들의 괴담이 교환되는 장소로 변하게 됩니다. 괴담 즉 귀신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눠지면서 어떤 한 인물이 소위 말하는 영매가 되어 귀신들의 한을 풀어준다는 기본 포맷 속에서 역시나 미미여사가 가장 잘 하는 주특기가 발휘됩니다. 사회파 미스테리나 판타지물에서 주로 적용했던 방식들. 가해자, 피해자 그리고 주변인들의 삶의 굴곡 하나하나를 매만지면서 어떤 사회적 교훈이나 쾌감보다는 인물들에 대한 연민, 따듯한 위로가 전해지는 시대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미여사의 팬들은 "또?" 라는 의문과 "또!" 라는 만족의 다양한 반응이 나올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또? 와 또! 의 회색지대에 서 있습니다. 판타지보다는 좋지만 미스테리에 비하면 아쉬운 것이 이 책에 대한 제 총평입니다. 확률 높은 복권을 긁었는데 한 3등 정도 나왔달까. 그래도 지인으로부터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 4권을 빌려 왔는데 다음 책 <안주>를 무시하고 지나칠 정도의 실망감은 아닌 듯 싶습니다. 한번 더 복권을 긁어볼 용기가 생기는. 미미 제 최애 작가 중 하나임은 변함이 없습니다. 특히나 한 치도 물러설 생각 없는 더위가 기승하는 요즘 불면증의 밤을 함께 보내 줄 좋은 친구로서 미미소설이 제격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녀의 '괴담'이라면 두 말 할 것 없겠지요. 특히나 우리 집처럼 에어컨이 없는 집이라면요. 더울 땐 미미. 이해가 안 되면 외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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