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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앓느니 쓰지 Sep 02. 2018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남미의 신비함에 대하여

No.11 <백년의 고독>_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그녀에게는, 비록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이었다 할지라도 부엔디아 가문 남자의 마음속에는 신비한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 가문의 역사는 끝없이 반복되는 하나의 톱니바퀴이며, 그 축이 서서히, 고칠 수 없을 정도로 마모되지 않는다면 영원히 계속해서 회전하는 하나의 바퀴라는 사실을 한 세기에 걸친 카드 점과 경험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었다.



남미는 특유의 신비로움이 있다. 그것이 뭘까 계속해서 생각해봤는데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말로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정말 다녀 온 사람만 느낄 수 있는 그런 어떤 신비함. 그 미스테리함이 낯섬에서 오는 어색함인지 야생에서 오는 불편함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마추픽추에 사는 알파카로부터 느껴지는 것이기도 하고, 펑퍼짐한 전통 치마와 높은 모자를 쓰고 힘들게 오르막을 오르는 케추아족 원주민 아주머니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이기도 하고, 세상 모든 것들이 다 하얘서 아름답다 못해 무서웠던 우유니 사막에서 느껴지는 것인데 그것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려고 할 때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스스로의 무능함을 한없이 깨닫게 하는 그런 것이었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렀을 때 너는 내게 와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시와는 정 반대로 "내가 그의 이름을 규정하려고 하면 웬지 그 본래의 의미가 깨져버리는" 유약한 얇은 유리 같은 도도함. 신비, 마법, 환상. 정확한 말이 없으니 무엇이라 부르든 상관없는... '미지 혹은 환상'이라는 말로 그나마 유사하게 남미의 매력을 말해볼 수 있을까?


마추픽추의 알파카로부터
케츄아 원주민의 뒷모습으로부터
우유니의 무서운 아름다움으로부터 느껴지는 라틴아메리카의 신비함


<백년의 고독>은 마꼰도라는 현실에 없는 마을 -콜롬비아에 있다고 추정되는- 에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슬라 부부가 정착해 산 이후 6대에 걸친 부엔디아 가족들의 삶, 사랑, 고독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환상문학 혹은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분류에 속하는 이 책을 읽기란 참 쉽지 않다는 점을 먼저 짚어야 할 것 같다. 콜롬비아의 낯선 지명과 생소한 지리적 특성들, 하나의 문장이 3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길어 집중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문체 그리고 환상문학 특유의 시공간에 구애 받지 않는 독특한 구성들로 인해 독자들은 가끔 '지금 내가 뭘 읽고 있는거지?' 하고 페이지를 돌아가서 다시 읽거나 이내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읽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읽는 경우가 다반사다. 특히 책 맨 첫장에 부엔디아 가문의 가계도가 나오는데 소설을 읽는 내내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 가계도를 수도없이 확인해야 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누구라고? 하는 물음을 소설을 마칠때까지 수없이 반복하게 된다. 아르까디오와 아우렐리오 라는 이름이 6대에 걸쳐서 비슷하게 유용되는데 가령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가 호세 아르까디오를 낳고 호세 아르까디오는 아르까디오를 낳고 아르까디오는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와 아우렐리오 세군도를 낳는 이런 식이다. 이름의 반복이 주는 작가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지만 독자는 인내심을 최대한 발휘하고 맨 첫장을 왔다갔다 하는 수고로움을 반복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왔다갔다 해도 내용을 이해하기 결코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눈치와 끈기를 최대한 발휘해 중구난방하고, 알쏭달쏭하고, 오락가락한 이 소설을 다 읽어낸 독자는 100년이 넘게 이어져온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를 통해 오직 인간만이 갖는 '고독'이라는 감정을 놓고 작가와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게 된다. "부엔디아 가문은 죽을 때 반드시 마꼰도로 돌아온다"는 예언가의 말처럼 마꼰도라는 미지의 세계에 마을을 일군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도, (그의 아들이자) 숱한 전쟁에서 공적을 세워 영웅이 된 부엔디아 아우렐리오 대령도, (그의 조카 손자이자) 수 많은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일생을 바쳐 노동운동을 한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도 그 인생의 마지막에는 자기만의 방에 자신을 가둔 체 지나온 인생을 후회하고, 스스로를 치유하고, 삶의 의미를 되물으며 삶을 마감한다. 시대가 주는 몇가지 화두에 따라 평생을 바쳐 추구했던 삶의 목적들은 다 달랐지만 인생을 거의 다 살고 나서야 오직 홀로있는 방 안에서 인생은 결국 허망했고 혹은 공허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허무함은 다음세대에 전혀 학습되지 않은체 끝이 비슷한 고전의 무수한 반복처럼 계속해서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마치 인생은 직선(直線)이 아닌 나선형이고 톱니바퀴의 축이 마모되지 않고 영원히 계속해서 회전하듯. 그 반복되는 운명이 말의 전함으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고 지울 수 없는 문신같이 남아 사랑과 아픔, 성공과 실패 속에서 각자가 발견하고 죽어갈 뿐이라고 소설은 반복된 부엔디아 사람들의 삶을 통해 강조한다.


<백년의 고독>을 더 유의미하게 읽기 위한 한 가지 조언은 콜롬비아 또는 남미의 역사를 이해하고 소설을 대하는 것이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거의 모든 남미 국가에서 되풀이된 '카톨릭 대 사회주의로 대표되는 내전의 역사'와 발전이라는 명목 아래 은밀하게 남미 정치에 무수한 갈등의 불을 지폈던 '자본주의의 침략'은 이 소설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러한 혼란의 역사속에서 운명에 순응하거나 응전했던 부엔디아 가족들의 삶은 거의 모두 실패로 끝난다. 마치 남미 대부분의 나라가 지금도 제국주의의 과거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지 않은 것처럼. 남미를 지배했던 내외부적인 폭력의 그림자는 지박령이 되어 자식과 조카와 손주와 며느리에게 전승된다. 그리고 환상문학이라는 라틴아메리카 특유의 기법과 그 역사를 결부시켜볼 때, 그 기법은 비극적인 현실에 대한 회피의 도구이었거나 이기지 못한 역사속에도 놓지 못한 희망이라는 미련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서두에 말한 라틴아메리카의 신비함들은 어쩌면 피와 눈물의 역사, 착취와 폭력의 서사 속에 핀 작은 꽃이 아니었을까. 돌이켜 보면 늘 패자였던 라틴아메리카의 문학, 음악, 미술의 미스테리함과 '산업적인 측면에서만' 이긴 미국의 예술을 비교해보고 나는 라틴아메리카의 그것에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조금 유치하지만.



콜롬비아의 다양한 예술작품들이 생각나는 책이었다_콜롬비아 메데인 13구역의 벽화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죽음>_페르난도 보테로(2006)



여기까지가 책을 읽고 어렵게 어렵게 남긴 있어보이는 척 하는 서평. 위에서 썼듯 일정 부분이 지나고서 '읽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위에 남긴 서평도 실제 책 내용보다 책 뒤의 해설을 보고 쓴 것들이 대부분. 좋아는 보이나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 때 예전에는 그냥 느낀 척 연기를 했지만 이제는 책 자체를 유예하기로 했다. 언젠가 이 책에 걸맞는 양식을 쌓았을 때 이 책이 내게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를 바라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같은 책도 그래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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