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을 위해 필요한 빌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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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바너>에서 한국 축구의 냄새가 난다. 선수 면면은 화려하지만 아시아 대회에서는 고전하는 모습. 점유율만 높고 실속이 부족한 축구. <범바너>는 물량 공세를 퍼부었지만 견고한 시청자의 벽을 뚫지 못했다.
이전 글에서 <범바너>를 <대탈출>, <크라임씬>과 비교해 보았다. 下편에는 둘의 차이를 더 탐구해보려고 한다. <범바너>가 뚫지 못한 벽은 무엇이었는지. 유재석을 가지고도 왜 공격 라인이 뻑뻑했는지. <대탈출>과 <크라임씬>은 어떻게 빌드업에 성공했는지.
<범바너>는 주로 야외에서 촬영했다. ‘그림’이 잘 나오려면 그에 맞는 배경이 필요한 법. 드라마적 연출을 위해서는 로케이션 촬영이 불가피했을 거다. ‘영화 같은 추격전’도 기대하지 않았을까. <런닝맨>의 추격 씬보다 그림이 멋있다. 이광수가 서울역 고가도로에서 범인을 쫓고, 유재석이 대형 미로를 헤메는 모습은 영화 촬영 못지 않다. 그런데 정작 매력이 없다.
먼저, 스릴이 없다. <범바너>의 추격전은 100%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잡히는 걸로 끝날 걸 굳이 왜 봐야하나? 넘길 수밖에 없다. (더 자세한 내용은 上편 참고하시길!) 시선이 분산되는 것도 한몫 한다. 멋진 촬영 배경은 이 프로그램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미 시청자가 영화, 드라마에서 숱하게 본 모습이고, 결정적으로 추리와도 관련이 없다.
교차 편집 방식도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출연진은 매번 세 팀으로 나뉘어 각각 다른 장소에서 단서를 찾고, 모여 조합한다. 다양한 그림을 제시하고 캐릭터성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각 소스가 너무 단순하다. 혼자서도 몇 시간이면 다 찾을 수 있는 수준이다. 그저 그런 재료들을 제작진은 굳이 여러 군데에 뿌려 놓았다.
<크라임씬>은 과감한 압축을 택했다. 모든 배경을 세트장 안에 집어넣어 동선을 축소했다. 예를 들어, 실제로 범인의 집에서 사건 현장까지는 1시간 걸려도, 세트장 안에서는 10초면 갈 수 있는 식이다. 플레이어가 손 쉽게 모든 장소를 구석구석 탐험할 수 있다. 뭐 하나 단서를 찾으면 금세 퍼진다. 전개 속도도 빠르다. 이런 상황에서 제작진은 더 많은 시도를 할 수 있다. 흩어져 있는 촬영 장소 때문에 에너지를 분산하기보다는 좁은 세트장에서 추리를 위한 알리바이를 하나 더 짤 수 있다.
<방탈출>은 아예 출연진을 가둬버린다. 탈출하지 못하면 퇴근을 못하고, 열쇠를 못 열면 집에 못 간다. 출연진이 추리할 당위가 생긴다. 게다가 폐쇄된 공간이라 동선이 제한적이다. 출연진이 촬영 내내 붙어있다. 정보 공유가 빠르고 전개도 빠르다. 이런 상황에서 몰입은 쉽다. 조금의 스토리텔링만 덧붙이면 된다. 시청자나 출연자나 긴장감 속에 추리하기에 충분하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게 그거잖아, 그래봐야 셋 다 뻥이잖아? 사실 그렇다. 몰랐던 것을 찾아가는 게 추리의 맛이다. 근데 실제 사건도 아닌데 몰입해봐야 얼마나 할 수 있겠으며, 그걸 봐야 얼마나 재밌냐는 물음. 근본적으로 들 수 있다.
하지만 들어보시오. 아니, 글쎄. 여기에 난 <크라임씬>, <대탈출>의 결정적 전략이 있다고 본다. <범바너>는 못 한 빌드-업 전략. 바로 게임 컨셉의 도입, 접속 장치의 존재다.
게임이라는 컨셉이 묘수다. 얼마나 절묘하냐면, 가상과 현실을 명확하게 구분함으로써 몰입을 이상하지 않게 만든다. 출연진은 또다른 자아를 만들어서 극에 몰입할 수 있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접속 장치는 ‘롤 카드 선택’이다. <크라임씬>은 매번 출연진이 롤 카드를 선택한다. 각자 연기를 준비하면서 범인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진짜 자아는 잠깐 세트장 밖에 두고 새로운 캐릭터가 되어 일종의 보드게임을 하는 셈이다. 추리 게임을 위한 연기다. 장동민은 어색함 없이, 거리낌도 없이 장줌마가 되어 연기한다.
<대탈출>은 어떨까. 애초에 ‘우리가 탈출 게임을 할게’라고 드러낸다. 주어진 캐릭터는 없다. 강호동은 강호동대로, 유병재는 유병재대로 자기 스타일대로 해도 어색할 게 없다. 어차피 방탈출 게임이니까. 게임과 현실의 단절은 ‘안대’로 해결한다. 가상 공간으로 이동할 때 출연진은 안대를 묶은 채로 줄지어 들어간다. 잠깐이지만 이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시청자와 출연진은 가상 공간에 어색하지 않게 안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범바너>는 어색하다. 카메라는 이미 돌아간다. 현실과 가상, 그 모호한 경계선 안에서 출연자는 추리도 해야 되고 재미도 만들어야 한다. 시청자뿐 아니라 출연자도 몰입하기 어려운, 썰렁한 상황이 발생하기 쉽다.
<범바너>는 어쩌면 <런닝맨>과 <무한상사>의 성공 방식을 OTT에 옮기려고 했는지 모른다. 리얼과 콩트 사이 그 어딘가의 재미, 그리고 버라이어티. 이 둘은 매회 새로운 아이템을 선보였고, 성공했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이미 구축된 캐릭터와 케미 덕이다. 그렇다면 시즌 2도 가능성은 보인다. 시즌 1 막바지로 갈수록 안재욱의 시크함, 박민영의 기민함, 이광수의 덜렁거림 등 출연진의 캐릭터가 두드러졌다. 어찌됐든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 예능이 나왔으면 좋겠다. 전 시즌을 가뿐히 넘는 시즌 2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