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에 포함된 내용은 창작된 소설의 일부분입니다. 따라서,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 등을 포함한 이 소설의 모든 요소는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허구적 창작물임을 밝힙니다.)
손혜민은 완벽한 연기자였다. 그녀는 늘 차분하고 침착했다. 비록 AB 그룹의 한복판에서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손혜민은 흔들리지 않았다. 겉으로는 고상하고 품위 있는 미소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 속에는 차가운 야망과 계산이 숨겨져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그것을 더 높이기 위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았다.
배터리 사업의 몰락으로 엄모순이 점차 고립되어 가는 상황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AB 그룹이 흔들리는 이 순간이야말로 그녀가 치고 나갈 최고의 기회였다. 그룹 내부에서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지, 누구와 손을 잡아야 할지 냉철하게 판단한 손혜민은, 엄모순의 사촌동생이자 부회장인 엄민용에게 접근했다.
"이번 싸움의 승자는 부회장님과 제가 될 거예요."
그녀는 마치 미래를 예언이라도 하는 듯,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 말 속에는 야망이 가득했다. 그녀는 이미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엄민용은 그 그림 속의 중요한 퍼즐이었다.
손혜민은 엄민용이 경영에는 별다른 재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권력의 주변부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에만 급급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약점은 바로 그녀에게 기회였다. 그녀는 자신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엄민용은 서서히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엄민용의 사무실은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고요했다. 그는 사촌형 엄모순을 어떻게 깔끔하게 제거하고 자신의 자녀들에게 그룹 경영권을 물려줄 지 고민하고 있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언제나 불안감이 있었다. 자신은 그저 AB 그룹에서 상속의 순번에 끼어 있는 인물일 뿐이라는 자괴감이 그를 짓눌렀다. 하지만 손혜민은 달랐다. 그녀는 그에게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었다.
손혜민은 여유롭게 엄민용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고급스러운 샤넬 스커트 자락이 사무실 바닥을 부드럽게 스치고, 그녀의 향수가 은은하게 퍼졌다. 엄민용은 그녀의 방문을 다소 놀란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손혜민은 한결같은 미소로 자리를 권했다.
"부회장님, 우리에게 기회가 찾아왔어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꺼냈다. 엄민용은 그 말에 의아해하며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기회라니요? 형님이 모든 걸 다 장악하고 있는데, 나에게 무슨 기회가 있다는 겁니까?" 엄민용은 사촌형 엄모순의 그림자 속에서 늘 벗어나지 못한다는 좌절감을 품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형의 그늘 속에 있었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손혜민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부회장님, 형님을 돕는다고요? 그건 큰 착각이에요. 엄모순은 이미 오래전에 우리를 버렸어요. 아니 애시당초 우리는 그림에도 없었어요. 우리는 그 그림에 달라붙는 성가진 먼지 조각에 불과하죠. 엄모순이 원하는 건 자신만의 제국이에요.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은 그에게 그저 필요할 때 쓰는 도구일 뿐이에요. 이빨에 낀 성가진 찌꺼기를 발라내는 이쑤시개보다도 못한 존재라구요"
그녀의 말은 마치 날카로운 비수가 엄민용의 깊은 속내를 찌르는 듯했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내 입가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손혜민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엄모순이 당신에게 모든 것을 넘길 것 같아요? 천만에요.
그럴거라고 프로포폴 주사를 매번 놓아주겠지만
잠시 잠들었다 허무하게 깨면 다시 현실이죠.
마약과 같은 그 쓰레기를 빨리 제거해야해요"
"그가 준비하는 건 오로지 자신을 위한 제국이에요. 부회장님은 그 안에서 부차적인 인물에 불과해요. 아니, 말했듯이 그 그림에 아예 존재하지도 않아요. 그러니 우리가 힘을 합쳐야 해요. 이 기회가 지나가면 다시는 오지 않을 겁니다."
엄민용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손혜민의 말은 정확하게 맞는 말같았다. 사촌형 엄모순은 자신을 가족으로 여기기보다는, 단지 사업을 위한 ‘도구’로만 대하고 있었다. 그가 한 번도 경영권을 내주지 않았던 것도, 그저 자신을 수족처럼 부리기 위해서였다. 엄민용은 더 이상 이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그때 손혜민은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부회장님, 이제 선택의 순간이에요. 당신이 형님이라고 부르는 살이 쳐오를 대로 쳐오른 돼지 새끼 밑에서 그저 고분고분한 동생으로 남겠어요? 아니면 나와 함께 AB 그룹을 장악할 기회를 잡겠어요? 나는 이미 사모펀드를 장악했어요.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엄모순을 몰아내고 그룹을 새롭게 만들 수 있어요."
엄민용의 눈빛이 확연히 달라졌다. 손혜민의 말이 그에게 일종의 해방구처럼 들렸다. 이 또한 신종 프로포폴이라도 그저 사촌형에게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가고 싶었다. 그리고 손혜민이 제시하는 새로운 길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좋습니다."
엄민용은 드디어 결심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그 한마디는 그들의 동맹을 공식화하는 선언이었다. 손혜민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손아귀에 엄민용을 완전히 넣었다. 그녀의 음모는 점점 구체화되고 있었다.
그 후 손혜민은 엄민용과 함께 발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곧바로 외부 자본과의 재협상을 시작했다. 손혜민은 외부 자본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안정적인 수익과 장기적인 성장 가능성을 약속하며 그들의 신뢰를 얻어냈다. 그리고 엄민용이 그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걸어 합병의 성공을 이끌어냈다.
엄모순은 이 음모에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점점 고립되고 있었다. 손혜민과 엄민용은 그들의 계획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외부 자본은 김준호와 엄모순에게 등을 돌리고, 손혜민이 그리는 새로운 합병안에 찬성하기로 결정했다. 손혜민은 그 순간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획의 모든 단계를 철저히 계산하고 있었고, 이제 그 계산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손혜민은 자신의 계획이 완벽하게 성공할 것임을 확신했다. 그녀는 외부 자본을 완전히 장악했고, 엄모순을 몰아내는 일만 남아 있었다. 이제 그녀와 엄민용의 동맹은 AB 그룹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이제, 엄모순은 끝이야."
손혜민은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김준호와 부장A는 늘 깔끔하게 정돈된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 더미를 쓸어보았다. 한때는 이 서류들이 자신의 손안에 든 승리의 증거라고 믿었다. 외부 자본, 정부, 회사 내부 세력까지 모두 그의 계획대로 움직일 것이라 확신했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이제 날카로운 배신의 칼날이 되어 그의 가슴을 후벼 파고 있었다. 서류를 무심코 넘기던 손끝이 떨렸다.
“말도 안 돼…”
김준호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지금 마주한 현실은 냉혹했다. 믿었던 사모펀드, 외부 자본이 돌연 등을 돌렸다. 자신들의 편이라 믿었던 그들이 엄민용의 편에 섰다는 소식이 그의 귓가를 때렸다.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분명히 모든 계획은 완벽했다. 이 모든 게 어떻게 뒤집힌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틀 전만 해도 외부 자본 측에서 합병에 반대한다는 확실한 약속을 받았었다. 부장A와 김준호는 그들과의 비밀 만찬에서 샴페인을 터뜨리며 승리를 축하했다. 그러나 그들의 배신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외부 자본은 갑자기 말을 바꿨다. 통화 한 통으로 모든 것이 무너졌다.
“우리가 다시 생각해봤는데, 엄민용 부회장이 제시한 조건이 더 유리해 보입니다. 미안하지만 이번 합병, 찬성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부장A와 김준호는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얼어붙었다.
엄민용이 어떻게?
그가 물밑에서 어떤 작업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순간 부장A는 손혜민도 이 일에 개입했을 가능성을 직감했다. 그녀는 외부 자본이 요구하는 가장 큰 요건, 안정적인 이익을 약속하며 그리고 AB그룹의 오너 중 하나인 엄민용을 끌여들여 이익과 명분 모두를 제시하며 그들의 마음을 빼앗은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김준호가 쌓아왔던 모든 신뢰는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은밀히 사모펀드의 지인을 통해 이 사실을 뒤늦게 확인하고 망연자실하는 부장A와 김준호.
사무실은 암울했다. 부장A가 그의 옆에서 천천히 말을 건넸다.
“사모펀드는 언제나 자신들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둡니다. 그들이 우리를 떠난 건 그들이 손혜민과 엄민용이 더 나은 조건을 제시했기 때문이겠죠. 지금 그들이 합병에 찬성한 이유는 명백합니다. 손혜민이 그들을 장악한 겁니다.”
부장A는 책상 위 서류를 차분하게 정리하며 말했다. 그의 말은 잔혹할 정도로 사실적이었다. 김준호는 자신의 전략이 너무도 순진했음을 깨달았다. 세상은 돈과 권력이 움직이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신뢰했던 자본은 철저히 이익을 좇는 기계였다.
김준호는 턱을 괴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방 안에 깔린 침묵은 짙었다. 갑작스러운 외부 자본의 배신이 그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손혜민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그녀는 엄모순과 엄민용 사이에서 교묘히 양다리를 걸치며 결국, 더 이익이 되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엄민용과 은밀히 손을 잡은 그녀는 결국 판을 뒤집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김준호는 마치 스스로에게 묻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게 남은 카드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눈빛은 고뇌와 좌절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이 싸움에서 지고 있었다.
부장A는 고개를 들고 김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에게 남은 길은 하나입니다.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게임이 끝난 건 아니니까요.”
김준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장A의 말은 맞았다.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남은 것은 치열한 생존 싸움이었다. 그들이 설계한 계획이 무너졌다고 해서 모두가 쓰러질 필요는 없었다. 김준호는 느리게 손을 책상에 얹었다. 그의 손가락이 떨렸지만, 그 떨림은 긴장감이었고, 그 안에는 새로운 결의가 서려 있었다.
"손혜민… 그녀는 나를 무너뜨리려는 것이 분명해. 그런데 이게 단순한 돈의 문제가 아니야. 훨씬 더 깊고 복잡해. 엄민용과 그녀가 손을 잡은 건 엄모순을 배신하기 위한 수순이야. 그걸 이용할 수 있어."
김준호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느끼던 좌절은 점차 결단으로 변해갔다. 손혜민. 그녀가 이 모든 배신의 중심에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녀는 냉정했고, 항상 승리를 위해서라면 누구와도 손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가 생각하지 못했던 수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는 모두 자신이 혼자 움직이는 척하면서도 엄민용과 은밀하게 손을 잡고 있었다. 외부 자본을 움직인 것도, 김준호를 배신하게 만든 것도 손혜민의 교활한 계획이었다.
"놈들이 도대체 어디까지 나를 가지고 놀 수 있다고 생각하지?"
김준호는 이를 악물었다. 이건 단순한 비즈니스 게임이 아니었다. 손혜민은 그에게 치욕을 안겨주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단지 외부 자본을 뺏는 데서 끝나지 않고, 김준호를 완전히 망가뜨리려 하고 있었다.
부장A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아직 끝난 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동맹을 찾아야 합니다. 손혜민과 엄민용은 그들의 방식대로 움직이겠지만, 우리가 가진 카드도 만만치 않죠."
김준호는 깊은 숨을 내쉬며 다시 결의를 다졌다. 이 싸움은 단순한 권력 다툼을 넘어섰다. 이제 그는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워야 했다. 이 판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손혜민을 뛰어넘는 치밀함과 냉정함이 필요했다.
김준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전략, 새로운 동맹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쥔 마지막 카드, 비자금 내역이 그들을 무너뜨릴 것임을 믿었다.
일주일 넘도록 부장A와 김준호는 서류 더미 속에서 혼란스럽게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외부 자본의 배신과 합병 찬성 소식이 전해진 순간, 그의 머릿속은 하얘졌다. 배후에서 손혜민이 엄민용과 손을 잡았다는 정보는 그에게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계획과 기대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부장A와 김준호는 자신이 그토록 믿었던 힘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사무실은 적막 속에서 서늘한 기운이 돌고 있었다. 방 안의 고요함은 그의 좌절감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부장A는 조용히 김준호를 지켜보다가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봅시다. 아직 남은 선택지가 있습니다."
부장A의 목소리는 차분하고도 단호했다.
김준호는 침묵했다. 그가 계속해서 생각하던 것은, 이제 자신이 이 게임에서 완전히 홀로 남겨졌다는 불안감이었다. 그러나 부장A의 차분한 말투가 그의 혼란을 조금씩 가라앉혔다.
"우리가 너무 엄모순만을 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 주변의 다른 인물들도 변수에 넣었어야 했는데…여하튼 엄모슨은 이제 완전히 고립됐습니다. 손혜민과 엄민용은 강력한 동맹이 됐고, 외부 자본도 그들의 편이 됐죠.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만의 동맹을 찾아야 합니다."
부장A의 말은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있었다. 김준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 동맹이 있다고? 이제 믿을 사람은 없을 것 같아." 김준호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부장A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직 남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룹 내에서 엄모순의 독단적인 경영에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들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엄민용이 엄모순과 완전히 결별한다면 둘이 비밀리에 진행하려던 신재생 사업도 새판을 짜야할테고 이런 상황도 우리한테는 전화위복이 될 수 있어요"
항상 모든 상황에서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긍정의 실마리를 찾는
우리 부장A의 말은 김준호에게 희미한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래 여전히 싸울 수 있었다.
그 싸움을 위해서는 새로운 동맹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들은 엄모순의 몰락에 대비해야 했다.
그날 밤, 김준호와 부장A는 그룹 내에서 동맹이 될 수 있는 인물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장 먼저 접촉한 인물은 임원C였다. 임원C는 그룹 내에서 신중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고, 엄모순과 엄민용의 결정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한 적은 없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항상 불만이 존재했다. 그는 엄모순의 권위적인 경영 방식에 반발을 느끼고 있었고, 엄민용의 권력 확장에도 불안감을 품고 있었다. 엄민용과도 결탁하고 신재생 사업을 드라이브하면서 엄민용을 그룹의 후계자로 지지하려고 했지만, 엄민용과 손혜민이 결탁하면서 손혜민으로부터 내쳐진 상태였다. 김준호, 부장A와도 한 때 느슨한 동맹으로 협업을 했었지만 해서 그의 줏대없고 다양한 양다리 전략에 반신반의하면서도 찬물 더운물을 가릴 때가 아님을 직감한 부장A. 어떻게든 그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방향을 틀기 위해 다양한 사람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엄민용의 숨겨진 전략도 파악하기에 유리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손혜민으로부터 내쳐진 그의 분노를 잘 다스려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김준호와 부장A는 임원C를 비밀리에 만났다. 그들은 차 한잔을 나누며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임원C님, 최근 그룹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준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임원C는 고개를 들고 그들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룹의 방향성에 대해 큰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엄 회장님의 결정이 회사에 큰 타격을 주고 있죠. 엄민용 부회장과 손혜민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더 복잡해졌습니다."
부장A가 나섰다. "저희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래서 우리끼리 새로운 동맹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룹 내에서 엄모순 회장님의 독단적인 경영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손을 잡고, 이 혼란 속에서 살아남을 계획입니다."
임원C는 잠시 그들의 말을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엄모순의 독단적인 경영, 그리고 손혜민과 엄민용의 권력 장악 움직임은 그에게도 큰 부담이었다. 그는 그 혼란 속에서 자신의 생존 방식을 찾고 있었다.
"저도 더 이상 이 상태로는 못 가겠어요. 엄 회장님이 계속 이끄시는 방식으론 그리고 엄민용 부회장의 꼼수전략으로는 그룹의 미래가 불안합니다. 무엇보다 손혜민이 그룹을 장악하게 되면 그건 재앙 수준입니다."
김준호와 부장A는 서로의 눈을 마주쳤다. 그들의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임원C와 손을 잡기로 했다. 이제 새로운 동맹이 결성되는 순간이었다.
그 후, 그들은 임원D를 찾아갔다. 임원D는 그룹 내에서 과묵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김준호와 부장A는 임원D를 신중하게 접촉했다.
임원D는 서류를 정리하며 고요한 사무실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김준호와 부장A는 침착하게 그와 대화를 나눴다.
"임원D님, 최근 그룹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김준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임원D는 잠시 그들을 응시하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지금 처한 상황을 알고 있습니다. 그 틈을 타 엄민용 부회장과 손혜민이 권력을 장악하려고 있지만, 그들이 이끄는 방향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서로의 힘을 모아야 합니다. 우리끼리 동맹을 결성해야 합니다. 엄민용 부회장과 손혜민의 계획은 그룹을 더 큰 위험에 빠뜨릴 겁니다. 지난번 신재생 사업 프로젝트 구상과 기자간담회도 성공적으로 이끌어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룹의 미래와 신재생 사업에 각별하게 관심이 지대하진 임원D님의 리더십이 꼭 필요합니다"
임원D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저도 그 동맹에 합류하겠습니다."
동맹이 서서히 강화되어 가던 그 시점, 임원B가 김준호에게 비밀리에 접근했다. 임원B는 그룹 내에서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그의 위치는 매우 중요했다. 그는 그룹의 비자금 흐름에 깊이 관여한 인물로, 엄모순과 손혜민의 비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엄모순에게 내쳐지고 손혜민으로부터도 악마의 유혹을 받았지만 두 인물 모두 과거의 인물로 그룹의 미래를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미래를 맡기기에는 사상누각임을 뻐져리게 절감하고 있는 임원B였다. 300억이라는 퇴직금을 보장받았지만, 자신을 사냥개쯤으로 취급하는 엄모순의 돼지 머리를 사냥개로 변신해 물어뜯어 줄 날만을 칼을 갈고 준비하는 임원B였다. 엄모순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독침이 입안에서 가득 고일 정도의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임원B는 결국 김준호와 손을 잡는 것이 가장 절묘한 전략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어느 날 밤, 임원B는 조용히 김준호와 부장A에게 접촉해왔다. 그는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준호 씨, 중요한 정보가 있습니다. 비자금 문제입니다."
김준호는 눈을 크게 떴다.
"비자금이라고요?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세요."
임원B는 서류 몇 장을 꺼내 김준호에게 내밀었다.
"여기 엄모순과 손혜민이 관련된 비자금 내역이 있습니다. 이걸 언론에 흘린다면, 둘 모두 한순간에 끝장날 겁니다."
김준호는 서류를 빠르게 넘겨보았다. 그의 손이 떨렸다. 이 서류에는 그들이 몰락시킬 수 있는 모든 증거가 담겨 있었다. 엄모순과 손혜민은 그룹 내부에서 그동안 쌓아온 비자금을 숨기고 있었고, 이 내역이 세상에 공개된다면 그들의 몰락은 불가피했다.
"이건... 완벽한 증거군요." 김준호는 중얼거렸다.
임원B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걸 가지고 언론과 연결해보세요. 그럼 손혜민과 엄모순은 끝납니다. 우리는 그들이 무너질 때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저도 당신들과 함께하겠습니다."
김준호는 임원B의 손을 꼭 잡았다.
"좋습니다. 함께 끝까지 갑시다. 이 정보는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입니다."
부장A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서로를 믿을 수밖에 없군요. 배신은 곧 죽음을 의미하니까."
그날 밤, 김준호와 부장A, 그리고 임원B를 포함한 동맹은 새롭게 결속되었다. 그들은 이제 엄모순과 손혜민의 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자금 내역은 그들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였고, 그들의 동맹은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들이 마지막 카드를 언제,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결정이었다.
깊은 밤, 서울의 고층 빌딩 숲 사이에 우뚝 서 있는 AB 그룹 회장 전용 탑층 스위트는 어둠 속에서도 그 위용을 잃지 않았다. 그곳의 가장 높은 층, 엄모순의 개인 사무실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거대한 창문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아른거렸지만, 엄모순의 표정은 한없이 어두웠다. 책상 위에 놓인 위스키 잔이 그의 손에서 덜덜 떨리며, 얼음이 잔 안에서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고요한 방안을 가득 메웠다.
엄모순은 혼자였다.
아니, 스스로 고립된 채로 남아버린 것이다. 한때는 자신의 절대적 권력으로 AB 그룹을 좌지우지하며 모든 것을 손에 쥔 것처럼 느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자신이 설계한 제국이 그의 통제에서 벗어나 통제 불능 상태로 빠져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배터리 사업의 몰락은 그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속도로 그룹의 기초를 흔들어놓았고, 그는 더 이상 그 흐름을 막을 힘이 없었다.
그는 몇 년 전만 해도 손혜민과 엄민용이 그의 곁을 떠날 것이라 상상도 하지 못했다. 손혜민은 그의 부인이었고, 엄민용은 그의 오른팔이었다. 그들의 충성심은 확고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 둘이 뒤에서 손을 잡고 자신을 몰아내려 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엄모순은 그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그 증거는 점점 더 명백해지고 있었다. 그는 너무 많은 것을 간과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는 깊은 숨을 내쉬며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불현듯, 무거운 피로가 그의 몸을 짓눌렀다.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너무 복잡하게 꼬여버렸다. 그는 뭔가 다른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의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혼란스러웠다. 배신당한 기분에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일었다.
"손혜민, 엄민용... 그는 이를 갈며 속으로 이름을 중얼거렸다.
"너희들이 감히 날 배신해?"
엄모순은 전화를 집어 들고 그룹의 몇몇 고위 임원들에게 비밀 회동을 소집했다. 이젠 마지막 수를 던질 때가 왔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AB 그룹의 총수다.'
그는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이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그는 더 단호하고 냉정하게 움직여야 했다.
그는 재빨리 그의 충복들을 다시 모으기 시작했다. 그룹 내에서 여전히 자신을 따르는 임원들이 있었고, 그들을 통해 그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회장실은 곧 고위 임원들로 채워졌다. 그들의 눈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지만, 엄모순은 이를 눈치채지 못한 채, 그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강력히 내밀었다.
"이건 단순한 싸움이 아니야." 그는 굳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AB 그룹을 지켜야 해. 이 합병이 성공하더라도, 그룹의 지분과 운영을 최대한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설계해야 해."
하지만 임원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손혜민과 엄민용 쪽으로 발을 옮긴 상태였고, 엄모순의 말은 그저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렸다.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들조차도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엄모순은 자신이 점점 더 고립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과거라면 그의 말 한마디에 모든 임원이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말에 공감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의 눈에는 충성스러운 척하는 몇몇의 임원들의 눈빛 속에 숨겨진 의심이 보였다. 그들은 이미 다른 곳에 발을 뻗고 있었다.
회의가 끝난 후, 엄모순은 홀로 사무실에 남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사방이 적들로 둘러싸여 있는 기분이었다. 손혜민과 엄민용, 그리고 이제는 그가 믿었던 몇몇 임원들까지. 모두가 그를 배신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려고 했지만, 이제 그 싸움은 너무나 외롭고 고독했다.
그는 그날 밤 잠들 수 없었다. 고독과 배신감에 찬 그의 마음은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결국 그는 위스키 한 잔을 더 따르고 창밖으로 향했다.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화려했지만,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는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는 듯했다. 그는 서류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손혜민이 작성한 비밀 계약서였다. 그는 이 서류가 그녀가 자신을 배신할 증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게 끝은 아니야.'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난 아직 AB 그룹의 회장이야. 내가 그들에게 지지 않아.'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는 자신이 홀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주변은 이미 너무나 많은 적들로 가득했다. 그는 그 적들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까? 손혜민의 야망과 엄민용의 배신, 그리고 임원들의 냉담한 반응 속에서 그는 점점 더 궁지로 몰리고 있었다.
엄모순은 더 이상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고립된 상황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더 이상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비장의 카드들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남아 있을 마지막 충성파, 그리고 자신을 다시 한 번 살릴 기적적인 기회가 있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명확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이 없었다. 손혜민과 엄민용은 그를 완전히 몰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이 싸움에서 승리할 방법을 찾기 위해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야만 했다.
"아직은 포기할 수 없어." 그는 홀로 중얼거렸다. "난 반드시 살아남을 거야."
그날 밤, 엄모순은 AB 그룹의 회장실에서 홀로 밤을 새웠다. 그는 고독하게 창밖의 불빛을 바라보며 무너져가는 제국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손혜민은 언제나 자신감에 차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정치, 경제, 사회의 중심부에서 살아남은 그녀는 이제 AB 그룹의 권력을 자신의 손에 쥐기 직전이었다. 그녀의 미소는 한결같이 부드럽게 보이고, 목소리는 언제나 평온한 것처럼 들렸지만, 그 속에는 차가운 야망이 들끓고 있었다. 그녀는 단 한순간도 자신의 목표를 잊지 않았다. AB 그룹을 완전히 장악하고, 엄모순과 그에게 충성하는 모든 사람을 몰아내는 것이 바로 그 목표였다.
손혜민은 자신이 마치 체스판 위의 퀸처럼 모든 말을 움직이고 있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엄모순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 심지어 외부 자본까지 그녀의 편으로 돌아섰다. 그녀의 계획은 치밀했고, 냉정하며, 무엇보다 효과적이었다.
오늘도 그녀는 고급 호텔 스위트룸에서 여유롭게 아침을 맞이했다. 그녀가 바라보는 창 밖으로 보이는 도시는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처럼 보였다. AB 그룹도 곧 그렇게 될 터였다. 하지만 그녀가 그토록 신뢰하는 계획 속에서도, 아주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손혜민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손혜민은 그날 오후, 엄민용과 비밀리에 만났다. 그들의 동맹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지만, 두 사람은 필연적인 연합이었다. 손혜민은 그룹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더 강화하기 위해 엄민용의 힘이 필요했고, 엄민용은 엄모순을 몰아낼 수 있는 손혜민의 계획에 승산을 보았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어요.” 손혜민은 엄민용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한 치의 불안도 없었다.
엄민용은 그녀의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엄모순은 아직도 우리 계획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은데요. 나머지 임원들도 대부분 우리 편으로 넘어왔고.”
“외부 자본도 마찬가지예요. 그들은 이제 엄모순에게 더 이상 충성할 이유가 없어요. 그들이 원하는 건 안정적인 수익이니까, 우리가 그걸 보장하면 되는 거죠.” 손혜민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외부 자본이 이득을 쫓아 움직인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엄모순이 더 이상 그들에게 신뢰할 만한 파트너가 아니라는 것도 말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타이밍입니다. 이 판을 뒤집기 위한 마지막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해요."
손혜민은 크리스탈잔을 들며 결심을 다졌다. "모든 것은 제 시간에 맞춰 이루어질 겁니다. 곧 우린 엄모순을 몰아내고, 그룹을 완전히 장악할 거예요."
엄민용도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사촌형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그가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엄모순의 몰락은 그에게 있어 개인적인 승리이기도 했다. 그들의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되었고, 손혜민은 곧바로 호텔로 돌아갔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믿었다.
손혜민은 그날도 당당하게 호텔 로비에 들어섰다. 늘 그렇듯 자신이 주인인 양 행동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곳은 그녀가 오랫동안 통제해온 곳이었다. 직원들은 고개를 숙이며 그녀를 지켜보았고, 고객들은 그녀의 존재감에 일순간 조용해졌다. 손혜민은 오만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자신만만한 미소는 여전했다. 모두가 그녀의 권위를 알았고, 그녀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날 밤, 손혜민은 자신이 지배한다고 믿었던 이 호텔에서 굴욕적인 사건을 맞이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호텔 로비 한쪽에서 한 남자가 다급하게 걸어나왔다. 그는 주방 복장을 한 쉐프였다.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고, 눈빛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손혜민을 향해 빠르게 다가가는 그의 손에는 방금 호텔 주방에서 만든 채 식지도 않은 고추장이 가득 담긴 통이 들려 있었다. 그 순간, 로비는 묘한 긴장감으로 휘감겼다.
"손혜민!" 쉐프의 목소리는 매서웠다. 로비 전체에 울려 퍼지며,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고객들은 잠시 멈칫했지만, 그 누구도 이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상하지 못했다.
‘감히 내 이름을 존칭도 없이 부르다니…’ 그러나 호텔 로비인 만큼 차분히 손혜민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죠? 지금 바빠요. 나중에 얘기합시다." 그녀는 그를 무시하며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쉐프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게 다가서며 그의 눈빛은 더욱 매서워졌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렸다.
"니가 우리에게 했던 짓을 잊지 않았어. 너는 이 호텔에서 제왕처럼 굴었지만, 우리에게 남은 건 고통뿐이었어."
로비에 있던 직원들과 고객들은 긴장된 눈빛으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속삭임이 여기저기서 퍼져나갔다.
"저 여자가 누구야? 무슨 일이 있었나 봐."
"저 사람, 손혜민아냐? 엄청난 갑질로 유명해. 직원들한테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지 몰라."
손혜민은 그 순간에도 자신이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쉐프의 다음 행동은 그녀의 예상 밖이었다.
쉐프는 손에 든 고추장 통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의 손에는 고추장이 가득 담긴 스푼이 쥐어져 있었고, 손혜민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그 순간, 손혜민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이 남자가 진심임을 깨달았다. 그가 오랫동안 품어왔던 분노가 이제 터지려 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그녀는 분노와 당황 속에서 소리쳤다. 하지만 쉐프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가 들고 있던 고추장이 그녀를 향해 던져졌다.
"네가 우리에게 했던 그 모든 것을 돌려줄 시간이야!"
뜨거운 고추장이 손혜민의 얼굴과 목, 그리고 디올 드레스에 그대로 쏟아졌다. 고추장은 그녀의 피부 위로 흘러내리며 붉게 물들였다.
로비 전체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쉐프는 손에 쥐어져 있던 고추장 스푼으로 남은 고추장을 떠서 손혜민 머리에 한 스푼 한 스푼 퍼내 마지막까지 남은 고추장을 쏟아내고 있었다.
"으아아악!"
손혜민은 절규하며 땅바닥에 주저앉아 움직이지 못했다.
고추장의 뜨거움과 수치심이 그녀의 얼굴과 몸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그 자리에 그대로 무너졌다.
호텔 직원들과 고객들은 그 장면을 충격에 휩싸인 채 지켜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돕지 않았다. 대신 사람들은 휴대폰을 꺼내 들고 사진을 찍거나 촬영을 시작했다. 그 누구도 손혜민의 굴욕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했다.
"저게 손혜민이라고? 엄모순 이혼녀? 맨날 직원들 괴롭히더니 결국 저렇게 당하네. 당해도 싸"
"그동안 갑질을 그렇게 해대더니, 오늘 제대로 된 복수를 당했군. 저 남은 고추장, 나도 저년 얼굴에 짓이기고 싶네"
속삭임은 이제 비난으로 바뀌었다. 모든 사람이 그녀를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손혜민은 자신의 옷에 번지는 붉은 자국을 보며 고통에 찬 표정으로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이 파고드는 건, 자신을 향한 모든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이었다.
"이게… 어떻게…"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땅에 엎드렸다. 그녀의 머릿속은 공포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이 지배했던 이 호텔에서, 모든 이들 앞에서, 그녀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평생을 군림해온 이곳에서, 그녀는 오늘 가장 낮은 곳에 떨어졌다.
쉐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니가 우리에게 준 그 고통을 이제 너도 똑같이 느껴봐."
손혜민은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일어나려 했지만, 고추장에 젖은 드레스와 주위의 수많은 시선이 그녀를 그자리에 그대로 묶어두었다. 굴욕과 분노가 뒤섞인 눈물은 그녀의 눈가에서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권력과 자존심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보호하지 못했다.
손혜민의 갑질은 이미 오래전부터, 아니 세상에 태어날 때 부터 시작되었고, AB그룹 내에서는 암암리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황당한 사건은 몇 년 전 AB호텔에 설치된 장독대였다. 10년 전, 손혜민은 자신의 예술적 기획이라며 뮤제AB에서 ‘전통 고추장과 된장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AB호텔을 마치 자신의 개인 실험실처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고추장과 된장을 담그는 작업이야말로 전통 예술과 현대적 감각이 만나는 지점이에요,”
손혜민은 호텔 경영진과 주방 인력을 모아놓고 자신감 있게 말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이 프로젝트가 시대를 초월하는 혁신이 될 것이라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터무니없었다. 고급스러운 호텔 정원 한켠에 장독대를 설치한다는 발상 자체가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기이했다.
“예, 여사님. 그… 그러나 여긴 호텔입니다. 전통 장을 담그는 장소로 적합하지 않을 수도…”
주방장인 김 셰프가 말을 꺼냈지만, 손혜민은 이미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요리의 장인이라면서, 이런 하늘이 내린 기회를 반대해? 예술가들은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하는 법이야. 시대를 따라갈 수 없다면, 당신은 그저 구식 꼰대 요리사일 뿐이지.” 그녀는 그를 모욕하듯 말했다.
김 셰프는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호텔의 대표적인 요리사였던 그도, 손혜민 앞에서는 그냥 하나의 ‘수하’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렇게, AB호텔의 주방은 전통 장을 담그는 장소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장독대가 호텔 정원 한켠에 조용히 설치되었고, 호텔 주방에는 고급 음식이 아닌 고추장과 된장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셰프들과 주방 직원들은 매일 장을 담그고, 전통 방식을 따라 숙성 작업을 이어갔다.
“우리가 요리사가 아니라 전통 장인인가,” 한 직원이 중얼거렸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쌓여갔다. 그들은 고급 호텔에서 일하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이제 그들의 업무는 장을 돌보는 일이었다. 그러나 손혜민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에게 이들은 그저 자신의 예술 프로젝트를 위해 필요한 도구일 뿐이었다.
손혜민의 AB호텔에서의 갑질은 고추장과 된장 프로젝트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AB호텔의 최고급 스위트룸을 사실상 자신의 개인 별장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예약도 없고, 비용도 내지 않았지만, 호텔은 항상 그녀의 방문에 대비해 스위트룸을 비워두었다.
“여사님께서 다시 오셨어요. 오늘도 그냥 투숙하십니다,” 호텔 매니저가 보고했다. 직원들은 그녀의 요구에 따라 움직였고, 손혜민은 최고급 서비스와 시설을 마음껏 이용했다.
“오늘은 와인 좀 준비해줘. ‘샤또 오브리옹 프리미에 크뤼’로. 그리고 스테이크도 내가 늘 먹던대로 구워서 가져오고, 가니쉬도 늘 그대로...” 그녀는 스위트룸에서 명령을 내리듯 룸서비스를 요청했다. 그 누구도 그녀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하루는 한 젊은 직원이 실수로 손혜민의 스파 예약을 놓쳤다. “스파 예약을 안 했다고? 이게 무슨 짓이야!” 손혜민은 얼굴이 새빨개지며 직원에게 소리쳤다. 그 직원은 사과했지만, 그녀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그를 호텔 매니저에게 바로 해고시키라고 명령했다.
“당장 저거 내 눈앞에서 치워. 내 니즈를 충족하지 못하는
저런 아이큐 두자리 병신 따위는 필요 없어.”
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호텔 직원들은 속으로 분노했지만, AB그룹 회장의 사모님이라는 손혜민의 권력 앞에서는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며, 손혜민의 고추장과 된장 프로젝트는 호텔에 큰 짐이 되었다. 호텔 고객들은 장독대가 설치된 사실에 불만을 제기했고, 호텔 경영진은 더 이상 손혜민의 예술 프로젝트를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제 장독대를 철거해야 합니다. 고객들의 불만이 끊이질 않아요. 게다가 이혼 소송이 시작된 지금, 여사님의 힘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한 임원이 경영진 회의에서 제안했다.
그들은 손혜민이 이혼 소송으로 정신이 팔려 있을 때를 틈타 장독대를 철거하려 했다. 철거 계획은 극비로 진행되었고, 작업자들이 조심스럽게 장독대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혜민은 금세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내 예술품 장독대를 손대다니, 이게 무슨 짓이야!”
그녀는 분노에 차서 호텔로 달려갔다. 그녀는 호텔 경영진을 강하게 몰아붙였다.
“이건 내 예술작품이야! 절대 철거할 수 없어. 예술을 파괴하는 행위야.
무식한 당신들이 '예술'이 뭔지나 알아?”
“여사님, 호텔 이미지와 고객 불만을 감안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입니다,” 호텔 매니저는 최대한 침착하게 대응하려 했지만, 손혜민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는 호텔 경영진을 위협하며 장독대 철거 작업을 중단시켰다.
결국, 장독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손혜민의 권력은 여전히 강력했다. 호텔 직원들은 다시 한숨을 쉬며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그들의 불만은 깊어져 갔다. “우린 그녀의 장난감일 뿐이야,” 한 직원이 중얼거렸다.
(다시 현실) 그날 밤, 손혜민은 스위트룸에서 혼란 속에 뒤척였다. 평소 같으면 그녀만을 위해 준비된 최고급 침대와 침구 사이에서 금방 잠들었을 그녀였지만, 그날만큼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얼굴에 남아 있는 고추장의 자국이 비록 씻겨 나갔을지언정, 그 굴욕감은 전혀 지워지지 않았다. 온방이 고추장 냄새로 진동하는 듯 했다. 그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거닐었다.
"이건 단지 작은 사고일 뿐이야."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위로했다.
"내 계획은 완벽해. 엄모순은 곧 끝나고, 내가 승리할 거야."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확신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다독이는 말일 뿐이었다. 오늘의 사건은 단순한 굴욕을 넘어선, 더 큰 무언가의 전조 같았다. 그녀는 그날 밤, 이상하리만큼 불안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손혜민은 자신이 만들어낸 제국의 균열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져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그토록 공들여 만든 계획이 과연 무사히 완성될 수 있을까? 승리를 자신했던 손혜민에게 첫 번째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엄모순은 밤이 깊어지는데도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혼란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창밖의 서울 야경은 여전히 화려했지만, 그가 쌓아올린 제국은 마치 거대한 유리탑처럼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균열이 언제 무너질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엄모순은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그날 따라 더 무겁고, 더욱 더 어두웠다. 손혜민의 배신, 엄민용의 야심, 그리고 점점 더 그를 조여오는 내부의 음모들. 그 모든 것들이 그를 숨 막히게 했다. 그는 지금껏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실상은 그가 점차 고립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피곤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감긴 눈 뒤로 떠오르는 것은, 그가 쌓아왔던 권력이 사라져가는 장면들이었다. '내가 이렇게 쉽게 끝날 사람이 아니야.' 엄모순은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하지만 그 스스로의 다짐조차도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잠이 들지 못한 엄모순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서울의 불빛은 여전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그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신이 이 도시와 이 그룹을 지배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이제 과거의 영광에 불과했다. 현재의 그는 더 이상 그 모든 것을 지배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가 나를 떠나고 있어.' 그는 자신의 속마음에 떠오르는 말에 힘없이 무릎을 꿇을 것만 같았다. 그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음모와 배신의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오는 듯했다. 그룹의 임원들은 이미 자신의 뜻을 거부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의 가족들조차 그를 배신하고 있었다. '손혜민, 엄민용, 아니 모든 사람들이 나를 등지고 있어.'
그 순간, 엄모순은 깊은 피로에 잠식된 채 벽에 기대었다. 그동안 그를 지탱해주던 권력과 자부심은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인정해야만 했다.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자신에게 돌아오고 있음을 느꼈다. 한때 자신이 군림하던 제국이 이제는 그의 발밑에서 모래처럼 무너져가고 있었다.
엄모순은 피곤에 지쳐 소파에 주저앉았다. 이 상황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거대한 음모의 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끝까지 몰아붙이는 악몽과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워야 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이어 그는 악몽 속으로 빠져들었다.
엄모순은 다시 AB 그룹 본사에 서 있었다. 그는 그룹의 회장실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연달아 터지며 그의 눈을 휘감았다. 기자들은 그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엄 회장님, 비자금 의혹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손혜민과의 관계에 대해 해명해 주시죠!"
엄모순은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려 했지만, 목에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고 그의 몸은 땅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그의 발이 땅에 단단히 묶여 있는 듯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고, 그를 향한 수많은 질문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회장님, 진실을 밝혀주십시오!"
"비자금과 내연 관계는 사실입니까?"
기자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그 소리는 엄모순의 머릿속을 울리고, 점점 더 크게 다가왔다. 그는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지만, 그의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손혜민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끝났어, 엄모순. 이제 당신은 더 이상 권력을 가질 수 없어." 그녀의 목소리는 냉정하고 무자비했다.
"안 돼!" 엄모순은 비명을 질렀지만, 그의 목소리는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눈앞에 있는 손혜민에게 손을 뻗으려 했지만, 그의 손은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고, 그가 차지했던 모든 것이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순간 그는 실오하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상태임을 깨달았다.
그때, 엄민용이 나타났다. 그는 손혜민의 뒤에 서서 비웃듯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 이제 모든 것이 끝났어. 이제 내가 이 그룹을 차지할 거야." 엄민용의 목소리는 엄모순에게 치명적인 한 방처럼 다가왔다.
"이게… 어떻게…" 엄모순은 절망 속에서 울부짖었다. 그의 발은 여전히 땅에 묶여 있었고, 그는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그가 차지했던 제국은 손혜민과 엄민용의 손에 넘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를 조롱하며 웃고 있었다.
엄모순은 그들에게 손을 뻗으며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안 돼!"
그 뒤로 AB화학 직원들의 집단 비웃음이 울려퍼졌다.
돼지는 아침부터 ‘꿀꿀꿀꿀’ 밥달라고 ‘꿀꿀꿀꿀’
엄모순은 숨을 헐떡이며 깨어났다. 땀이 그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꿈이었지만, 그 악몽은 그에게 너무나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것은 그가 곧 마주하게 될 현실이었다. 순간 오민형의 맨살이 그의 맨살과 순간 맞닿고 번개같은 불꽃이 일어나는 듯 했지만, 오민형은 이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아랑곳하지 않은채 옆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엄모순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의 야경은 여전히 화려했지만, 그 속에서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끝나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벌거벗은 채로 통창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과도 같았다. 손혜민과 엄민용의 그림자가 점점 더 그의 발밑을 잠식해 가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저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고요함이었다.
엄모순은 긴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에 펼쳐진 서류들을 노려보았다. 그에게 남은 것은 이제 얼마 되지 않았다. 그의 권력은 조각조각 부서지고 있었고, 자신의 제국이라 믿었던 AB 그룹은 점점 그의 손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몇 주 전만 해도 그는 자신이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 승리의 가능성이 거의 사라졌음을 직감했다.
'이게 끝일까?'
엄모순은 자문했지만,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혼란스럽게 돌아갔다. 배신당한 기분, 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기 싫은 자존심이 그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게임은 이미 끝을 향해 가고 있었고, 승자는 그가 아닐 가능성이 컸다.
그날 저녁, 엄모순은 마지막으로 남은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는 여전히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의 적들은 너무도 가까이에 있었다. 손혜민과 엄민용이 그의 등을 찌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그가 아직 끝난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엄모순은 임원들과의 비밀 회동을 소집했다. 이 회동이 그의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룹 내에서 그를 아직 지지하는 몇몇 충성파들이 있었다. 그들만이 지금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신뢰할 만한 임원들이 속속 도착했다. 그들은 모두 말없이 자리에 앉았고, 분위기는 무겁고 팽팽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지만, 엄모순의 눈에는 그들이 여전히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는 희미한 기대가 남아 있었다.
"우린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엄모순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강렬했다.
"손혜민과 엄민용이 우리를 배신하려 하고 있어요. 그들은 이 그룹을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저항하지 않으면, AB 그룹은 그들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말 겁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임원들의 반응은 미미했다. 그들의 표정에는 확신보다는 의심이 더 강하게 배어 있었다. 손혜민과 엄민용이 이미 많은 임원을 포섭했고, 그들에게는 엄모순보다 더 많은 이익을 약속했다는 소문은 그룹 내에서 공공연히 떠돌고 있었다. 이 회의가 열리기 전에도 이미 많은 이들이 그 배신에 가담했음을 엄모순은 알 수 있었다.
김인혁 상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장님, 저희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매우 어렵습니다. 손혜민 씨와 엄민용 부회장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외부 자본도 이미 그들의 편에 섰습니다."
엄모순은 김인혁상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래서 우리가 포기해야 한다는 겁니까?"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속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을 걸고 싸워야 합니다. 내가 이 그룹을 지켜왔듯이, 우리 모두가 함께 이 위기를 넘겨야만 해요. 손혜민이 이끄는 그룹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회의실 안에 있는 임원들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그들 대부분은 이미 손혜민과 엄민용에게 마음을 돌린 상태였다. 아무도 노골적으로 반대의 목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엄모순에게서 멀어져 있었다.
한편 며칠 전, 부장A는 오랜 지인인 부장AA에게서 은밀한 전화를 받았었다. 부장AA는 AB건설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인물로, 회사 내부의 비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가 전화를 걸어온 이유는 바로 최근 붕괴된 신도시 아파트, 일명 '순살 베르 AB' 아파트에 얽힌 비자금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부장AA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 후,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회사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비리와 부정에 대해 폭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부장AA는 부장A에게 말했다.
"A부장, 회사가 아주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어. 엄민용이 건설 자재 계약을 조작해 엄청난 비자금을 빼돌리고 있었어. 순살 베르 AB 아파트의 붕괴 사건은 그저 시작일 뿐이야."
부장A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그 붕괴 사건이 단순한 시공 부실이 아니라 비자금과 연관되어 있다는 거야?"
"그렇다니까. 나는 그 모든 자료를 확인했어. 소나무부터 콘크리트, 철근까지 모든 자재가 말도 안 되는 금액으로 부풀려졌고, 그 차액이 엄민용의 비밀 계좌로 흘러 들어갔지. 그는 이 비자금을 이용해 정치인들과 뒷거래를 하고, 그룹 내 자신의 입지를 더욱 강화하려고 했어."
부장A는 이 정보를 듣고 나서, 즉시 부장AA와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며칠 후, 을지로의 한 와인바에서 부장A와 부장AA는 은밀히 만났다. 와인 한 잔을 나누며 부장AA는 자신이 가진 자료들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엄민용 부회장이 주도한 모든 비자금 조성 과정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부장AA는 서류를 펼치며 설명했다.
"이것봐봐. 이 소나무, 조경용으로 구매한 것인데, 실제 가격은 2천만 원짜리야. 그런데 장부에는 2억 원으로 적혀 있지? 이 차액이 바로 비자금으로 전환된 거야"
부장A는 그 서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게 실제로 가능하다는 거야? 이렇게 많은 돈을 부풀려 비자금을 조성하다니."
부장AA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나무뿐만이 아니야. 철근, 콘크리트, 배관 자재, 심지어 조경용 돌, 조갈, 꽃까지. 모든 건설 자재들이 특히 조경 자재들이 부풀려져 있었고, 그 차액은 모두 엄민용 부회장에게로 흘러들어갔어."
부장A는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건 말도 안 돼. 이 모든 게 계획된 일이었다는 거군. 순살 아파트 붕괴 사건이 단순한 시공 부실이 아니라, 그들의 비리로 인해 일어난 참사였어."
부장AA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지 난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어. 이 모든 진실은 폭로되어야 해."
며칠 전, 부장A는 순살 베르 AB 아파트 붕괴 현장에서 숨진 인부의 아들로부터 또다른 낯선 전화 한 통을 받았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자신을 변동준이라고 소개했다. 변동준은 AB건설 현장 인부의 아들이자 붕괴 사건 당시 아버지를 잃은 이였다.
"부장님,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변동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절실함이 묻어 있었다.
"누구신지?" 부장A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는 AB건설에서 일하시던 인부의 아들입니다. 순살 베르 AB 아파트 붕괴 사건에서 아버지를 잃었죠. 중요한 얘기가 있습니다. 제 아버지와 관련된 일입니다. 시간이 된다면 꼭 만나 뵙고 싶습니다."
부장A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를 만나보기로 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뭔가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담겨 있었고, 그 이야기는 부장A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며칠 후, 을지로의 한 카페에서 부장A는 변동준과 만났다. 변동준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고된 삶을 살아온 흔적이 얼굴에 묻어 있었다. 그는 단정한 옷차림으로 나타나 부장A 앞에 앉았다. 카페의 소음 속에서 변동준은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희 아버지는 AB건설에서 20년 넘게 일하셨습니다.
그러나 몇 달 전, 그분은 순살 베르 AB 아파트 붕괴 사고로 목숨을 잃었죠."
변동준의 눈에는 고통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부장A는 그를 지켜보며 조용히 물었다.
"이 일을 어떻게 알게 되었죠?"
"사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중요한 서류를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AB건설의 부실 시공 문제를 알게 되었고, 그에 대해 경고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상부의 지시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죠. 아버지는 불안해하셨습니다. 결국 그 불안이 현실이 되었죠."
변동준은 주머니에서 낡은 서류 몇 장을 꺼내 부장A에게 건넸다. 그것은 붕괴된 지하 주차장과 관련된 시공 내역서와 자재 구매 명세서였다. 그 명세서에는 철근과 콘크리트의 가격이 터무니없이 부풀려져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부실 시공이 아니었습니다. 비자금을 조성하기 위해 자재 가격을 부풀린 것이죠.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남긴 자료 속에는 엄민용 부회장이 이 모든 비리의 중심에 있다는 메모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변동준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는 아버지가 자신의 직업 때문에 희생되었음을 분노하며 털어놓았다.
부장A는 서류를 꼼꼼히 살펴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엄청난 증거군. 이런 자료가 있었다니."
변동준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아버지뿐만 아니라, 순살 베르 AB 아파트에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수많은 인부들이 이 비리의 희생자입니다. 이걸 세상에 알리고 싶습니다. 진실을 밝히고, 제 아버지를 포함해 희생된 모든 분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습니다."
부장A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변동준이 가져온 증거의 무게를 느끼며, 그것이 단순한 붕괴 사건을 넘어서는, 그룹 전체의 부패를 폭로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열쇠임을 깨달았다.
그날 밤, 엄모순은 호텔 스위트룸에 혼자 앉아있었다. 그가 머물던 곳은 그가 오랫동안 자주 찾던 고급 호텔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공간은 그에게 위안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이 고요한 방에서 압도적인 고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주위는 적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자신이 믿었던 사람들마저 그를 배신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찬란했지만, 그 불빛 속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엄모순은 이제 홀로 싸워야 했다. 그의 세력은 이미 와해되었고, 그를 믿었던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그가 남긴 유일한 것, 그가 쥐고 있던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끝날 수는 없어…" 엄모순은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공허했다. 그의 말은 그저 희망에 불과했다.
그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엄모순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문이 열리고 나타난 사람은 바로 손혜민이었다. 그녀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엄모순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여기까지 오셨군." 엄모순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깊은 분노가 담겨 있었다.
손혜민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앉았다.
"이제 게임은 끝났어요, 회장님?"
그녀의 말은 마치 이미 승리를 확정지은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회장님이란 호칭도 조롱이 뒤섞인 냉소의 절정일 뿐이었다.
"당신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
엄모순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네가 이 모든 걸 계획한 거냐..."
손혜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렇지. 아니 그렇다고 해 두지. 그래 내가 계획했어. 하지만 이건 단순히 내 계획뿐만이 아니야. 당신의 모래 제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무너져 가고 있었어. 당신이 보지 못했던 것 뿐이야."
엄모순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 쌓아온 권력, 그 모든 것이 이제 손혜민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날 밤, 엄모순은 깊은 절망 속에서 마지막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제 그가 지켜온 제국은 그의 손을 떠나는 듯 했고, 더 이상 되돌릴 방법은 없는 듯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단지 몰락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뿐인 것 같았다.
"모든 게 끝났군…" 엄모순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권력을 지닌 회장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몰락을 눈앞에서 목도하는 한 남자의 것이었다.
엄모순은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피곤함에 지쳐 있었고,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피로는 단순히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며칠 동안 연이어 밀려오는 문제들로 인해 정신적으로도 지쳐 있었다. AB 그룹 내에서의 권력 싸움, 손혜민과 엄민용의 배신, 그리고 자신을 계속해서 짓누르는 내부 갈등들까지. 그 모든 것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때, 침대 옆에서 오민형이 탄탄한 몸매를 자랑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움직임은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차가운 결단과 집요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엄모순의 옆에 앉아 침대 시트를 살짝 당기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단순한 부드러움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한 눈빛이 담겨 있었다.
"모순 씨, 이제 그만 결단을 내릴 때가 되지 않았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담긴 야망은 날카로웠다. 엄모순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결단이라니, 대체 무슨 말이야?" 그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그녀의 질문을 회피하려 했다.
그러나 오민형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그의 옆으로 다가가 몸을 기대었다. 그녀의 손은 엄모순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그에게 다정하게 속삭였다. "우리 친아를 AB 그룹 가계도에 넣어주세요. 이제 더는 미룰 수 없…"
엄모순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이미 여러 번 이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계속해서 미뤄왔다. 자신의 첩과 그 딸을 가계도에 넣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너무나 큰 정치적, 사회적 부담이었다. 그러나 오민형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집요하게 이 문제를 다시 꺼냈다.
"민형아, 그건… 지금은 좀… 복잡한 문제야." 엄모순은 말끝을 흐리며 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오민형은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그녀는 갑작스레 목소리를 높이며 엄모순의 팔을 붙잡았다.
"우리 딸이 겪고 있는 고통을 생각해 보라구! 손혜민의 둘째딸 엄현아가 어떻게 우리 친아를 모욕했는지 기억안나?"
엄모순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그날 있었던 사건을 잊지 않고 있었다.
몇 주 전, 손혜민의 딸 엄현아가 가족 모임에서 엄친아를 잔인하게 모욕한 일이 있었다. 그녀는 엄친아의 긴 생머리를 거칠게 부여잡고 바닥에 내팽개치며 외쳤었다.
"넌 첩의 딸이잖아! 우리랑 어울릴 자격도 없어.
구더기 주제에 감히 어디서 입을 놀려!
니 할머니도 첩이라며?
첩도 유전인가보지?"
그 장면을 목격한 가족들은 침묵했지만, 그 침묵이 엄친아에게는 더 큰 모욕이었다.
그 날 이후로 엄친아는 더 이상 가족 모임에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자존심은 산산조각 났고, 오민형은 그 날의 분노와 상처를 아직도 품고 있었다.
"이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오민형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친아가 엄현아에게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이유가 뭘까? 그 아이가 가계도에 올라있지 않아서야. 당신이 결단을 내려줘야만 이 상황이 바뀔 수 있다고!."
엄모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동안 계속해서 이 문제를 미뤄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오민형의 요구는 더 이상 단순한 부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절박함이었고, 엄모순을 향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당신,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우리 딸은 당신의 딸이 될 수 없는 거지? 왜 아직도 친아는 외면받아야 하는거냐구?"
그녀의 목소리는 격정적으로 떨렸다.
엄모순은 대답하지 못한 채 침묵했다. 사랑을 약속했고, 그녀에게 모든 것을 주겠다고 약속 했었다. 하지만 그건 젊고 야망에 가득찬 생기발랄하고 새롭고도 신선한 젊은 오민형을 품기 위한 욕정에 불과했다. 막상 그 약속을 지키기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오민형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돌려 엄모순의 무릎에 올라타며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녀의 눈은 번들거렸고, 그 안에 가득 찬 욕망은 이제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손은 어느 덧 엄모순의 허벅지를 타고 오르고 있었다.
"엄모순, 우린 오늘 밤에도 이렇게 함께 있잖아. 그럼 내 딸도 당신의 딸로 만들어줘야지. 그녀가 당신의 딸이라는 걸 만천하에 보여줘요."
그녀는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키스했다. 그러나 그 키스는 애정이 아닌, 집착과 욕망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엄모순은 오민형의 몸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녀의 팔은 그의 목을 더욱 단단히 감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를 점점 더 짓눌렀다.
"엄모순, 이제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어. 나도 더는 참을 수 없어." 그녀는 그에게 전신을 밀착시키며 속삭였다.
"친아를 가계도에 올려놔. 그게 당신이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보상이야."
엄모순은 그녀의 집요한 요구에 더 이상 저항할 힘을 잃었다. 그녀의 요구는 단지 사랑이 아닌, 권력을 함께 나누겠다는 암묵적인 약속이기도 했다. 엄모순은 비틀거리듯이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알겠어. 그 애를 가계도에 넣을게…"
오민형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그가 끝내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았다.
"잘했어요, 모순 씨. 이게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에요."
그녀는 만족스럽게 그의 몸 위로 그녀의 몸을 그대로 포개고 하나의 빈틈도 없이 완벽히 밀착했다. 두 남녀의 실오라기 하나 없는 두 몸이 온전히 폴더폰 처럼 포개졌다. 하지만 엄모순은 그 자리에서 몸을 떨었다. 이 순간,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과 남은 것들을 천천히 되새겼다. 첩의 딸을 가계도에 넣는다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위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명예와 권력의 큰 부분을 넘겨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날 밤, 엄모순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관계 후 그의 옆에서 잠든 오민형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그 안에 숨겨진 권력의 야망은 이제 막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엄모순과 오민형,
손혜민과 엄민용,
부장A와 김준호 그리고 임원B, C, D 각자의 삶이
절묘하게 교차하는 묘한 가을밤이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