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문 두 개 사이에
나는 매일 끼어 삽니다.
현관문은 쾅,
방문은 탁,
아이의 하루는 두 번 닫히고,
그 사이에 떠 있는 말들은
대부분 삼켜진 채로 지나갑니다.
나의 아이는
학교로 향하면서 인사를 두고 가지 않고,
돌아오는 길에도
발뒤꿈치로만 존재를 알립니다.
내 쪽으로 향해야 할 눈길은
휴대폰에 박혀 있고,
이어폰으로
온 세상을 막아 버린 아이.
해야 할 일들은
언제나 ‘나중에’라는 시간 창고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미뤄져 있습니다.
와이프는 당분간
파충류로 생각하라 다독이지만,
가슴 어딘가에서
조용히 쓴물이 돕니다.
몸과 마음이 동시에 지치는 날이면
살면서 큰 일이 갑자기 밀려오면,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오릅니다.
아버지를 그리워한다고
자주 말해 본 적은 없습니다.
누군가 묻지 않으면
먼저 꺼내지도 않았던 이름입니다.
그런데 어느 밤,
아이 방 문 앞에 멈춰선 채
들어갈까 말까
손잡이만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깨닫습니다.
아버지도
이렇게 서 계셨겠구나.
닫힌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내 사춘기의 숨소리를
한참 동안 들으셨겠구나.
그 아이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눈이
이제야 조금 보입니다.
사춘기 아이의 방 문 앞,
그리고
사춘기였던 나의 방문 앞,
시간은 다른 계절을 살았지만
부모의 마음은
같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닫힌 문 앞에
끝까지 서 있는 사람의 뒷모습,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느린 숨들입니다.
문득,
아버지의 침묵을 떠올립니다.
그 침묵은 포기가 아니라
애써 삼킨 말들의 무덤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습니다.
부모라는 존재는 가능하다면
오래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철드는 속도는 너무 느려서,
마음이 이해에 다다를 때쯤이면
손을 잡아 줄 사람이
이미 저편으로 건너가 있는 경우가 너무 많으니까요.
그리고 나는
조용히 나 자신에게도 말합니다.
“너도 오래 살아야 한다.”
인사도 하지 않고 나가는 아이,
고맙다는 말을 아끼는 아이,
할 일을 미루고,
쉬운 것부터 도망치는 아이가
언젠가
어느 날 밤,
어떤 벽 앞에 혼자 기대어 서 있다가
문득
오늘의 나를 떠올릴지도 모르니까요.
그때,
아이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아빠’라는 장면이
서운함과 후회만으로 채워지지 않도록,
조금은 이해와 눈물,
조금은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채워질 수 있도록,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끝까지 서 있으려 합니다.
닫힌 문 앞에서,
인사 없는 출입문 앞에서,
대답 없는 무표정 앞에서조차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한 번도 완전히 등을 돌리지 않는
어른이 되어 보려 합니다.
문득 세 개의 그림자가 겹쳐 섭니다.
사춘기 아이의 방문 앞에 선 나,
그 옛날 나의 방문 앞에 서 있던 아버지,
언젠가 또 다른 문 앞에 설 아이.
서로를 보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서로를 닮아가는 그림자들.
나는 그 겹쳐진 어둠을 바라보며 속으로 말합니다.
이제라도 보게 해 주어서,
이제라도 이해하게 해 주어서,
고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