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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나다 이군 Jan 09. 2021

풍경 風景

풍경 風景 



  "암 이랜다. 글쎄."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음성에는 '암'에 방점이 걸려 있다. "연세가 있으셔서,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구나." 지난 주말 위암 판정을 받으신 큰어머니께서 급기야 입원하셨다는 어머니의 전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정하셨잖아요?" 연초에 큰아버지 상을 치른 후로 부쩍 수척해지시던 큰어머니를 떠올리며, 상복은 기어이 사달이 나신 모양이라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팔십 평생을 부대끼며 살던 남편의 부재가 불러오는 상실감을 짐작 못 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게 말이다. 아무튼, 오늘 저녁에 치료를 중단하고 집으로 갈건 지를 결정한다니까, 병원에 계실 때 한 번 찾아봬야지 않겠니?" "예. 알았어요. 퇴근 후에 찾아뵐게요."


  병문안을 구실삼아 조금 이른 시간에 사무실을 나서자니 비가 쏟아붓기 시작한다. 안사람 말을 들어서 손해 볼 것 없다더니, 상복은 봄장마라며 우산을 챙겨 주던 집사람이 새삼스레 고맙다. 일기예보가 맞는 것 봤느냐며 외면하던 상복의 가방에 한사코 손우산을 밀어 넣던 사람이다.


  광화문에서 일산행 좌석 버스로 갈아탈 작정으로 시내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이른 퇴근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비좁은 틈바구니에서 겨우 우산을 갈무리하자 이내 짜증이 몰려온다. 원행을 좀 편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무리해서 일찍 나선 길인데, 기대는 터무니없이 깨져버렸다. 심지어 버스 안은 땀에 전 끈적한 공기와 화장품 등속의 냄새로 버무려져, 알레르기성 비염의 호흡기를 자극한다.


  "아저씨. 에어컨 좀 틀어주세요." 때마침 안쪽에서 칼칼한 소리가 들려 온다. 상복은 용기있는 젊은이라고 생각하며, 힐끗 어깨너머로 운전기사를 바라본다. 기사가 에어컨을 틀자, 이윽고 퀘퀘한 내음이 밀려가면서 상복의 못마땅한 심기도 다소나마 다스려진다.


  버스는 출발하자마자 끔뻑거리는 건너편 신호등에 터치다운이라도 하려는 듯 무섭게 연남사거리를 가로지른다. 김남천의 소설에서 김지원과 박문경이 그랬듯이 상복 또한 종묘와 창경궁 담길을 따라 울창한 가로수가 올곧게 뻗은 이 길을 데이트 코스로 왕왕 이용했었다. 추측건대 한 세기 가까이 자랐을 이 울창한 나무들은, 더러 과장을 하자면 한여름에도 한 줌의 햇볕조차 인도에 들이지 않을 것 같은 풍경이다.


  '아니야요. 어드러케도 어른 서이서 뺑 둘러서야 한 바퀴 돌만큼 컸드랬시오.' 큰아버지를 보내드린 후로 상복의 아버지와 큰어머니는 부쩍 고향 마을에 대한 대화가 잦았고, 어디를 가든지 커다란 나무만 보이면 당신들의 고향, 쇳골에 있는 아름드리나무를 소재에서 빠뜨리지 않았다. 아무렴 고향에 대한 풍경이라면야 아버지보다는 큰어머니가 정확한 사리로 기억하고 계실 터이지만, 소소한 정황을 놓고도 종종 티격태격하시고들 했다.


  일전에 아버지는 수첩 한 뭉치를 꺼내어 들고는 손주들 마저 멀리한 채 나즈막이 상복을 불러 앉히신 적이 있다. "내가 요즘 몸이 영 예전 같지 않다. 기래서 말인데……."라며 수첩에 손수 그리신 쇳골의 약도와 주소를 내미셨다. 종이 맨 위쪽에 그려진 집 모양의 건물 주위를 울타리처럼 과수가 둘러싸고 있었고,  아래쪽에는 텃밭으로 보이는 넓은 공간 우측으로 지렁이처럼 구불텅한 내(川)가 둑방과 나란히 빗겨져 있었다. 그리고 초입으로 보이는 언저리에 언뜻 보기에도 비상식적으로 거대하게 그려진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쇳골을 추억하는 옛 어른들은 사방 십리에서도 이 나무를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하니,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크긴 컸던 모양이다.


  "그때가 언젠데 아직 그대로 남아 있을라구요?" "고넘들 여기처럼 빌딩 짓고 도로 파고 할 돈이 없어 고대로 남겨뒀을지도 모를 일이지!" "그래서 그 땅을 찾으시게요?" "그리할 수만 있다면 해야지 안카서?" "그쪽은 땅을 전부 몰수해서 국유화했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을 거예요." "통일이 되면 다르갔지."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통일의 방식마저 이미 정해진 모양이었다.


  물론 전답이나 집문서 따위를 지니고 월남했을 리는 만무했다. 남한의 정부 수립 소식에 이어 이북마저 그럴 기미가 보이자, 고을 유지쯤 행세하던 상복의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는 예상되는 고초를 피해 먼저 이남으로 내려오셨다. 아버지와 큰어머니는 일사후퇴 때 돌아가신 할머니도 제대로 모시지도 못한 채 집을 나서게 되었는데, 온갖 값나가는 물건과 문서들은 독에 담아 뒤꼍에 아주 잘 묻어두고 내려오셨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는 아무 소용없는 일이라는 상복의 말에 아버지는 "기렇더라도 알구는 있어얄 것 아니가? 나중에 늬들 끼리 가 보기라도 할라면 어케 찾갔니?"라며 역정을 내시면서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러고는 아버지 자신이 상복의 딸 만한 시절, 내처 뛰어놀던 사과나무, 앵두나무 밭으로 들어가 종일토록 나오지 않으셨다.


  사실 쇳골의 이야기라면 상복 역시 워낙 어려서부터 못이 박히게 들어오던 터라, 눈감으면 아름드리 느티나무며 실개천의 쇳골 풍경이 펼쳐지는데 어렵지 않다고 느꼈었다. 학창시절 사회과부도를 받으면 아버지가 원족 나갔다던 구월산과 물놀이 갔다던 장산곶 사이 어디메쯤일 쇳골을 손가락으로 짚어 보곤 했고, 누군가가 고향이라도 물으면 이유 없는 자신감으로 황해도라고 대답했었다. 어쨌거나 이제는 두 분의 기억 속에서나 존재할 뿐이지만.    




  '끄어억' 야트막한 오르막을 향하던 버스가 급하게 변속하면서 종묘와 창경궁을 잇는 시멘트 가교 아래로 들어선다. 이 길이 어떤 길인 줄 알아? 나쁜 자식들. 어떻게 남의 나라 정기를 자른다고 궁궐을 토막 내어 길을 내고, 그것도 모자라 동물원으로 만들어 버릴 수가 있지? 아이러니하게도 십만 양병설을 주창한 율곡의 이름을 딴 이 길을 지날 때마다 젊은 시절의 상복은 비분강개하곤 했다. 그나마 지금은 소나무로 바꾸어 놓았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봄이면 사쿠라 꽃이 만발했었다.


  상복 자신도 어렸을 적에 창경원으로 불리던 이곳에서 벚꽃구경과 비행기 모형의 놀이기구를 탔던 기억이 있다. 밤벚꽂을 보며 '차암 곱구나. 곱다.'를 연발하는 큰어머니의 감탄사까지 상복의 기억엔 살아있다. 드물 수밖에 없었던 밤 나들이에 상기되어 세상모르고 재잘거리는 상복에게 하신 큰어머니의 꾸지람도 기억한다. "밥 꺼진다. 조용히 하라우."    


  아들 없이 딸만 넷을 둔 큰어머니 덕분에 상복은 아버지를 따라 집안 대소사뿐만 아니라 나들이에도 빠짐없이 불려다니는 형편이었다. 그럴 때마다 큰어머니는 '우리 아들 왔나?'라며 반기셨다. 큰어머니는 할머니를 대신하여 아버지를 건사했기에, 아들처럼 키운 막내 시동생과 조카 모두를 당신의 아들로 삼아 버리신 까닭이다.  


  그래서였을까 큰어머니는 틈만 나면 아버지의 코흘리개 시절 형상을 기억에서 꺼내어 상복 앞에 늘어놓으시곤 했다. "내가 황해도 신천에서 쇳골 한산 이씨 집안으로 시집와서 보니 상판때기는 시커먼 고거이 요만해 가지구 눈만 뜅굴다만데 천방지축하는 꼬락서니가 꼭 동네 가이사끼 같지 안카서? 늬 아바지가 내 치맛자락 꽁무니 붙들고 쫓아다니고 그랬드랬지."


  버스가 종로서 앞 정류장에 멈춰 선다. 뒷문이 열린 지 한참, 이제 닫힐 때가 되었다고 생각될 무렵 상복 앞에 앉아서 졸고 있던 아주머니가 비좁은 틈을 헤치며 부리나케 뛰어내린다. 상복은 금방 내릴 처지였기에 자리를 비워 둔 채 그냥 서 있기로 한다. 옆에서 눈치를 살피던 젊은 여자가 머쓱해하며 자리를 채우는 동안, 상복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안주머니의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는다.


  엠피스리의 재생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목소리의 외국인이 토익 영어회화 중급을 낭독한다. '영어는 무슨…….' 상복은 엠피스리 화면을 열어 음악 폴더로 이동하려고 애를 쓴다. 상복은 얼리 어댑터가 아니다. 모든 상품은 안정된 기술력과 성능이 보장된 이후에 구입하는 부류에 속한다. 그 얘긴 곧 기계에 익숙지 않을 뿐 아니라 변화에도 익숙지 않을 나이가 되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순간, 기우뚱하는 참에 눈을 들어 앞을 살피니 버스는 막 풍문여고를 지나 직진 차선으로 접어들고 있다. 건너편으로 한국일보 자리에는 도심환경 정비사업이라며 공사 중이다. 멀찌감치 걸려 있는 조감도를 보니 십구 세기 이씨조선의 정궁 앞에 이십일 세기형 인텔리젠트 빌딩이 들어서는 모양인데, 상복은 어쩌면 사이좋지 않은 시어머니와 새파란 며느리가 마주 앉은 꼴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 사이 버스는 섬처럼 길 한가운데에 떠있는 동십자각을 지나친다.


  동십자각 앞에서는 늘 그랬던 것처럼 가슴 한켠이 울렁거리는 꼴이 이번에도 상복은 삼청동의 소회를 피해갈 수 없는 모양이다. 삼청동에는 상복의 사무실이 있었다. 멀쩡하게 다니던 첫 직장은 아이엠에프와 적대적 엠엔에이로 위태로워지면서 모든 직원에게 일괄사표를 요구했었다. 그에 반발해 회사를 뛰쳐나와 벤처 사업을 도모하던 중에 H 일보 B 차장을 만나게 되었다.


  B 차장은 삼청공원 못 미처 감사원으로 오르는 삼거리, 카페 '목신의 오후'가 있는 건물 꼭대기 층 사무실 열쇠를 건네주며 말했었다. '내가 자네들에게 커피 한 잔 얻어먹었나? 사무실도 못 구했다니, 젊은 친구들이 기특해 보여 내가 나서는 것이니까 부담 갖지 말고 사용하도록 해.'


  사무실을 빌려준다, 투자자를 소개한다는 등 내쳐 치달리는 통에 물정 모르고 휘둘리던 상복이 그 소용돌이를 빠져나오는 데는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물어야만 했다. B 차장의 소개로 만난 오 사장은 의욕적으로 일을 벌여놓았지만, 영락없는 핫바지라 사업은커녕 제 한 몸조차 처신하지 못한 채 종적을 감춰버리고 말았고, 결국, 풍비박산이 난 뒷감당을 상복 혼자 치러내야 했으니 말이다.


  유난히도 장마가 길었던 그해 여름, 삼청동에 대한 상복의 이미지는 암담한 심정으로 창을 통해 바라보던 인왕산의 기억으로 고정되어 있다. 하지만 '서울은 역시 사대문 안이 진짜야'라고 할 만큼 상복은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았던 육백 년, 수도 서울의 깊이를 삼청동에서 맛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 원치 않았던 시간이 오히려 겸재의 풍류를 느낄 수 있었던 썩 괜찮은 기회비용이었다고 속 좋게 떠벌리곤 했다.


  그런 면에서 이곳이 울긋불긋한 젊음의 거리로 주목받는 작금의 변화에 대한 상복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어쩌면 상복은 자신만의 인왕제색도에 낯선 이가 발도장을 찍고 다니는 것 같다고 느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상복도 알고 있다.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다만 그리운 것들은 자신의 기억 속에서 변하지 않고 남아 있으면 될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상복이다.


  버스는 가림막을 뒤집어쓴 광화문 앞에서 좌회전 신호를 받았다. 상복은 삼청동 시절 이래로 경복궁과 청와대,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지는 삼각산의 위세를 등에 업은 광화문 앞에 서면, 감히 한양에 입성한 태조의 감흥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그 어느 도시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이러한 굉장한 풍광의 시발점인 광화문을 뜯고 있다. 워낙 높은 가림막을 쳐놓아서 얼마나 뜯은 건지, 아니면 다시 붙이고 있는 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원래 모양대로 복구하기 위한 작업이란다.


  원래 모양이 어떤 모양이지? 불현듯 상복은 궁금해진다. 대원군이 개축한 모양이 원래 모양일까? 정도전이 세운 광화문이 원래 모양일까? 먼 훗날의 기억으로는 박정희의 광화문도 원래 모양 중의 하나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니 조선총독부나 중앙청도 원래의 자리를 찾고 있을지 모를 일이라 생각한다. 아무렴, 허튼 생각이다.


  광화문 앞 세종로, 옛 육조거리 또한 광장을 조성한다며 땅까지 파헤치고 있다. 서울은 곧 새로운 광장과 공원으로 넘쳐날 태세인 듯한데, 상복은 결국 변화라는 것이 없어지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상복에게 있어서 광화문은 세종문화회관과 십 차선의 거리가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듯이, 누군가의 기억에서는 원래부터 광장이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버스가 세종문화회관 앞에 정차할 때까지도 음악을 틀지 못한 탓에 엠피스리 단말기는 전원이 켜진 채 안주머니에 처박힌다. 장대비라고 하나? 쏟아지는 빗속에 사람과 우산으로 뒤엉킨 정류장은 진입하는 버스의 노선 번호조차 확인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상복은 우산을 뚫고 들어오겠다는 듯이 퍼붓는 비를 피해 버스승강장 처마 밑으로 파고든다. 벽에 붙은 버스 노선도를 유심히 살펴보던 상복이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늦어도 아홉 시까지는 도착해야 할 텐데'


  귀가하기 위해서 상복은 의왕시까지 기백 리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 처지에 있다. 하지만 그의 초조함은 단순히 거리에 대한 부담 외에도 오늘 중으로 집에 들어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데 원인이 있다. 상복은 결혼과 함께 집사람에게 세 가지를 약속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당일 외출, 당일 귀가였고, 어느덧 몸에 배어버린 습관은 오늘같이 피치 못할 사정 앞에서도 상복을 초조하게 만들곤 한다.  


  십여 분 뒤 구칠공육 번 버스가 도착했다. 상복은 서둘러 버스에 오르면서 '암센터 가죠?'라고 확인한다. 버스 기사는 못 들었는지 원래 성품이 그러한 지  대꾸가 없다. 이미 노선을 확인한 상복 또한 그러거나 말거나 안쪽으로 이동하여 자리를 잡는다. 그러고는 빗물이 흘러내리는 우산을 문틀에 기대 세우고, 창 밖으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좀 전까지 상복이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 다른 우산 속의 시선이 뒤편 버스를 주시하고 있다.


  금세 만원이 되어 버린 버스가 차 문을 닫고 덜컥거리며 출발한다. 상복은 비로소 안주머니의 엠피스리를 꺼내, 찬찬히 음악 폴더를 찾아내어 재생 버튼을 누른다. 이내 '배따라기'의 '비와 찻잔 사이'가 이어폰을 타고 귓바퀴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오래된 노래다. 상복은 왠지 비와 음악과 버스는 잘 맞는 궁합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더욱이 음악은 기억을 통째로 복원시키는 묘한 능력을 지녔음을 새삼 느낀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음악은 듣는 이마다의 감성으로 새롭게 편곡되고, 그리고 듣는 이를 따라 함께 늙는 모양이다.  


  실내등이 켜지기엔 이른 시각. 빗물이 만들어 놓은 무정형의 엠보싱 차창 너머 어둑스름한 공간에 뻘건 브레이크 등이 점묘 되면서 스패터 효과처럼 묘한 실루엣이 그려진다. 그 틈으로 비와 찻잔을 사이에 두고 할 말을 잃어 묵묵히 앉아 있는 어떤 이들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상복은 밑 모르는 심연으로 빨려드는 듯한 자신의 감상이 더러는 나쁘지만은 않다고 스스로 다독인다.


  신호에 걸린 광화문 사거리. 버스는 선 채로 비를 맞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구리 동상 옆에 멎어 있다. 발아래 시민들을 내려다보는 장군의 표정에 사뭇 위엄이 서 있는데, 그 앞에 쌓인 컨테이너조차 위엄스러워 상복의 감상을 끊는다. 고개를 돌리니 오른쪽 길 건너편으로 면세점 건물이 보인다. 예전엔 저기가 극장이었는데, 뭐였더라. 처녀 시절의 어머니는 저기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셨다고 했었다. 그래, 국제극장! 버스가 슬금슬금 나서자 서대문으로 향하는 길이 조금씩 드러난다. 저기에 육교가 있었고……, 육교 밑에 있던 덕수제과 자리엔 뭐가 생겼지? 그 옆에 있었던 아! 박지영 레코드.


  고등학교 시절, 비교적 풍족하게 살던 성욱이와 어울리던 상복은 주말이면 가끔 엘피판을 구입하는 성욱이를 따라 박지영 레코드에 들르곤 했다. 당시 턴테이블 하나 장만하는 게 소원이었던 상복은 점심값, 용돈 등을 아껴 구입 자금을 모으고 있었다. 한 번은 '존 앤 반젤리스'의 '프라이빗 컬렉션'을 구입한 성욱이가 대뜸 상복에게 레코드판을 내밀었다.


  "너도 '폴로네이즈' 좋아한다고 했지?"


  "그렇긴 하지만 '예스' 시절의 존 앤더슨이 더 좋아"


  "이거 네가 가져가서 들어볼래?"


  "어?"


  뜬금없다는 상복의 표정에 개의치 않고 성욱은 말했다.


  "이거 너 주려고 산 거야. 친구 한 명 없는 학교로 배치받고 걱정했는데, 그래도 너를 만나서 덜 힘들었어. 고맙다고 내가 선물하는 거다."


  상복은 턴테이블조차 없는 사정을 모르는 성욱에게 마땅히 사양할 명분도 없어 고마운 양 받아 들었다. 상복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랫동안 같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 녀석의 집에 들렀다. 세운상가에서 조립한 에로이카와 파이오니아 전축을 보유하고 있던 그 녀석에게 상복은 반드시 찾아갈 테니 잠시만 맡아달라며 엘피판을 맡겼었다. 상복은 음악 폴더를 열어서 '폴로네이즈'를 찾는다. 역시 목록에 들어 있다. If you just take my sense of freedom~.

 

  시멘트로 감싼 청계천, 그리고 전경 버스로 둘러싸인 서울광장을 지나면서, 상복은 거리에 촛불을 든 사람들이 늘고 있음을 확인한다. 상복도 잠시 후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 광장에서 각자의 마음에 품은 바람을 외쳐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상복의 어린 딸도 푸른 잔디가 깔린 서울광장을 무척이나 좋아했기에 비록 집에서는 멀어도 가끔씩 주말에 나와 저녁까지 머물곤 했었다. 하지만 이십여 년 전 상복의 어머니께서 그러했듯이 요즘의 이곳은 딸에게는 위험스런 공간이라고 여긴 상복은 광장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다만, 공존과 소통해야 할 광장이 일방적인 외침과 억압만으로 존재하는 갇힌 광장이 되어 버렸다는 푸념만 곱씹을 뿐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항상 자조 섞인 독백이 따라붙는다. '나도 변하는 게지…….'


  상복이 날씨만큼이나 을씨년스러운 감상을 털어버리려는 듯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덕수궁이다. 덕수궁 돌담길에 배어 있는 집사람과의 추억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덕수궁을 끼고 정동으로 향하는 길, 짧은 연애기간이었지만 아마 매일 이 길을 걸었던 듯싶다. 배재고 자리에 만들어진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애써 손잡아 볼 궁리를 하던 기억에서 슬며시 상복의 입가에 미소도 머금어진다. 미국대사관저 앞에서 두 사람의 데이트를 지켜보던 전경들도 모두 전역했을 것에 생각이 미친다. 참으로 넓기도 한 오지랖이다.


  하지만 달리는 버스는 곳곳에 묻어 있는 추억을 보다 먼 곳까지 집중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도심을 빠르게 훑고 지난다. 오래전 고물상의 터전을 몰아내고 우뚝 솟은 대기업의 본관 건물을 지나니, 이내 화상 입은 얼굴을 가린 채 웅크리고 있는 숭례문과 마주한다. 상복은 화재 난 다음 날 새벽, 출근길에 마주한 볼썽사나운 모습의 숭례문을 떠올리며 머리를 가로 젓는다. 아무리 그럴 듯하게 복원을 한대도 이전의 그것은 아닐 터이다.


  성벽조차 잃어버려 몸통만 남은 숭례문을 돌아서자 서울역이란 안내방송이 나온다. 듣기로는 성내로 들어가기 위해 전국의 물자나 인편이 모였던 양동, 그곳에 서울역이 생겼다고 했다. 더러는 서울역이 우리 사회 근대화의 상징이라고 한다는 데, 자생적 능력을 지니고도 스스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맞아들인 근대화를 지금에 와서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일 터, 그래 봐야 불과 백 년 전 얘기다.


  숭례문의 팔다리가 잘리고, 광화문이 해체되었던 백 년의 시간을 생각한다. 어쩌면 상복에게 백 년이란 시간은 그리 먼 과거가 아닐 수 있다. 상복의 할아버지는 일천팔백구십육 년, 그러니까 고종의 아관파천이 있었던 해에 태어나셨다. 언뜻 꽤나 오래 묵은 옛날이야기 같지만, 상복은 열 살 때까지 같이 살았던 분의 시간이라고 반추하면 사실 매우 가깝게 느껴지곤 한다. 상복은 그런 할아버지와 자랐고, 언문이라 칭하셨던 '가갸거겨'를 가르쳐 주신 분도 할아버지였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소금 배가 들어 왔었다는 염천교를 지날 무렵, '띠그르르르' 전화가 왔다. 휴대전화기에 '어무이'라는 문자가 뜬다.


  "애비냐?"


  "예. 큰아들입니다."


  "퇴근했니? 어디니?"


  당신의 관심사항은 꼭 확인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어머니다.


  "예. 병원으로 가고 있어요."


  "그래. 네가 고생 좀 해라. 저녁은 먹었니?"


  또한, 이북 집안으로 시집 온 탓만은 아닐 텐데 모든 사고를 끼니와 연결하신다. 하기야 어머니께는 외박을 해도 끼니만 때웠으면 일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못 먹었어요. 가서 해결하려구요."


  "그래. 끼니 챙겨 먹고, 그리고 네가 잘해야 한다."


  나주 정가인 어머니도 집안의 며느리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서만큼은 큰어머니에게 뒤지지 않는다. 물론 상복도 알고 있다. 동기간에 책잡히지 않는 것이 현명한 며느리의 도리라는 것을.  


  칠패거리를 지난 버스는 홍수라도 나면 그 아래 마을까지 한수가 들어왔다는  애오개 언저리를 돌아 굴레방다리에서 아현동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어린 상복이 듣고 자랐던 출생의 비밀은 이곳에 있었는데, 어머니는 예의 수표교나 광통교가 아닌 굴레방다리 밑에서 상복 남매를 주워 왔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수작의 의미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제는 지명조차 사라져버린 그곳이 대체 어디쯤인지, 알 곳 없는 본향에 대한 그리움 정도는 인지상정이 아닐까.


  반면에 가구점이 몰려 있는 아현동 큰 고개를 넘어서면서부터 상복에게는 오랜 추억이 밀집해 있는 신촌을 향하게 된다. 이대입구를 지나면서 첫머리에 떠오르는 기억은 이대거리와 대흥동을 이어주던 육교다. 이 육교의 계단 밑에는 치마 차림의 여대생이 오르내리는 광경을 훔치던 사춘기의 상복이 있다. 상복이 고등학교 일 학년이던 해에 지하철이 개통되면서 육교는 없어졌다. 지하철은 잠실에서 등교하던 상복에겐 더없이 고마운 문명의 이기였겠지만, 혹시 그보다도 눈앞의 즐거움을 빼앗겼다는 상실감이 더 크지나 않았을까.


  신촌은 또한 상복 어머니의 기억이기도 하다. 일찍이 어머니 또한 비만 오면 질퍽한 신촌로터리에 장화신고 우마차를 끌던 풍경을 말씀하셨다. 홍익문고 뒤편 언덕배기는 모두 호박밭이었고, 백화점 밑으로 흐르는 창천에서 일곱 남동생의 속옷을 빨래하던 이야기는 상복의 머릿속에도 쇳골만큼이나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상복에게 있어서 우마차와 서울에 하나뿐인 정릉행 1번 버스의 풍경은 눈에 닿지 않는 오래된 흑백사진 속의 이미지일 따름이다.


  상복의 기억은 보다 구체적이다. 어릴 적, 양말 춤에 곗돈을 감추고 신촌 외가댁으로 심부름 왔다가, 지금은 복합관으로 변신한 신영극장 앞에서 길 잃은 아이가 된 적도 있었고, 마포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까닭에 새우젓 동네 토박이들과 어울리면서 천이백 원짜리 최고급 돈가스를 먹고 달아나거나, '행랑'이라는 술집에서 마치 '젊은 날의 초상'에 나오는 대학생들처럼 술을 마시며 역사, 문학과 철학을 떠벌리던 치기 어린 시절의 상복도 거기 있다.


  홍익문고를 끼고 우회전하자 좁은 도로는 많은 인파와 밀리는 차량으로 인해 정체되면서 버스의 속도는 급격히 떨어진다. 하지만 버스의 무뎌진 속도조차 무색할 정도로 솟구쳐 오르는 추억의 덩어리 중에서 무엇부터 낚아채야 할지 난감해지는 상복이다. 어디 한 군데 상복의 발때가 묻지 않은 보도블록 한 장 있으랴. 처음으로 브랜드 가방을 구입했던 아디다스 대리점, 목마레코드와 함께 신촌의 음악 분수였던 태림레코드,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대표했던 레드제플린, 첫사랑과의 엇갈린 운명을 연출한 하이델베르그, 성년인 척 폼 잡아야 했던 나이트클럽 하이크라스, 배우지 말라는 지식의 갈증을 풀어주던 오늘의 책과 알서림, 독다방, 그리고 골목골목의 고갈비집, 만미원투쓰리……. 이윽고 상복은 이따위 버스의 속도조차 쫓지 못하는 상념을 포기하기로 한다.


  마침 경의선 기차 한 대가 쿨렁거리며 지나가는 굴다리 어름에서 무심히 창 밖을 헤아리던 상복은 어느덧 익숙한 간판을 살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일심약국, 연우부동산, 의춘당한의원. 그러고 보니 그제나 지금이나 젊은 것들에겐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들만 살아 있다. 아마도 혈기 넘치던 시절의 초상이라고 여기던 상복의 신촌은 그쯤에서 멈춰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들은 없어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상복이다. 그 자리에 새로운 무엇인가가 들어서고 사람들은 새로 와진 그것을 다시 기억하려고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상복의 손에 들린 엠피스리의 커서만이 이동할 방향을 알지 못하고 끔벅이고 있다.


  연대 정문을 바라보고 있던 버스가 승객의 무게중심을 오른쪽으로 거칠게 몰아붙이고 나서 '끄이익 컥' 기어변속과 함께 속력을 높인다. 큰아버지를 모신 영구차가 세브란스 영안실을 나서 연희교차로에 접어들 때쯤, 큰어머니는 서소문으로 나온 송장이 지나가는 길이라서 예전에는 이 길을 '송장고개'라고 불렀다고 하셨었다. 그 당시 상복은 자신이 기억하는 대학가의 활기찬 이미지와 큰어머니의 '송장고개'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사람마다 기억하는 방식은 가지가지라고 생각했었다. 상복은 어차피 기억은 개인적인 경험의 재구성이 아니겠느냐며 앉은 자세를 고쳐 잡는데, 녹음기 속의 안내양이 다음 정류장은 '구 성산회관' 앞이라고 친절하게 안내한다. 지금은 성산회관이 없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한낱 주관에 불과한 기억도 어떤 실체를 구성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불현듯 실재하지 않고도 존재하는 것들의 힘의 원천이 궁금해지는 상복이다. 아무튼, 그때까지만 해도 정정하셨는데…….

 

  졸음이 몰려온다 싶었는데 얼핏 눈을 떠보니 이미 화정을 지나 대곡역 옆을 달리고 있다. 곧 일산으로 들어설 것이다. 모래내는 아예 기억에 없고, 항공대쯤에서 얼핏 눈을 떴던 것도 같은데 벌써 일산이다. 이정표의 원당-구파발이라는 글자가 헤드라이트 불빛에 묻어 튀어나올 듯이 하얗게 돋보인다.


  그러고 보니 상복에게도 쇳골과 같은 풍경의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구파발을 지나 삼송리를 거치면, 원당에 못 미쳐 가시골이란 곳에서 년 반을 보낸 적이 있다. 열 살 박이 상복에게 지천으로 깔린 풀 이름 하나 모르는 서울 깍정이 신세를 벗어날 수 있게 해 준 경험이 가시골에서 있었다.


  흙냄새를 맡으면 되살아난다 하여 집으로 향하는 아카시아 나무에 줄줄이 걸려 있던 뱀. 예비군 참호 안에서 알을 품고 있던 까투리의 공격에 놀랐던 기억. 메기, 소리개, 송사리, 맹꽁이 등속의 온갖 생물이름을 배워 익힌 것도 이때였다. 뿐이던가 물 댄 논에 얼음이 얼면 지치던 썰매와 정월 대보름의 쥐불놀이까지도.


  그때까지만 해도 원당, 일산이란 곳은 서울에서 무지하게 멀고, 또 이북에 가까운 위험한 동네였다. 가시골에도 매일 아침이면 서리 내리듯 삐라가 뿌려져 있었고, 주워서 학교나 경찰서에 가져가면 포상으로 공책 한 권씩 받았으니 더 북쪽이야 오죽했겠느냐는 생각도 들었다.


  원당으로 향하는 356번 국도에서 자드락길을 따라 양계장을 치던 집까지 들어가려면 절반쯤 거리에 수종은 기억나지 않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있었다. 이 나무는 덩치만이 아니라 잎도 무성했던 까닭에 외가댁에라도 다녀오는 밤길이면, 스스럭거리는 잔바람 소리에도 상복은 뒷꼭지를 댕겨가며 지나쳐야만 했다. 그 옆에 듬성듬성 자리한 몇 기의 묏자리를 지나면, 텃밭 언저리를 따라 흐르는 실개천과 나란히 늘어선 아카시아 둑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쯤 와서 잡다한 수목들에 둘러싸인 양계장이 바라다보이면, 상복은 그제서야 마음을 놓게 되곤 했었다.


  그런데 문득 무엇인가 이상하다. 꼭 자신의 기억에서만이 아니라 어디선가 많이 익숙한 풍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곧바로 아버지 수첩의 약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상복은 가만히 기억 속의 밑그림을 아버지 수첩의 쇳골과 겹쳐본다. 상복의 뇌리 속의 쇳골은 가시골과 오버랩되고 있었다. 쇳골의 이미지가 상복에게 낯설지 않았던 이유, 마치 손에 잡힐 것 같이 느껴졌던 풍경의 비밀이 예 있었다고 깨닫는다.


  그렇구나. 할아버지가 드릴사위로 들어가 훈장 노릇에 구장(區長)까지 하셨다던 쇳골이 상복에겐 가시골로 형상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쯤에서 또 다른 의문이 가지를 친다. 자신이야 개인적인 경험에 상상이 투영된 연상 작용이라고 치부한다지만, 그렇다면 아버지의 기억은 어떻게 된 것일까? 사실 관계가 우연히 일치하는 현상이 아니라면 아버지의 기억은 어딘가 왜곡되거나 첨삭되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얼마 전 아이들을 데리고 들렀던 가시골에서 상복은 기억 속의 가시골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쯤에 개천이 있었는데……, 여기에 나무가 있어야 하는데.' 그토록 명징적이었던 풍경에 대한 기억이 실체 앞에서는 실개천도 나무도 아귀가 맞지 않았다. 이미 서울 근교에까지 번진 개발바람을 그곳이라고 피해갈 수는 없던 탓도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상복의 기억 속의 풍경과 현실은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다. 결국, 상복은 자신의 기억에 오류가 있음을 인정하고, 다시는 가시골을 현실에서 확인하려 들지 않았었다.

 

  우산을 받쳐 들고 암센터 병동을 향해 걸으며 집사람에게 전화를 했다.


  "도착했어요."


  "그런데 당신 거기서 어떻게 올 거예요?"


  집사람의 관심은 오로지 귀가에 있다.


  "그러게. 어떻게 가야 할지……."


  "그러면 여보, 기동이가 지금 일산에 있다거든요? 기동이한테 전화해서 같이 와요. 알았죠?"


  기동이는 수입자동차 세일즈를 하는 처남이다. 처남은 근래에 일산영업소로 옮기느니 마느니 하더니 그예 이쪽으로 옮겼나 보다. 집사람은 그새 처남에게 연락해서 위치를 파악하고, 매형의 안전하고 조속한 귀가를 부탁했으려니. 상복은 아무래도 집사람 없이는 살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안내데스크에서 홍정자 씨의 병실을 묻는다. 내일 퇴원하시기 위해 조금전에 중환자실에서는 나오셨단다. 병실을 찾아가니 문 앞에서 환갑을 넘긴 사촌 매형이 반긴다. "처남 왔나? 많이 막히지?" "괜찮았어요. 그런데 내일 퇴원하신다구요?" "더 이상 병원에 계실 이유가 없다는구나. 그래서 어렵지만 그렇게 하기로 누나들하고 결정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병명을 모르고 계시니 혹시라도 실수하면 안된다." 상복 역시 손 쓸 방법이 없다면 오히려 모르고 계시는 게 약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거이 문구 아니가?" 많이 순화되었다고는 해도 고칠 수 없는 혹은 고쳐지지 않는 예의 이북사투리로 큰어머니께서는 상복을 맞아주신다. "엄마. 삼촌이 아니고 상복이야. 상복이 모르겠어?" 누나가 큰어머니의 정신을 가다듬어 준다. "메야? 이젠 늙어서 사람 분간도 오락가락하는구나 야. 고저 늙으면 죽어야 하는 건데……." 머쓱한 순간을 넘기시는 큰어머니의 잔 목소리가 상복의 코끝을 찌른다. "뭐하러 예까지 왔네? 별것도 아닌걸 개지구." "별거 아니긴요, 큰어머니. 위장병은 조심해야 크게 되지 않아요."


  사촌 누나가 큰어머니를 일으켜 앉히면서 상복에게 눈짓 한 번 주고는 매형과 함께 밖으로 나간다. 이내 큰어머니는 상복의 손을 붙잡으며 묻는다. "작은놈도 많이 컸갔구나. 그래 널 많이 닮았지?" "예. 많이 닮았다고들 하네요." 그러다 문득 천정을 바라보시더니 "널 닮았으면 네 아바이하고 꼭 같갔구나." 상복은 모르긴 몰라도 큰아버지 생각을 하시나 보다며 쭈뼛거리고 있는데, 큰어머니는 잠긴 목소리로 혼잣말인 듯 중얼거리신다. "상복아. 통일되거들랑 느그들 쇳골에 꼭 가보라. 마을 초입에 큰 나무가 잇써. 가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라." "무슨 말씀이세요, 큰어머니. 나중에 같이 가서 일러주셔야죠." "그래. 내래 참말로 가보고 싶구만, 쇳골에."


  기어이 큰어머니 눈에 눈물이 차서 흘러 넘친다. 상복은 억척스레 살아오신 큰어머니의 눈물을 처음 본다. 눈물을 붙잡을 힘마저 잃으신 걸까? 아니면 그 어떤 힘으로라도 저 눈물을 잡을 수 없는 것일까? "정말 고왔다. 얼마나 고왔드랬는지……." 상복은 도대체 누가, 아니 무엇이 곱다는 것인지 물색없어하는 데, "내 얘기 좀 들어보라우. 고저, 돌아가신 큰아바이하고 첫날밤을 치르는데 바람벽에 문풍지가 뻥뻥 구멍이 뚫리지 안캈니? 가만히 보니 끼리 거기에 늬 아바이도 들여다보고 있더랬다. 늬 아바이는 완전히 천방지축 날뛰는 가이사끼였댓써." 그제서야 희미하게 웃음이 비치시더니 이내 "그런데 갈 사람은 다 가고 이제 늬 아바이하고 나만 남았는데, 나도 이 모냥이니……." 하신다.


  잠시 후 피곤한 기력이 역력한 큰어머니는 자리에 되누우셨고, 이내 잠이 드셨다. 복도에서 누나와 매형을 기다렸다가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섰다. 매형이 병원 현관까지 따라 나와서는 오래 버티시긴 틀린 것 같다며 깊은 담배를 빨아 마신다.

 

"차 갖고 왔어?"


"아니요. 처남이 근처에 있다고 해서 같이 가려고요."

 

  담배 두 개비 상간으로 처남이 병원에 도착했다. 상복은 다소 주춤해진 빗속을 뛰어 차에 오른다. "밥은 먹었니?" 처남에게 건네는 상복의 멋대가리 없는 첫 마디다. 처남은 자동차를 파는 짓도 밥 심으로 하는 일이라며 퉁 치더니 "매형은 저 아니었으면 어떻게 집에 가시려고 했어요?" 한다. "생각 안 했어. 그냥 왔으니까 어떻게든 가겠지 했지, 뭐." 창 밖, 어둠 속에서는 외곽순환 고속도로변의 산천초목이 시속 백삼십 킬로미터만큼의 속도를 내며 뒤로 내뺀다.


  평촌 나들목을 타고 내려와 인덕원 방향으로 진입하자니 수원 사는 처남에겐 되돌아가는 길이 될 터였다. "돌아갈 길도 먼데, 인덕원 입구에서 내려 줘." "그래도 되겠어요?" "비도 그친 것 같은 데 슬슬 걸어 들어가지 뭐. 난 그 길 걷는 게 좋아."


  인덕원을 돌아 삼호아파트 앞 건널목에서 상복을 내려놓은 처남의 차는 그대로 직진하여 과천-발안 고속도로를 탈 모양이다. 떠나는 차의 꽁무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곧바로 건널목을 건너 마을 초입에 다다른다. 희끄므리한 가로등이 비추는 낡은 건물 벽에는 철거대상임을 알리는 빨간색 페인트의 아라비아 숫자가 발라져 있다. 주변의 현대식 마을과는 달리, 이곳에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 밖에 개와 닭을 내어 기르는 섬 같은 마을이었다.


  작은 내를 건너 돌아서니 가로등조차 없는 어둠 속에서 덩치 큰 미루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예로부터 이 길을 큰 나무 두 그루가 숲처럼 보인다 하여 '이미(林二)길'이라고 한다 했는데, 상복은 그 나무가 그 나무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상복이 이곳으로 이사 온 이유도 어쩌면 저 나무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자, 철거가 시작되기 전에 어서 이곳을 떠야겠다며 조급해했던 마음이 조금은 무뎌짐을 느낀다.


  지난해 작은놈 백일에 오셔서 "저 나무만 했나?" "아녜요. 훨씬 더 컸시오. 고럼." 하시며 여지없이 쇳골 얘기를 꺼내시던 두 분의 모양이 떠오른다. 상복은 자신이 바라보는 이곳의 풍경도 다른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형상화되어 공존하겠거니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멀리 청계산으로부터 날아온 상쾌한 바람에 실려, 인근 구치소의 수하 소리가 들려온다. 자정인가 보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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