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학년을 앞둔 겨울방학. 그날따라 친구가 고팠는지 가을이는 몸을 비비 꼰다. “그럼 친구한테 전화해 봐.” 기다렸다는 듯 친구들에게 전화를 건다. “나 못 놀아 학원 가야 돼.” “학원가는 차 안이야, 안 돼.” 되돌아오는 대답에 실망하는 빛이 역력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친구들은 바쁘다. 가을이도 안다. 친구들에 비해 자신은 여유롭다는 사실을.
학기 중에도 친구들과 놀 수 있는 시간은 날은 5교시하는 날, 친구들이 학원 가기 전까지만 가능하다. 내가 전화하지 않아도 오후 3시 반이면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다. “친구들 학원 갔구나.” “응, 다 영어학원에, 수학학원에 바빠.” “너도 가보는 건 어때?” “싫어 학교공부도 싫은데 학원에서도 하라고?” 가을이는 그렇게 오늘도 혼자서 멍 때리는 시간을 즐긴다.
가을이도 사교육을 안 하는 건 아니다. 미리 귀띔을 하자면 나는 욕심이 많은 엄마다. 의욕이 없는 아이라 안 시키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란 걸 알기에 어느 정도의 강제성은 필요하다. 첫 번째는 운동이다. “건강하지 않으면 네가 좋아하는 것이 생겨도 아무 소용없어. 그러니 너를 위해서 운동은 꼭 해야 해.” 가을이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내가 외친 말이다. 첫 운동은 축구였으나 친구와 경쟁하는 운동은 맞지 않다고 그만뒀다. 그 뒤 시작한 운동은 수영. 다행히 물을 좋아해서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다. 두 번째는 피아노. 어른이 되어서 즐길 취미가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둘러댔다. 하지만 엄마에겐 큰 그림이 있었다. 중·고등학교를 대비하려면 초등학교 때 악기하나쯤은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이 두 가지는 다른 대안 없이는 그만둘 수 없다. 가을이와 나만의 규칙이다. 다른 학습학원은 보내지 않기에 그 규칙을 가을이도 받아들인다.
내 교육의 기준은 아이의 자존감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인 ‘보통’을 목표로 삼았다. (보통: 뛰어나지도 못하지도 않는 중간의 상태. ) 잘하길 바라는 건 엄마의 욕심 같았고 못하는 건 가을이의 자존감형성에 좋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 보통의 기준이 얼마나 방대하고 깊은지 가을이를 키우며 깨달아 가고 있는 중이다.
가을이는 유치원 때 가장 바빴다. 체력은 국력이라며 시작한 첫 사교육은 스포츠 아카데미였다. 5살에 축구, 6살엔 미술학원 추가, 한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지금이 적기라며 학습지가 추가됐다. 7살부터는 생존수영이 기본이라며 수영학원도 다니기 시작했다. 유치원 정규시간이 오후 4시에 끝나면 하루에 한 개의 사교육만 해도 가을이의 스케줄은 오후 6시가 되어야 끝이 났다. 해야 할 건 갈수록 많아졌고 시간은 부족했고 가을이의 체력도 점점 바닥나기 시작했다. 남들 하는 건 중간정도는 시켜야 한다면서 그 욕심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우스갯소리로 유치원엄마들은 얘기했다. “유치원생들이 제일 바빠요. 시킬 게 너무 많아”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그 욕심은 자연스레 움츠러들었다. 학원들이 기나긴 휴업에 들어갔다. 2020년에 1학년이 된 가을이는 5월 26일 되어서야 첫 등교를 했다. 코로나로 인하여 아이들의 학업 수준이 많이 낮아졌다고 방송에서는 연일 떠들어댔다. 열혈엄마인 나는 그 불안증을 잠재우기 위해 교육 유튜브와 교육서적을 뒤지기 시작했다. 공부하고 적용하면서 우리에게 맞는 정보를 선별할 줄 아는 눈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는 만큼 불안감은 줄어들었다. 무엇을 교육의 1순위로 잡을 건지가 중요했다. 유치원 2년의 경험으로 지출할 수 있는 돈과 시간, 아이의 체력은 무한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교육의 1순위는 단연 독서였다. 다양한 경험이나 사람 많은 곳은 갈 수 없는 코로나 상황에서 책만 한 것이 없었다. 내가 경험시켜 줄 수 없는 세계가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공이 되어 그 사람의 마음을 되짚어 보기도 하고 세계 어느 나라든 언제든지 가 볼 수 있다. 우리에게 남아도는 것은 시간밖에 없던 때였다. 아침에 눈을 떠 온라인으로 학교수업을 듣고 기나긴 시간 동안 우리는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났다. 모든 사교육비를 책값에 투자했다. 적지 않은 돈이지만 아깝지 않았다. 책은 가을이에게 다음 책의 안내자 역할까지 톡톡히 해내주었다. 또한 가을이가 읽는 책 제목이나 내용으로 그 시기 아이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아이의 마음을 알아 가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고학년이 되어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들 하지만 여전히 가을이는 습관처럼 책을 읽는다.
2순위는 공부정서다. 공부정서를 망치는 최대 적은 엄마의 잔소리. 최대한 안 하기 위해서는 규칙과 루틴이 답이다. 아이와 상의해 스크린타임 규칙을 정한다. 스크린 타임 제한만으로도 아이의 취미생활은 자연적으로 늘어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하루의 루틴을 위해 계획표를 짠다. 저학년 때는 엄마주도로 짜고 학년이 올라가면 주도적으로 계획표를 짤 수 있도록 엄마는 지켜봐 준다. 스스로 짠 계획은 아무리 어려도 지켜야 함을 본인이 안다. 한 번에 루틴이 잘 안 잡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걸 기본설정 값으로 한다. 그래야 아이에게 화가 덜 난다. 또한 근근이 포기하지 않고 이어나가야 한다. 근근이 이어만 나간다면 오래 걸리더라도 그 습관은 체화된다. 그 안에서 가을이가 느끼는 성취감은 덤이다. 학습학원을 가지 않고 지금까지 집에서 스스로 공부하는 밑바탕이 여기에 있다.
코로나는 나와 가을이에게 소중한 시간이었다.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 답답하기는 했지만 정서적으로 돈독해지는 시간이었다.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시간. 사교육의 늪에서 벗어나 우리만의 루틴으로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게 됐다. 포기하지 않고 이어 간다면 작은 것이라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또한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결정함에 있어서 “우리 엄마는 내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는 믿음이 생겼다.
엄마의 교육적 기준은 중요하고 또 중요하다. 기준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의 말에 쉽게 휩쓸린다. 내 기준이 있으면 아이를 닦달하지 않고, 하루 공부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된다. 멍 때리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도 그 시간을 존중해 줄 여유가 생긴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다가 가을이는 계획표를 들여다보며 자신의 할 일을 시작한다. 그런 아이를 보며 나도 흐뭇하게 내 책을 집어 든다. 욕심 많은 엄마가 사교육의 유혹을 이겨 낼 수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