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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다 May 30. 2024

사과한다. 화해한다. 간단한데 너무 어렵습니다.

포기할 수 없는 엄마의 마음그릇 넓히기.

“아이를 잘 키우는 사람은 육아 지식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내 아이를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을 갖춘 사람이다.”

어느 책에서 본 글귀다. 두 아이를 키우며 항상 마음에 기억하겠다고 수첩귀퉁이에 써 놓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책이 바래 듯 내 마음도 닳는 걸까. 늘 굳은 다짐을 하건만 현실에선 아이를 이해하려는 마음보다 욱하는 마음이 스프링처럼 솟아오르곤 한다.


“엄마 형이 나 때렸어.” 눈시울을 붉히며 단풍이가 달려온다. 질세라 가을이도 쫓아와 한 마디 덧붙인다. “단풍이가 먼저 시작했어, 얘도 나 때렸거든.” 항상 비슷한 레퍼토리의 향연.

형제들 싸움의 대본을 누가 써주기라도 하는 건지 배우들의 대사는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재방 삼방의 드라마에 이골이 날만도 한건만. 나의 한 마디로 드라마는 막장드라마의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때리는 거 안 된다고 했지 너희는 어떻게 배려라는 걸 모르니.” 눈물로 기나긴 형제의 전쟁 극을 마무리한다.


“어휴” 아이들과 한바탕 타령을 하고 나면 한숨이 절로 나오곤 한다.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겨우 올려놓은 자존감은 금세 바닥을 보인다. 육아서적을 보면 분리한다. 속상한 마음을 인정해 준다. 고쳐야 할 점을 일러준다. 사과한다. 화해한다. 이렇게 간단한 문장이 현실에서는 왜  적용이 어려운 건지. 머리로는 알겠는데 실천이 안 되는 현실을 보며 어두운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엄마가 되는 것도 자격증이 필요한 걸까. 엄마가 되기 전 엄마 되기 교육을 이수한 사람만 엄마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막장드라마의 마지막을 수정해 본다. 순서가 바뀌긴 했지만 모두의 평화를 위해서다. 

 “얘들아, 간식 줄까? 뭐 먹고 싶어?”

 “햄버거”

 “나는 햄버거 싫어, 떡볶이!” 

그래 일치할 리가 없지. 평소 같았으면 일치시키라고 잔소리를 해댔겠지만 오늘은 그들의 메뉴를 모두 수용해 본다. “그래 햄버거는 시키고 떡볶이는 엄마가 해줄게.” 


음식을 가지고 모여든 식탁에서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하하 호호 눈을 마주치며 웃는다. 미안한 마음을 한 개의 떡볶이에 실어 아이의 입속으로 전달한다. 헤실헤실 웃으며 가을이도 그 마음을  동생에게 전달한다. 음료 한 잔으로 단풍이 또한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핀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아까는 엄마가 화내서 미안해 속상했지? 우리 앞으로는  말하기 전에 상대방 입장이 되어서 기분이 어떨지  생각해 보고 말하도록 하자. 그러면 싸울 일이 줄어 들 거야.” 



뇌물이 잘 먹혔는지 아이들은 고분고분하게 대답한다. “네” 그 한마디로 응어리져있던 나의 마음도 스르르 녹아내린다. 엄마의 말 한마디에 드라마는 막장 드라마가 됐다가 따듯한 휴먼 드라마가 되기도 한다. 욱 하기에 앞서 내 마음을 다스리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걸 알지만 사람이 어디 쉽게 변하나.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길 바라며 마음을 다독거린다. '사람이기에 완벽할 수는 없다.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현재의 실수를 바로 잡아 나가는 과정에 집중하려고 애써보자'


아이를 낳으며 걱정이 앞섰다. 나에게 엄마의 자리는 항상 공석이었다. 내가 본 엄마의 자리는 드라마나 친구의 엄마를 보며  본 단편적인 부분이었다.  어두운 부분보다 밝고 긍정적인  부분들을 더 많이 봐왔다. 그래서인지 첫 아이를 키우며 내 뜻대로 되지 않자 좌절감이 더욱더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아이가 아프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말이 안 통할 때는 어떻게 반응하고 말해줘야 하는지 모든 것이 의문 투성이었다. 


나의 탈출구는 유튜브나 유아서적을 찾아보는 일.  물음표가 느낌표가 될 때까지 내 아이에게 맞는 케이스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아이들은 형형색색 다 제각각. 내 아이에게 들어맞는 케이스를 찾긴 힘들었고 울퉁불퉁 파인 비포장도로를 몸으로 직접 부딪히며  접점을 찾아나가야 했다.  그 당시는 그 경험들이  죽을 것처럼 힘들었다. 시간은 약이라는 말이 있듯 시간이 흐르며  융통성이 생기고 아이들과 울고 웃는 하루 속에서 어느 순간 아이들이 예뻐 보이는 시기가 왔다. 그 순간이 오니 분위기는 자연스레 순화되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요구를 말로 표현하기 시작했고 그 말과 표정, 행동 속에  해답이 깃들어 있었다. 애정이 생기면 자꾸 눈이 가고 그 사람의 말에 경청하게 된다. 엄마의 말만 잘 들으라고 아이들에게 강요했던 내가 아이들의 말을 경청하게 되니 육아가 할 만 해졌다.


결국 육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엄마의 마음그릇이었다. 아이를 이해하는 품이 넓어지니 육아는 할 만한 일이 됐고 문제가 생겨나도 보다 여유롭게 해결할 힘이 생겨났다.   종지그릇이던 나의 마음그릇은 스스로를 다독이고  아이들을 품에 안으며 조금씩 큰 그릇으로 다시 빚어가고 있는 중이다. 넓어지는 나의 마음그릇을 위해서 나는 오늘도 아이들과 싸우고 화해하며 애정의 손길을 내민다.






사진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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