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ictor navorski Jun 01. 2018

'선택'을 강요받는 사회

확실함이 폭력이 될 때 - <살아남은 아이>

'애증'이라는 단어가 있다. 사랑하면서 증오하고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이 모순된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언가를 좋아하는 나 자신이 싫어하는 마음이 있다. 또는 어쩔 때는 사랑하지만, 어쩔 때는 증오할 수밖에 없는 상대가 있다.  <살아남은 아이>는 이러한 모순된 감정 속에서 혼란을 느끼고 선택을 스스로에게 타인에게 강요하고 강요받는 사회를 그린다.


<살아남은 아이>는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씨네 21이 기록으로 남긴 당시의 GV내용을 보면 관객들의 찬사가 이어진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영화 중 최고로 좋았습니다". 영화를 수상 경력으로만 평가할 순 없지만, <살아남은 아이>는 그해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평론가상을 이외에 다수의 해외 영화제에 선택을 받아 초청 상영되었고 그 안에는 3대 영화제라 불리는 베를린영화제도 있다.


올해에는 환경영화제에서 <살아남은 아이>가 상영되었다. 여전히 이 영화를 찾는 관객과 함께 영화를 관람했다.  아들을 잃은 부모(성철, 미숙)가 나온다. 아들은 친구들과 물놀이를 떠났다가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해주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부모는 이런 아들을 떠나보내고 있다. 아들을 의사자로 신청하고 선정되며 아들의 흔적을 정리하는 일로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던 중 아들이 구해주었다는 아이 '기현'을 만난다. 처음은 아들이 구해준 아이가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위해서 부모는 기현을 돕는다. 부모에게 도움을 받지 못해 홀로 살아가야 하는 기현을 도와준다. 성철은 자신이 하는 일을 가르치며 기현을 데리고 다닌다. 미숙 역시 못마땅해하던 처음의 모습에서 점차 기현을 통해 아들을 잃은 슬픔을 극복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기현은 미숙과 성철의 친구이자 갈길 잃은 아들의 사랑을 받아주는 존재가 된다. 기현은 그들의 갈 길 잃은 사랑을 받아주고 동시에 그들의 죽은 아들을 함께 기억할 수 있는 존재이다, 모두가 잊어가는 잊으라 하는 그들의 아들을. 이렇게 한 부모가 아들을 잃은 슬픔을 이겨내는 과정처럼 후의 이야기를 기대했으나 영화는 반전을 보여준다.

기현이 아들 사고의 진실을 밝히기 때문이다. 친구를 구한 의인이 아닌 학교폭력에 휘말려 죽은 아들, 그리고 아들이 살려주었다 믿었던 기현은 그 폭력의 범인이었다. 그리고 기현은 이 사고를 조작한 주범이다. 사실이 밝혀지며 아슬아슬했던 부모와 기현의 관계는 무너진다. 부모는 기현과 폭력에 참여하고 사건을 덮으려 한 아이들을 고소한다. 그중에는 협력업체 주인으로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아들도 있다. 하지만 끝내 아이들은 입을 다문다. 기현만이 죄책감을 느끼며 사실을 말하지만, 사건은 불기소 처분 즉 수사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되었다. 분노하고 실망한 부모는 자살을 선택하려 한다. 그리고 그전에 기현을 부른다. 기현은 자신이 용서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쁘게 부모를 만나러 온다. 그리고 부모는 그런 기현은 아들의 사고 장소로 데려가 죽이려 한다. 부모는 끝내 기현을 죽이지 못한다. 기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고, 부모는 다시 처음에 그들이 기현을 돌봐주며 그를 도와주었듯, 물에 빠진 그를 다시 구해낸다.

처음 부산 영화제에서 <살아남은 아이>를 만났을 때 제목만으로 거부감이 느껴졌다. 우리 사회에 트라우마로 남아버린 세월호를 상징적으로 다뤘을 것 같았다. 나는 더 이상 세월호를 슬프고 분노하는 방식으로 만날 자신감이 없었다.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고 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결국 해가 넘어가고 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다. 자꾸만 살아남은 아이에게 주어지는 사회의 슬픔을 어떻게 다뤘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영화는 남겨진 사람들을 다룬다. 부모의 아이를 살렸다가 죽인 아이. 만나지 말았으면 하는 세 사람의 만남은 아슬아슬하게 표현된다. 비밀이 숨겨진 체로 마치 파멸을 앞둔 관계처럼 비밀이 밝혀지기 전에도 셋의 관계는 불안하다. 그리고 동시에 불안하며 완전하다. 기현은 부모에게 죽은 아들의 존재를 대체한다. 아들을 향했던 큰 사랑을 부모는 한순간에 정리하기 어렵다. 기현의 존재는 부모로 하여금 그 사랑을 천천히 거두어 갈 수 있게 도와주는 대상이다. 기현에게 이들은 부모의 역할을 대신한다. 기현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 조차 재혼을 하며 기현에게 최소한의 버팀목이 되었던 재정적 지원을 끊었다. 기현은 부모로부터 버려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자신을 살렸지만, 사실은 자신이 죽인 아이의 부모가 대신한다. 기현은 점차 이들에게 의지한다.


점차 완전해가던 이들의 관계는 처음 이들이 관계를 맺었던 그 이유 때문에 파멸한다. 살아남은 아이가 아닌 아이를 죽인 아이. 분노하고 미워하고, 또 자신에게 분노하고 미워하고 죽은 자신의 아이에게 미안해한다. 하지만, 이미 기현과 미진 그리고 성철, 셋은 완전해졌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영화는 기현을 향한 부모의 복수를 다루기보다 복수를 할 수도 용서를 할 수 도없는 관계로 이들을 남겨버린다. 부모가 죄책감에 자살하려는 기현을 구하는 건 용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복수로 그를 죽일 수도, 그렇다고 완전히 용서해버릴 수도 없는 존재인 것을 인정한 것이 아닐까. 부모에게 기현이란.


관객들 역시 기현을 미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 기현은 아이를 죽인 범인이며 사건을 덮어버린 주범이지만, 기현만이 자신이 죽인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처음 모두가 함께 사건에 대해 거짓말을 했지만, 그럼에도 유일하게 끝내 사실을 말해준 사람은 기현뿐이다. 나에게 가장 나쁜 사람이 동시에 가장 감사한 사람. 그게 바로 기현이다. 고통을 주었고 그 고통을 이기게 해주었다. 기현은 부모의 부름에 기대를 품고 나왔지만, 사실 기현은 절대 용서받을 수없다, 그렇다고 증오할 수도 없다.


영화의 이 같은 모순된 감정에 매료된다. 모순된 감정의 답을 주지 않는다. 감정을 차분히 설명한다. 그리고 끝내 관객에게 그 감정의 답을 생각해 보게끔 한다. 기현은 착한 아이인가 나쁜 아이인가. 그 과정에서 그리고 모순에 빠진 타인은 위로가 된다. 인간을 명확한 것을 좋아한다. 무엇이든 확실하게 제시되기를 본능적으로 바란다. 모순된 감정은 우리고 하여금 불안을 느끼게 한다. 영화가 셋의 관계를 복수도 화해도 용서도 아닌 장면에서 끊어버리자, 본능적으로 기현을 살려주고 난 뒤 기현과 부모는 어떻게 되었을까, 다시 예전의 관계로 돌아갔을까 그 답을 원한다. 도대체! 용서를 한긴 한건 가요!


하지만 모순된 감정이 주는 불안에 대해 집중하고 싶다. 관객 개개인이 모순된 자신의 태도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모순된 애증의 감정에서 좋아할 건지 싫어할 건지 결정할 때 느끼는 불안에 대해 말이다. 그 태도와 감정에서 느껴야 할 불안의 이유 중 하나는 본능적으로 확신을 원하는 것만큼, 타인처럼 자신도 확실해야 한다는 강압감이 있다. 동시에 확실한 타인은 다른 타인에게 확실함을 요구한다.


영화 속에서 처음 부모는 죽은 아이의 의사자 신청을 한다. 그리고 죽은 아이가 의사자에 선정되자, 주위 사람들은 '축하'를 건넨다. 그리고 솔직한 한 사람은 보상금이 얼마냐고 묻기도 한다. 이 장면에서 누군가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유가족을 떠올기도 했을 것이다. 그들을 대하는 사회의 몇몇 태도들을 떠올린다. 의사자 선정에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여전히 죽은 아이에 대한 슬픔에 빠져있는 남은 가족에게 어떠한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영화 속 성철의 말처럼 '할 말이 없어서 건네는 말'일지라고, 그 자체로 우리는 그들의 감정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른다는 뜻이 아닐까. 할 말이 없다는 건 그 자체로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섣불리 그들이 슬프거나 기쁘거나 선택하기를 요구하는 마음을 담아 '축하'를 건넨다. 그 속에 이제 기쁜 일이 있으니 그만 슬퍼해도 되지 않을까 하며.


부산영화제 GV에서 영화의 감독은 시나리오를 쓸 때 본인이 직접 겪었던 유가족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생각한 시간이 많았었기 때문에 그 생각이 시나리오에 담겼다고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겪은 사람에게 타인이 주는 상처를 겪었고 이에 대한 생각을 담았다고 전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겪은 사람의 아픔에 우리는 공감하지만,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죽음에 대한 상실의 슬픔을 제대로 오래 기억하고 위로해주기 쉽지 않다. 슬픔은 시간이 갈수록 옅어진다고 하지만, 옅어지는 건지 잊어가는 건지 극복해나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저 마음에 묻어가는 건지 그 애매함을 견디지 못한다. 극복했지만 아직은 슬픈, 이 감정은 모호하고 기준이 없어서인지 그들을 대하기가 어렵다. 동시에 그 주체조차 어떻게 이 마음을 전해야 할지 어떻게 이 마음을 견디어야 할지 어렵다.


우리는 언제나 확실한 것을 추구한다. 이것이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동시에 폭력적으로 다가와도 여전히 확실하길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