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pm

by 주또

충동적으로 향수를 구매했다. 상품명은 SW19 3pm EAU DE PARFUM (50ml). 햇살이 내리쬐는 푸른 잔디와 부드럽고 향긋한 과일의 향취. 이슬 젖은 초록숲이 상큼한 햇살에 말라가는 윔블던의 오후. 공원에 만개한 꽃들의 향기와 홍차에 띄운 레몬 조각 향기가 어우러진 윔블던의 오후 3시를 느껴보세요. 쓰여있는 소개 문구가 마음에 들어 냅다 구매하기 버튼을 누른 거였다. 패키지 또한 예뻤다. 하얀색과 주황색의 조화가 멋들어졌다. 게다가 향수병 뒷면을 통해 볼 경우 소개에 쓰인 듯이 윔블던 어쩌고 하는 공원의 풍경이 그려져 있는데, 그림 역시 구매 욕구를 자극하기 충분했다. 예쁜 건 가까이할수록 좋아. 분명 향도 좋을 테지. 언제나 충동적으로 저지르는 일에는 책임이 잇따른다. 심호흡을 하며 슬쩍 통장 잔고를 확인했다.


이번 달에 소비된 지출이 높았다. 하지만 때로는 내게 예고 없는 선물을 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일종의 환기 같은 거라고 치자. 스스로를 합리화 시키며 카드를 긁었다. 그와 동시에 핸드폰에 입출금 알림이 울렸다. 애써 모른체했다. 다음 달의 내가 조금 더 힘을 내줄 거라고 믿기로 했다. 일절 향을 맡아본 적 없는 향수라 아슬하긴 했다. 혹여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나의 고민에 동생이 쏜살같이 답했다.


“그럼 나 줘. 내가 쓸게. 난 개이득이지.”

개구쟁이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흔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렇게 주문을 하고서 한 4일 정도 흘렀을까, 드디어 배송 완료가 되었다. 퇴근을 하고서 집으로 달려가 향수부터 뜯었다. 패키지와 더불어 사진 몇 장을 찍어주고서 뚜껑을 열었다. 기대 만발. 손목에 칙, 뿌렸다. 1차적으로는 귤? 비슷한 향이 풍겨졌다. 그러고는 시간이 조금 흐르자 은은한 잔향으로 아기 냄새? 살 냄새 같은 향이 맴돌았다.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소개 글도 딱 들어맞았다. 아주아주 잘 쓴 설명이라고 칭찬했다. 동생에게 줄 일이 없게 되었다. 녀석은 나중에 다른 걸 사주리라. 뜻밖의 행운. 우연히 눈에 들어와 시향 없이 모험심으로 구입한 것이었는데 대성공적이었다. 두둥실 마음이 허공 위로 떠올랐다. 향수를 선반에 올려두었다. 새로 산 향수가 있다고, 자랑하고픈 이가 있었으나 망설이다 관두었다.


그대로 곧장 욕실로 가 몸을 씻었다. 불편한 옷을 벗고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머리카락도 하나로 질끈 묶었다. 침대에 누웠다. 책을 읽으려다 그럴 기력이 없어 눈을 감았다. 몇 분이 지난 뒤에 다시금 눈을 떴다. 금방 기분이 뒤바뀌었다. 좋은 향을 맡아 좋은 마음이 되었던 건 꿈인 양 반대로 굴었다. 일찍 잠에 들어야겠다. 근래엔 잠만 자려 한다. 본래 틈틈이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하며 몸을 움직이려 하는 나인데 희한하리만치 잠이 쏟아졌다. 머릿속 과부하였다. 생각을 끄고 싶어 잠을 택한 것이었다.


*

어디 멀리 가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불현듯 “모두들 안녕!” 외치고서 사라지고 싶었다는 얘기이다. 만일 그런다면 누가 슬퍼해줄까? 그 안에 내가 생각하는 이가 포함되어 있을지 의문이었다. 저지르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가지 말라고 매달리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실은 알고 있었다. 한사코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을. 그는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추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서 지금처럼 멋지게 살아갈 거였다. 하나 그럼에도 속아보고 싶었다. 일말의 기대를 품고서 그가 슬퍼할 거라는 믿음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나가지 마. 추워. 넌 여기 있어.]

입술을 깨물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거듭 그려졌다. 한때 내 세상을 움켜쥐었던 이가 재차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고 있었다. 낌새를 알아채고서도 모른 척했다. 몰라야 해서 부정했다. 현재도 그러는 중이다. 두통이 몰려왔다. 귓가가 먹먹했다. 누워있음에도 불구하고서 어지럼증이 나아지지를 않았다. 후퇴하는 삶이었다. 뒤로 걷고 있었다. 심야 속이었다. 난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이 없다. 오로지 사랑만이 전부였다. 그리하여 사랑에 집착하게 되는 게 아닐까? 고뇌했다. 신경을 다른 데에 분산시키지 못해서 말이다. 집착은 사전적 의미로 어떤 것에 늘 마음이 쏠려 잊지 못하고 매달림,이라 되어있다.


“마음이 쏠려 잊지 못하고 매달림.”

되뇌었다. 헛헛했다.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결핍. 내 사랑은 늘 외로워 충족되지 못했다. 이번이나 저번이나 예외는 없었다. 첫사랑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넌 참 재미없는 인간이다.” 그땐 그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었는데 생각해 보면 나를 정확히 간파한 문장이었다. 재미없는 인간. 지인들은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되지.” 한다. 그렇지만 난 그 사람 말마따나 재미없는 인간에서 벗어나지 못할뿐더러 누가 봐도 시시한 인간이 되어버릴까 봐 두려웠다. 사실상 시시하고 재미없는 인간. 따분한 일상을 반복하는 인간, 이 맞긴 하나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쓴다. 아무도 알지 못했으면 좋겠다.


*

안 좋은 상황이 벌어졌다. 내가 얼마나 쓸모없는 인간인지를 실감했다. 철저히 버려졌다. 더 이상은 이러한 결과를 초래할 일이 없다고 안주했는데 아니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도 버려짐의 연속이었다. 내 인생은 자꾸만 나를 엇나가고 틀어지며 나와 멀어지게 하는 것들이 즐비했다. 난 버려짐이 단편적인 거라고 생각했으나 한번 그러기 시작하니 계속해서 이어졌다. 마음이 아팠다. 딱히 콕 집어 말할 누구만의 잘못은 아니었다만 그래도 그동안의 수고가 물거품 되어버리는 것이 슬펐다. 현실이 미웠다. 금방 죽상이 되었다.


아라 씨는 나를 보며 “나라를 잃은 사람 같아요.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걸 보고 있는 것 같네, 꼭.”이라 했다.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 손길에 그냥 모든 걸 놓아버리고서 다시금 잠 속으로 빠져들고 싶었다. 지금의 난 방향 키를 잃은 작은 배에 불과했다. 머잖아 암초에 부딪혀 속절없이 침몰하고 말 것이었다. 예상컨대, 좋아짐이란 없었다. 회복 불가능했다. “그런 눈으로 봐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러하다. 그렇겠지. 마음이 휘청거렸다. 억눌렀다 집으로 돌아가 구경꾼 없는 방 안에서 울 작정이었다.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얼굴이 시뻘게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세상은 변하는 것보다 변하지 않는 것들이 더 슬프단 생각을 했다. 아울러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을 것들과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얻지 못할 것들이 서러웠다.


[새로 산 향수 오늘 뿌렸어? 사람들이 알아챘어?]

덕현에게 온 메시지에 시무룩한 답장을 눌렀다.

[아니. 아무도 알지 못했어.]

뒤를 이어 점이 여러 개 붙였다. 지웠다.


필라테스를 하고 난 후 캐비닛을 열기 위해 뻗은 팔을 주춤거렸다. 핸드폰을 보기 무서웠다. 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을까 봐 무서웠다. 내가 정말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무서웠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공중으로 분해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서웠다. 무섭다는 말을 여러 번 되뇔 지경으로 무서웠다. 그리고 나는 무너졌다. 현실을 직시하는 건 언제나 어려웠다. 앞만 보면 되는 건데 자꾸만 뒤를 보려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내게만 다가오는 친절 뒤에 무슨 꿍꿍이가 있지 않을까 상대를 의심하고 반대로 모두에게나 선사되는 다정에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닐까 착각했다.


*

방 안에서 눈물이 터졌다. 숨죽였다. 엄마에게 들키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 소리를 껐다. 가슴이 찢길 듯한 고통이 진행되었다. 먼지가 되어버리고 싶었다. 그런다면 한결 편안해질까? 내가 과연 평화였을지 재난이었을지 궁금했다.


“감기 걸렸어? 콧물 흘리는 것 같길래.”

엄마의 음성이 등 뒤로 따라붙었다.

“응, 감기가 왔나 봐.”

용케 떨림 없는 음성을 내보냈다. 감기. 그래 감기.

“약 먹고 몇 밤 자면 괜찮아질 거야.”

맥없이 중얼거렸다.


하나씩 차례대로 지워가야 한다. 그런데 처음이 어디였더라? 가물가물했다.


[슬프지.]

거짓말. 다 거짓말. 본인과는 무관한 일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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