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by 주또

피폐해진다.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어디까지나 나의 환상에서부터 비롯한 감정인 걸까. 사랑하고 싶지 않아 잠을 잔다. 자주 나를 재워놓고서 꿈속의 당신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느낀 점은 이러하다.


[사랑은 대체 뭐길래 사람이 저지르지 않아도 될 법한 일들을 하게 만드는가?]

아래 답문을 달지 못했다. 길 잃은 고양이가 된 기분이다.


서서히 봄이 온다. 날은 제법 따뜻해졌는데 내 마음은 여전히 겨울을 산다. 추워서 패딩을 입고 그것도 모자라서 주머니 속에 넣어둔 핫팩을 그러쥔다. 저벅저벅 걷는다. 걸음마다 눈 밟는 소리가 날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눈이 보고 싶다. 새하얀 눈은 하늘에서 내리고 막 소복이 쌓이는 순간에만 예쁘다. 누군가의 손을 타게 되거나 발에 밟히게 되거나 차가 밟고 지나가는 즉시 더러워진다. 까맣게 변한다. 내 마음도 새하얀 시절이 있었을까? 순수하여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할 수 있는 거라는 말을 난 믿지 않는다. 어딘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해 뒤흔들린다.


넋 놓은 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손에선 은은한 핸드크림 향이 풍겨져 온다. 바이레도 브랜드의 로즈 오브 노 맨즈 랜드 향. 그의 향수를 따라 구매한 것이기에 맡을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진다. 하지만 난 그에게서 이러한 향을 맡아본 기억이 없다. 그는 향수를 여러 가지 사용한다고 했다. 집에 모셔둔 것만 해도 대충 어림잡아 스무 가지는 훌쩍 넘는다고. 그중 내가 맡아본 향이 있나. 고개를 저었다. 해마다 그를 대면할 경우 노상 허둥거리느라 향을 맡을 정신도 없었다. 아쉬웠다.


[왜 맡지 못했을까요?]

[바빠서 그랬겠지.]


*

오늘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 앞에서 연기를 해야 하는 날이었다. 도통 질투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내게 그 사람은 섭섭해하며 물었다. 원래 그렇게 질투가 없느냐고. 난 당황한 기색 일절 없이 곧장 대꾸했다.


“원체 질투가 없어.”

그래서 질투가 나지 않아.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질투가 끓어넘쳤다. 이건 그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그의 한정이었다. 그가 다른 이성과 눈만 마주쳐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게다가 웃어주기까지 할 때면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당장이라도 책상을 뒤엎어버리고픈 심정이었다. 매일을 참느라 고역이었다.


그러지 말아야지. 미친 짓은 삼가야지.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가 말을 걸 대상이 나뿐이기를 바랐다. 그가 걸어도 내 옆으로만. 그가 시선을 옮겨도 내게만 닿기를 원했다. 집착의 끝을 보여주는 꼴이었다. 한데 이리도 뻔뻔한 거짓말을 지껄이고 있다. 질투가 없다고? 자신을 향해 비아냥거렸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서야 마땅히 둘러댈 핑계가 없었다. 못났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참으로 못났도다. 마주 보고 앉은 이가 딱할 지경이었다.


이별을 했다. 헤어졌다. 또다시 짧은 만남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눈가를 긁적였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연애 좀 해보려 하면 그가 내 마음속에 들어와 훼방을 놓았다. 정작 현실 속 그는 아무런 잘못 없다만 내 마음속 그는 그 누구보다도 막무가내였다. 커피를 마셨다. 당분간은 건강으로 인해 카페인과 안녕하기로 하였는데 잘 되지를 않았다.


언제는 a를 통해 비로소 b를 잊었다 자만했던 시기가 있었다. a의 얼굴에 홀려 b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것도 잠시 b는 다시금 제자리를 치고 올라왔다. 보란 듯이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나를 향한 비웃음을 날렸다.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난 계속 b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노릇임을 깨달았다. 어쩔 수 없는 운명 같은 게 있지 않는가. 왜 하고많은 사랑 중 당신인가. 신을 원망하고자 했지만 존재를 알아낼 방법이 없어 포기했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사코 부인하기만 했었는데 인정하는 것 외엔 별다른 방도가 없음을 알아챘다.


머리카락을 잘랐다. 손톱을 잘랐다. 이처럼 잘라내는 게 쉬운 것이 마음도 마찬가지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마음만큼 어려운 것도 없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오고 간다. 한 사람이 갈 경우 더 좋은 사람이 오기도 한다. 설령 오지 않는다 한들 이미 내 주변엔 좋은 사람들이 차고 넘친다. 다만 그럼에도 그런 사람들 죄다 뒤로 제쳐놓은 채 왜 당신만 이리 목 빠져라 오기를 기다리는지. 훗날 그가 내 글을 보게 될까 두려워졌다. 본인을 소재로 한다는 사실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단 예감 때문이었다. 어느 날은 그로부터 정말 이제 그만하라는 소리를 듣게 될까 벌써 무서워진다.


이따금 그가,

“요새 몸은 괜찮니?”

물을 때마다 난 태연하게

“괜찮아요.”

답한다. 괜찮다는 말속엔 아니,란 의미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걸 그가 아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가 내 아픔에 한몫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짐작이나 할는지. 병원을 다니고 약을 먹는다. 그러면 잠깐 동안은 나아진다. 하나 약발이 떨어지면 다시 원상복구이다. 이 모양이니 이걸 나아지고 있다 해야 할지, 애매해진다.


*

수진과 소연 팀장님은 연거푸 한숨을 쉬는 내게 으름장을 놓았다.


“앞으로 이주영 한숨 쉬거나 부정적인 소리 할 때마다 2천 원 내기!”

벌금이 부여되었다. 시작한 지 한 시간 만에 무려 3만 원이 추가되었다. 소연 팀장님은 거듭 수를 높여갔다. 반면 난 지켜가긴커녕 더 암울한 표정과 말마디를 구시렁거렸다. 어떻게든 이 사람들의 귀여움을 통해 2천 원어치의 불행을 날려보고자 했다. 나도 노력을 안 한 건 아녔다. 습관처럼 불행이 달라붙었다. 나를 좀먹었다. 머잖아 이대로 나란 사람 자체가 흐려질 것 같아 서러웠다. 반쯤 울다 말았다. 냉정하게 사는 법을 알고 싶다. 나처럼 감정으로 인해 모든 것이 좌지우지되는 사람은 별로였다.


[웅. 괜찮아. 별거 아니야.]

상아는 꾸준히 나를 위로했다.

[눈물은 원래 많으면 정상이라고 그랬어. 감정에 충실한 거라고. 슬퍼도 눈물이 없는 사람들이 문제 있는 거랬어.]

이 아이도 지칠 법한데 대단하다. 따뜻하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란 드라마에서 영우가 윤경에게 봄날의 햇살이라는 별명을 붙여주듯 나도 상아에게 걸맞은 별명을 붙여주고 싶다. 더불어 덕현에게도 동일하다.


[마음 안 쓰는 법이 너무 어려워. 어떻게 하는 거지. 사소한 거 하나하나 다 너무 마음 써.]

[그건 다르게 보면 사람이 섬세한 거지. 나쁜 점이 아니다.]

내 주변엔 봄날의 햇살이 이리도 화창하게 내리쬐고 있다. 어둠에 정체되어 있을 때가 아녔다.


*

그에게 건넬 인사를 미리 연습한다.


그의 모든 면이 좋았다고 말하자. 그가 내는 소리, 그의 얼굴과 표정, 걸음걸이, 행동, 전부.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게 단 한 가지도 없었더라고. 세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서 난 당신에게 벗은 발로 뛰어갈 수밖에 없었더라고. 미워죽겠던 시절도 분명 있었다만 당신이 조금만 잘해주면 사르르 녹아 마냥 미워할 수가 없었다고. 덕분에 심심하지 않은 일상이었어요. 무지하게 아팠으나 그만큼 배운 점이 또 있을 테지요. 내 인생에 나타나주어 감사했습니다. 아프지 마세요. 무탈하기를.


정정한다.

그에게 건넬 인사가 아닌 전하지 못할 인사에 불과하다.

조만간 안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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