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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또 Mar 26. 2023

첫사랑에 관하여

당신을 배제한 채 여름을 설명하기란 충분하지 못하다. 열여섯의 끝 무렵. 그러니까 즉 중학교 삼학년을 졸업하기 직전. 마주하였던 당신의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당신은 흔히들 말하는 일생에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 사랑이란 감정을 처음 느끼게 해준 장본인.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랑. 바로 첫사랑. 초면에 당신은 내게 사랑을 불러일으켰다. 인파로 인해 복도를 지나치기 난감해하던 중 정수리 위로 무언가 얹어졌고 뒤를 돌아봤을 땐 해맑게 웃고 있는 당신이 햇살에 눈 부셨다. 어린 날에 대면하게 된 당신은 내게 완연한 계절 같던 사람. 삶에 찌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벌겋게 충혈된 눈두덩으로 담배만 뻑뻑 피워대던 사람. 허구한 날 “죽어야지.” 소리만 붙들고 지내던 사람. 그런 당신은 왜 첫 만남에 그토록 환히 눈 부셨나. 햇빛을 받은 물결처럼 반짝거렸나.


사랑의 역사가 막 쓰이기 시작했을 시기. 사방이 꽃밭이었다. 눈만 마주쳐도, 아니 이름만 읽어도 설렘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당신 눈에 띄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일부러 주변을 빙빙 맴돌고 언성을 높이며 시선을 끌고자 했다. 당신 마음에 들고 싶었다. 사랑하는, 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끼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초반엔 그다지 아프지도 않았다. 그저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그러나 문제는 감정이 심화되면서 발생된다. 바라만 보아도 좋은 제법 그럴싸한 사랑, 만족할 수 없게 된다. 저 사람이 다른 이성과 있으면 슬프고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음에 좌절하며 저 사람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 의미 부여하고 울게 된다. 어떻게든 저 사람의 시선이 내게 머물렀으면 좋겠고 단 1초만이라도 나를 향해 두근거렸으면 하며 단 5분 만이라도 나를 사랑하기를 원하게 된다.


정말 매일 울었던 것 같다. 당신을 마주하고자 하루를 할애했다. 당신의 서운 가득한 표정이 신경 쓰여 집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왔던 길을 급히 되돌아갔고 코딱지만 한 용돈을 모아 빼빼로데이 같은 기념일엔 넌지시 선물을 건네보기도 했다. 당신에게 도움이 될 법한 일들을 자처해서 나섰고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이 나를 나무랐을 때 실망감보다 내 사랑이 부족하여 티가 나지를 않았나 의심하며 바스러졌다. 손끝만 닿아도 화상이 입을 듯하여 조심스러웠다.


어느 여름날, 당신은 이런 나의 마음을 지레 짐작했을까. 갑작스레 내게 좋아하는 사람 있느냐고 물어왔었다. 당황한 나는 황급히 얼버무리며 고개를 저었고 그럼에도 당신은 포기를 모르는 사람처럼 집요하게 질문했었다. 마치 내게서 확인해야 하는 대답이 있는 듯이 굴었다. “여기서 어떻게 말해요.” 내가 말했고 당신이 옆에 놓인 뜯지 않은 나무젓가락을 내밀며 그곳에 이름을 적으라 하였다. 그때 하필 왜 내 손엔 볼펜이 쥐어져 있었을까. 반듯이 당신의 이름 석 자를 적었다. 힘을 잔뜩 준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그것을 읽었을 때 매우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장난치지 마라.” 하였고 난 당신이 말과 달리 어느 정도 내 진심을 눈치챘으리라 직감했다.


그날 이후로 우리 사이에는 잠시 어색함이 맴돌았다. 이로써 더욱더 확신했다. 당신은 알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당신이라는걸. 그리고 그 계절은 여름이었다. 내 앞에 앉아 좋아하는 사람에 관하여 묻던 당신은 검은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하늘색 핸드폰 케이스를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 얼마나 많은 감정이 요동쳤는지. 사실 그대로를 발설하고자 하는 마음과 최대한 숨기자는 마음이 충돌하여 무척이나 고역이었음을. 기어이 말해버린 다음엔 당신 뒤로 열려있는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단순히 장난이라는 단어로 이 모든 상황을 무마시키려는 당신의 태도가 나를 꼭 죽고 싶게 만들었다. 사랑 뒤에 장난이라는 걸 갖다 붙일 수가 있나. 사랑에 장난과 농담이 어딨나. 한편으로는 당신이 내 고백을 받아주리라는 희망도 그 잠깐 짧은 찰나에 품었던 것도 같다. 우스웠다.


사계절을 두 번 보냈다. 그 안에 다른 사람과 사귄 경험도 있다. 당신이 아는 사람이었다. 당신은 아는 사람끼리 연애할 시 짓궂게 놀리는 유형이었다만 무슨 영문인지 나에게는 단 한 번도 나의 연인이 된 사람에 관하여 언급한 적이 없었다. 착각일지 모르겠으나 나와 나의 연인이 복도에서 얘기를 나누던 중 불현듯 당신이 등장했던 순간이 있었다. 당신은 곧장 되돌아가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우두커니 자리에 멈춰 서서는 나와 나의 연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한치의 미동도 없이 우리 둘을 눈에 담고 붉어졌다. 그러다 나의 연인이 뒤를 돌아 당신을 발견하였고 그제야 당신은 신속히 몸을 숨겼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할지 예나 지금이나 물은 적 없어 알 수 없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내가 헤어졌다고 했을 땐 구태여 이유를 질문하지 않았다. 단지 웃었다. 난 당신이 이런 사건에 끈질긴 사람인지라 괜한 설명을 해야 할까 긴장했는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 허망해졌다. 연이어 나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서 돌아서는 당신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당신에게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곳을 떠났고 다시는 당신을 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당신을 볼 경우 속수무책으로 무너질듯하여 그랬다. 소매를 부여잡고서 제발 떠나지 말라며 울고불고 난리 피울듯하여 그랬다. 온갖 청승을 다 떨며 참아낸 결과 가까스로 당신과 끊어졌다. 명절에만 연락을 주고받는 관계로 남아 있었다. 간혹 안부를 묻고 별다른 말은 첨언하지 않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약 사 년을 보냈다. 사 년을 보내고서 비로소 책을 출간하였을 때 당신을 찾아갔다. <당신을 그리고 당신을 씁니다> 책의 첫 장에 적혀 있는 문장을 들고서.


내가 만약 책을 출간하게 된다면,

그때 반드시 책을 옆에 끼고서 당신을 방문하러 갈게요.

(적당하게 묵직한 종잇장들의 모음 사이에 당신이 몇 장 숨어있어요. 부디 당신이 발견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난 여전히 당신이 좋아하던 코카콜라를 즐겨 마시고 당신이 좋아하던 라테를 주문하며 당신이 입고 있던 패딩 색상인 녹색을 좋아한다. 게다가 당신 따라 샀던 브랜드의 신발과 옷들을 가지고 있다. 여름을 떠올릴 시엔 당신에게 좋아하는 사람을 당신이라고 적었던 날을 연상한다. 나를 내내 여름이도록 만들었던 사람. 붉어지고 더워지고 땀 흘리게 했던 사람. 나를 나답지 못하도록 바꿔 놓았던 사람. 순정. 순수한 감정이나 애정. 태어나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어요. 나의 첫사랑이 당신이어서 참 많이 배우고 아팠습니다.


영원토록 내 기억 속에서 늙지 않는 사랑으로 남아주시길.


*

별거 없는 하루가 특별해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모든 건 당신으로부터 온다. 당신이 내게 온 찰나 세계는 뒤바뀌었다. 내가 세상을 미워하는 마음이 삽시간에 사랑으로 물들었다. 당신은 물감이었다. 그렇기에 나를 몇 번이고 덧칠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나는 텅 빈 하얀 도화지. 당신을 통해 본 세상이 꼭 나의 전부 같다.


그러니까 특별해지는 순간이 일어나기 전, 나는 오늘 회사에서 친한 마케팅팀 대리님과 식사를 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렇기에 오후 세시 사십분쯤 뭉그적거리며 일어나 씻었고 머리카락을 말린 뒤 화장을 대충 했다. 옷도 손에 집히는 대로 편하게 차려입었다. 그냥 통 넓은 청바지에 흰색 반팔 티셔츠였다. 머리카락은 풀어 헤치고 뉴발란스 운동화를 신었다. 거울 속 모습을 확인하고는 하품을 쩍쩍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비가 온다는 소식을 동생에게 전해 들었으나 어떤 영문인지 우산을 챙기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바라본 하늘이 멀쩡했으므로 비가 오지 않을 거라는 얕은 희망을 품은 채 빈손으로 집 밖을 나섰다.


하지만 우산을 챙기지 않은 건 오만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비가 쏟아져내렸고 저마다 뛰어가기 바빴다. 나도 서둘러 편의점에 들어갔다. 우산이 진열되어 있는 곳에서 검은색 우산을 골라 계산대로 가져갔다. 구매를 완료하고서 대리님에게 연락을 했다. 대리님은 이제 버스를 탔다며 미안하다 했다. 난 괜찮다고 했다. 편의점 안에서 기다렸다. 나가면 덥고 습해서 땀이 날 것 같았기에 여기 있는 편이 나을 듯하다는 판단을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분이 더 흘렀던가. 잠잠했던 핸드폰이 다시금 울렸다. 대리님이었다. 그런데 대리님은 나와 약속한 장소가 아닌 다른 곳에 도착했다고 하셨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알고 보니 대리님이 약속 장소를 잘못 알려주신 거였다. 약속 장소는 인하대가 아닌 인하대 역이었다. 난 한껏 울상이 된 음성으로 사과를 하는 대리님을 달래며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금방 가겠다고 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다행히 곧바로 택시가 잡혔다. 창문 밖으로 서로 꼭 붙어 셔츠 하나를 머리 위로 두른 채 뛰어가는 남녀를 발견했다. 남녀가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응시했다. 왠지 모를 시큰함이 가슴 부근을 적셔왔다.


약속 장소를 잠시 헤맸다. 지도가 빙빙 돌아가는 길을 알려준 탓이었다. 대리님이 알려준 양 갈비 집에 들어섰다. 대리님이 손을 들어 반겼다. 인사를 나눴다. 회사에서 알게 된 사이이지만 편하게 언니 동생 하기로 한 사이였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긴장감도 전혀 없었다. 전에 내가 고마운 사람에게 밥을 쏜 적이 있어, 이번엔 대리님이 내게 맛있는 걸 먹이겠다며 부른 거였다. 나는 우산을 내려놓고 의자를 빼서 앉았다. 가게 안 에어컨 바람이 시원했다. 직원이 구워주는 양고기를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친구 얘기도 있었고 일상 얘기도 있었으며 회사 사람 얘기도 있었다. 입이 아플 지경으로 떠들었다. 대리님은 하이볼 한 잔과 맥주 한 잔을 마셨고 난 콜라로 대신했다. 밥 한 공기를 다 먹지 못하고서 삼분의 일만큼 남겼다. 대리님은 삼분의 이를 남긴 거라 했지만 내가 인정하지 않았다. 고기도 얼마 안 먹었다며 나무랐다만 난 아니라며 내가 더 많이 먹었다고 우겼다. 웃겼다.


그리고서 카페에 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과 크로플을 시켰다. 먹고 마시며 이어서 대화를 나눴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연애에 관한 주제로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서로 소개팅을 했던 경험담을 풀어놨다. 별별 얘기가 다 나왔다. 대리님의 소개팅은 한마디로 시트콤이었고 나의 소개팅은 마가 꼈나? 의문점을 남겼다. 난 연애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이대로 혼자 살듯하다고. 대리님은 아니라며 나를 위로했다. 아직은 젊어서 기회가 많다고. 조만간 연애를 하게 될 거라고. 사랑이 찾아올 거라고. 그런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게도 진짜 사랑이 올까. 사랑이 오면 나는 그 사랑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내가 누군가를 만날 자격이 있을까. 또다시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누군가로 인해 불행해지고 싶지 않았다. 행복과 불행을 함께 해야 진정한 사랑 아니려나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행은 좀 빠지면 안 되나 투덜거렸다.


더불어 상처받는 것에 대한 얘기도 했다. 나는 부당한 상황에 대해서 화가 나는 건데 사람들은 자꾸만 나를 상처 잘 받는 애로 몰아간다고. 내가 이상한 건가? 싶어진다고. 대리님은 그들이 잘못이라고 해줬다. 누가 봐도 네가 화날만한 상황이고 사과를 받아야 마땅한 사건인데 왜 너를 그런 식으로 대하냐고. 나 대신 열을 내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었다. 한 세 시간 조금 넘게 떠든 것 같다. 어느덧 시간은 아홉시를 넘겼고 난 마지막으로 화장실을 가기 위해 나왔다.


화장실은 밖에 있었다.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나왔다. 그런데 바로 앞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오직 뒷모습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발걸음을 멈추었다. 모든 사고 회로가 정지된 느낌이었다. 그 가운데 이름 석 자가 반짝였다. 누가 봐도 당신이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알아챌 수 있는 당신이었다. 이윽고 당신이 뒤를 돌았다. 날 발견했다. 난 “헐... 대박.” 소리를 냈다. 당신은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왜 여기 있냐고 물었다. 내가 묻고픈 질문이었다. 난 이 앞 카페에 왔다고 했고 당신은 술 한잔했다고 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당신의 얼굴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아니 살이 조금 빠진 것 같기도 하고. 목소리가 달달 떨렸다. 손가락이 움찔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당장이라도 땅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했다. 어쩌다 예상치도 못한 순간과 장소에서 당신을 마주하다니. 이 엄청난 행운을. 내가 누려도 되는 걸까? 짧은 대화를 나눈 후 헤어졌다. 나도 이만 카페에서 짐을 정리하고 나와 대리님과 안녕하고서 당신에게 카카오톡을 보냈다. 온갖 반가운 티를 다 냈다. 누구랑 있었냐는 당신의 물음이 왜 이리 좋은지 모르겠다.


[니네 집 가는 길 사람도 없드만 조심히 드가라.]


작고 사소한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분명 괜찮았었는데. 당신이 첫사랑이고 뭐고 몇 년을 사랑해왔고 뭐고 어떻든 간에 여차여차 잊어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도 했었는데.


[저 뒷모습 보고 바로 누군지 알았어요.]


이렇게 단 한 번의 재회에, 와르르 무너질 감정이었나.


[니 목소리 듣고 바로 알았다.]

[모습이 바뀌어도.]


온몸에 진동이 울렸다. 쉽게 가시지 않는 떨림이 당신을 주인으로 불러 세웠다. 당신이 나를 알아봤고 내가 당신을 알아봤다. 난 여전히 당신을 뒷모습만으로도 알아챌만한 사람이었다. 하긴 그렇게나 오랜 세월을 당신 뒷모습 보는 데에 허비했었는데. 어떻게 까맣게 잊나. 무슨 수로 없던 일처럼 다 지우나.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감정은 무뎌진 거였다. 당신은 나를 불태웠다. 남아 있는 불씨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당신과의 재회. 별거 없는 하루가 특별해지는 순간이었다.

무수한 시간이 흘러도 다른 누군가를 사랑했다 한들

당신은 여전히 내게 절대적인 존재였음을

재차 깨달았다.


처음으로 하루가 감사했다.


*

당신 손 닿을 법한 거리에 놓인, 그러니까 아주아주 가까이에 위치한 라이터이고 싶었어요. 라이터 앞에 애착이 붙으면 더 좋았겠고요. 당신이 사는 게 힘들어 담배 한 개비 꺼내 피울 때 동행하고 싶었어요. 불을 붙여주고 거칠어진 볼을 매만져주고 싶었어요. 붉게 충혈된 눈동자에 대고서 “괜찮다.” 수없이 속삭여주고 싶었어요. 당신은 요즘 어떻게 지내나요. 이렇게 물을 경우 당신은 변함없이 “죽지 못해 산다.” 대꾸할 테지요. 한동안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어 따라 말하고 다녔어요. 가령 당신의 말마디들을 따라 하고 다니면 당신의 시선으로 당신을 보고 알 수 없는 내면을 파악할 수 있을 듯했어요. 당신이 짊어진 삶의 무게와 잠 못 이루는 까닭을, 매일 술과 담배에 절어 살게 된 이유를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을 듯했어요.


원체 담배 냄새에 질색하던 본인이었는데 당신 좋아한 후로는 가장 아련한 향으로 바뀌었어요. 길을 가다 지나치는 골목길에서 담배 향기가 풍겨올 때, 혹은 마주한 누군가에게서 예상치 못한 담배 향기를 마주하게 되었을 때. 무탈하게 당신을 기억해 낼 수 있었어요. 끈질기게 엉겨 붙는 추억들을 끊어낼 수 없어 곤란했어요. 당신은 꼭 이런 식으로 나를 멈추게 만들고 돌아보게 만들었어요. 이전에는 세계가 붕괴되고 다 망할 지경이었어요. 나 이제 어쩌지, 자주 중얼거렸거든요. 멍 때리면서 감히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된 나를 상상조차 할 수 없어서 캄캄했거든요. 영원히 이렇게 등만 보며 살아야 하나, 하면서요. 그런데 이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현실을 살아가요. 당신이 나를 보며 웃어줬던 순간을, 슬며시 손을 포개오고 나를 안아줬던 추억을 회상하며 따지려 들지 않아요.


더불어 “첫사랑은 잊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태연하게 대답해요. “첫사랑 이름만 들어도 여전히 아련하다만, 이건 그 사람을 못 잊어서가 아니라 당시 그 사람을 좋아하던 나를 못 잊어서.”라고.


*

“난 꼭 기쁘면 얼마 안 가 더 큰 슬픔이 덮치던데. 행복 뒤엔 반드시 불행이 오던데.” 나의 발언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짜게 식었다. 날 축하하던 사람들의 입술이 일제히 오므라들었다. 그중 정적을 깬 것은 나의 가장 친한 과장님이셨다. “너는 애가 왜 맨날 그렇게 생각해! 좋게 생각해야지.” 끄덕끄덕. 걱정 범벅이인 마음을 알아 군말 없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렇지만 사실이었다. 내게 행복은 곧 불행의 징조였다. 행복을 느낄 경우 얼마 못가 불행이 찾아왔다. 행복의 양이 클수록 불행은 배로 늘어났다. 눈덩이처럼 어마어마한 속도로 불어나 이내 나를 부숴버렸다. 그러니 기쁨은 슬픔으로. 행운은 부담으로. 금방 휘발될 감정들에게 쉽게 놀아나지 말라고. 불행은 그런 식으로 내 앞에 등장했다.


마우스를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사람들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내게 일어난 어떠한 일에 관해 서로 축하하고 응원해 주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덩달아 들뜬 마음이 가까스로 불안을 밀어냈다. 잘될 거였다.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여기저기 모기 물린 자국이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간질거리는 게 이 때문인지 마음 때문인지 도통 모르겠다. 모기는 언제 죽나. 모기를 죽이면서 미안한 마음이 든 적 있던가. 사람 좋아졌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다는 건 그전엔 별로였다는 걸까. 이런 식으로 꼬여버린 심보를 살살 달래 미소를 지었다. 아주아주 오래전에 첫사랑에게 보냈던 카카오톡의 캡처본을 발견했다. 내가 그에게 꿈에 나왔단 내용을 전한 것이었다. 답변은 이랬다.


[꿈에서 뭐 하냐 내가.]


그러게. 뭐 했더라요. 이젠 기억도 나지 않았다. 새삼 신기해졌다. 절대로 잊지 못할 거라 단언했던 것들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일들이 되어버렸다.


웃지 못할 일들에 대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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