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게 서운해

by 주또

나를 달래는 목소리가 좋아서 한참을 투정 부리고 나를 걱정하는 태도가 좋아서 한동안 시름시름 앓고. 일부러 당신의 눈길을 끌고자 무슨 일 있는 척, 사연 있는 척하는 눈빛과 몰골을 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터덜터덜 힘없이 걷고. 우리는 함께 바다도 보고 산도 본 적이 있는데, 대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지?


내게 무용한 것 하나 없는 당신이다만 정작 당신 앞에서의 난 무 쓸모가 되어버리기 그지없었다. 당시엔 당신의 친절과 상냥함을 곧이곧대로 믿는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머리가 커버린 지금 당신이 이득을 취하기 위해 나를 가지고 논 것임을 안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다. 난 당신을 사랑했고 아마 이건 지구에서 내가 제일이었던 듯하다.


당신의 이름을 차마 부를 수 없어 참 많이도 적었다. 공부하려고 산 공책 위에 당신 이름을 적고 길을 걷다 마주한 모래 위에 당신의 이름을 적으며 서리 낀 창문 위로 당신의 이름을 적었다. 습관처럼 그랬다. 적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처럼. 그리고 연이어 누가 볼까 황급히 지워버리기까지. 찌질하기 짝이 없었다. 짚신도 짝이 있고 저마다 제 애인을 붙잡고서 팔짱을 끼고 포옹을 하고 뽀뽀를 하기 바쁜 와중에 난 혼자였다.


벚꽃이 필 무렵이면 당신과 같이 걷는 상상을 하고 눈이 올 때면 당신과 함께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는 장면을 그렸다. 빼빼로데이엔 당신을 주기 위해 부러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빼빼로를 돌렸고 티 안 나게 당신이 있는 곳이라면 마다하지 않고서 참석했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볼지 궁금해하며 이미지 관리에도 신경을 기울였다. 내 모든 세포가 당신 한 사람에게만 반응했다. 변화했다. 당신 앞에서의 내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적당히 수줍어지고 적당히 말수가 많아지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몰래 겹치는 액세서리와 비슷한 색 계열의 옷을 사고 설레기를 일쑤였다. 누가 들으면 “왜 그렇게까지 해?” 단골 질문이 튀어나왔다. 상아를 만나 당신을 이야기했다. 당신 같은, 정말로 내 스타일인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얘기했다. 그리고 덧붙여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다.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데 신경은 쓰인다고. 더는 사랑하지 않지만 당신에게서 사적인 연락이 오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고. 온종일 싱글벙글인 상태라고. 상아는 의아해했다.


“사랑하지 않는데, 그럴 수 있나.”

“그러게 사랑하지 않는데.”

진짜 진짜 사랑하지 않는데. 더는 당신의 행복을 함께 하는 사람을 질투하지 않는데. 미워하지 않는데.


거두절미하고 당신이 숙취 한번 없이 건강하기를 바랐다. 지겨워진 사랑에 관한 노래와 아름다운 시들. 나는 살면서 가장 웃긴 게, 우리가 결혼을 할 거라 생각했던 나 자신이었다. 운명은 언제나 나의 예상을 비껴갔다.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손깍지를 낄 수 없다면, 추호도 나와 맞잡을 마음이 없다면, 당신의 손목이라도 나 홀로 지그시 잡고 있고 싶었다. 당신의 응원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듯한 마음.


마음이란 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내 마음은 당신에게. 당신이 내 마음의 주인. 모든 작용의 원인이 되어서. 나로 하여금 나를 구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며. 당신은 내게 매우 해롭고 그로 인해 무해한 사람이 되고자 했다. 암만 당신이 내게 고통이라 해도 나만은 당신에게 아무런 통증을 주지 않는 인물로 기억되고 싶었다. 당신이 편히 쉬고 싶을 때마다 찾는 나무. 현실 속 잃지 않을 낭만. 따뜻했던 추억. 순정. 이를테면 이러한 것들로 남고 싶었다. 잊히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종종 꿈에 나온다.

당신은 그때마다 눈시울을 붉힌다.

나는 이 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진다.


*

좋아하지 않는 척을 하기란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녔다. 내 사랑의 대상이 되는 자에게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그 주변인들의 의심을 사지는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간질거림을 지나쳐 이미 뼈아픈 경지에 이른 사랑을 아닌 척 하기란 매우 간단했다. 무거운 마음을 감추기 위해 가벼운 마음을 데려왔다. 가벼운 농담으로 대처했다. 최대한 유연하게, 모두를 감쪽같이 속였다.


당신을 모르는 사람들이 오히려 편했다. 그들 앞에선 대놓고 당신을 칭찬할 수 있었고 당신을 좋아할 수 있었다. 자꾸만 빨간불을 건너는 내 사랑을, 감추지 않고 털어놓을 수 있었다. 눈물을 대롱 매달아도 전혀 이상할게 없었다. 대부분 그러한 일은 상아 앞에서 했다. 몸에 받지도 않는 술을 마시기도 했고 잔뜩 취해 행패를 부리기도 했으며 두 손에 얼굴을 묻고서 엉엉 울어보기까지 했다. 절절한 첫사랑에 얽매일 나이는 한참 지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팔 끓는 주전자처럼 가만있지를 못했다. 달그락달그락 금방이라도 달궈진 감정을 분출할 기세로 굴었다.


입안에 약을 물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쓰디쓴 약물을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처지인 것 같았다. 사실상 당신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일이, 내겐 몹시도 고역이라고. 당장이라도 뛰어가 손을 맞잡고 싶은데. 열 손가락 마디마디 깍지를 끼고서 제발 나를 사랑해달라고 떼를 써보고도 싶은데. 딱 한 번만 안아주면 평생을 넘어지지 않을 자신이 있을 것도 같은데. 나는 똑바로 걸어야 했다. 온 신경을 곤두세워 들통나지 말아야 했다. 시시때때로 소설가가 되어 당신과 나의 사랑을 주절거린다는 사실을 철두철미하게 감춰야 했다. 혹여나 잠꼬대라도 당신의 이름을 불러버릴까 긴장해야 했다.


마른 입술을 축이고 축축해진 손바닥을 바지춤에 닦아내리고. 나는 무너져내리고 당신은 누구보다 높이 올라가고. 난 등대가 되었어야 했는데, 도무지 빛을 낼 수가 없어서. 당신이란 행선지는 내게 불가피한 사고였어서. 차마 피하지 못한 당일, 이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불치의 운명. 난 그냥 상아를 붙잡고서 말한다.


“나는 계속 구겨져.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참아내느라 매초마다 구깃구깃해져.”

어느 날은 내가 만취한 꼴로 거리를 거닐다 우연히 당신을 마주치고 싶다. 그러고 너무 힘이 든다, 알려주고 싶다. 나를 힘들게 하지 말아요. 내게 올 리 없는 당신에게서 영원히 괜찮아지려면 무슨 수를 써야 하나요. 그러면 어울리지 않게 친절한 당신이 방법을 알려줄 것도 같아. 서럽게 눈물 토해내는 나를 안고서 등을 토닥여줄 것도 같아.


어제 본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죽기 전 두 달밖에 남지 않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보여줬어요. 첫사랑을 찾아가더군요. 나 역시 상상해 보아요. 죽음을 코앞에 둔 시점. 두려움 까맣게 잊고서 당신 앞에 감정을 토로하는 상상.


당신을 완벽히 놓지 못하는 여긴 지옥이에요.


*

사랑의 흔적이랄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마치 무언가 남아있는 듯했다.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두근거렸다. 나를 제일 잘 무너지도록 만들었던 사랑. 그 시절 사랑 앞에서 한없이 나약해질 수밖에 없던 내 모습이 그리 싫진 않았다. 사랑 때문에 살고 싶기도, 죽고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단언컨대 사랑이 없었더라면 그 시절을 버텨내지 못했을 거였다. 사랑으로 인해 이겨냈다. 저 얼굴 한 번 더 봐야지, 하는 심정으로 무엇이든 물리칠 수 있었다. 지겹던 우울과 불안을 떨쳐낼 수 있었다.


살포시 손끝이 닿았던 찰나를 떠올린다. 지난주 토요일. 어떨 때 설레냐는 친구의 질문에, 나는 “손과 손이 닿을 때. 손끝이 닿을 때.”라고 답했다. 나는 유독 사람의 손을 보는 걸 좋아한다. 그 안에 모두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살아가며 잡았던 것들과 놓았던 것들. 손을 잡는다는 건 짧게나마 그 사람의 체온과 동시에 삶을 느껴보는 것 아닐까. 잠시 동안 닿았던 손들에 대하여 깊이 골몰한다.


문득 남인 양 구는 당신이 서운했다. 생판 남인 것처럼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는 뒤통수가 매우 미웠다. 두 볼을 잔뜩 부풀린 채 씩씩거렸다.


*

오래도록 세수를 하고서 말간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아요. 역시나 웃지도 울지도 않는 애매한 표정에 썩 좋지는 않아요. 사람들과 부대낄 때마다 방긋 짓는 웃음은 한정적일 뿐. 조금도 내겐 자비롭지 않아요. 수시로 손을 씻어요. 어떻게든 더러운 먼지를 털어내고 싶어요. 당신을 알게 된 지도 꽤 오래됐네요. 이제는 제법 당신의 표정과 말투 속에서 의중을 파악하는 여유를 갖기도 해요. 친숙해졌다고 믿고 싶은데, 거리는 멀고도 멀어 그렇다고 확신을 갖지는 못하겠네요. 내게 베푸는 다정이 진실일까 수없이 고민해요. 그러면서도 그게 너무 좋아 심취해 벗어나지를 못해요. 분명 다 잊었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게 오만이었으려나요. 사라진 게 아니라 투명해진 거라고, 일러주는 걸까요.


당신을 처음 마주했을 시절. 단순히 소나기일 거라 예상했던 사랑은 착각이었고 아주 기나긴 장마였었죠. 당신은 짐작 못했을 테지만, 오랫동안 아팠어요. 면전에 대고 내색은 하지 못했다만 쏟아지는 비를 우산 없이 맞았어요. 누차 당신에게 “행복하세요”란 문장만 질리도록 되뇌었어요. 당신이 너무 미워 영영 떠나버렸으면, 하는 날도 더러 있었어요. 하지만 그 와중에도 혹여나 당신이 나를 싫어할까 조마조마했어요. 날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제발 싫어하지만 말아달라는 말을, 매일 밤 꿈속으로 들이닥치는 당신을 향해 빌었어요. 제발이라는 말이 몹시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자신을 자각할 때마다 비참해졌어요. 그래도 관둘 수가 없었어요. 미련했어요. 들통나지 않도록 잘 감췄어요. 걱정 마요.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닌 건 아녜요. 오로지 혼자 감당한 마음이에요.


당신이 앞머리를 내리고 왔을 적, 참 설레었는데. 혹시나 내 의견을 반영한 걸까 싶어가지고 설레발치고 그랬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저 귀여운 발상이었더라지요. 그런 식으로 의미 부여를 해야만 했어요. 그래야 당신과의 커다란 보폭이 한 뼘이나마 좁혀진듯하여 울음을 그칠 수 있었어요. 그렇게 살았어요. 그러다 당신을 어떻게 잊었나, 어떻게 잊었다고 자만했었나. 당신보다 당신과 있었던 예전 추억에 더 젖어 살았던 것 같아요. 변해버린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어요. 내게 무섭고 두려운 존재로 돌변해버렸으니까요. 결코 돌아갈 수 없을 거라 단념해야만 했던 시간이 길어요. 그리고 더불어 내게 기회란 건 한 평생 주어지지 않을 것이 명확했잖아요. 가망이 없었잖아요. 현실에 깨어있는 시간보다 잠들어있는 시간이 더 편했어요. 깨어있는 시간엔 주로 슬펐어요.


그리하다 그렇게, 해가 바뀌고 시나브로 당신을 놓아가고 있었어요. 데일 걸 알면서도 덥석 쥐었고, 내던지긴커녕 되레 꽉 쥐어 손바닥 안이 새카맣게 타버리고 말았던 순간을. 어느 날 어느 기점으로, 엉겁결에 지워가고 있었어요. 당신을 대면해도 무미건조했어요. 또 어떤 말로 나를 도려낼까, 가능한 마주하고 싶지를 않았어요. 사랑의 대상이 미움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었어요. 정말 다 괜찮아졌다 생각했어요.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간 거라고. 이게 맞는 거라고. 잠시 잠깐 내가 정신 나간 모양이었더라고. 당신은 내게 짧은 일탈, 한철의 노래에 불과하다고. 간단 명료하게 정리하고 말았어요. 그렇지만 계절은 돌고 도는 회전문처럼 다시 돌아오고. 사랑도 마찬가지인 건가요. 철 지난 노래가 다시금 유행을 하듯, 문득 떠올라 재생목록에 넣어두고 흥얼거리게 되듯, 당신도 내게 그러한 것이려나요.


사람들은요.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을 시 안정감을 느끼게 되어 구석을 찾게 되는 거라면서요. 그런데 난 당신 옆이어야, 당신과 밀착되어야만 비로소 안정을 되찾을 수가 있어요. 이런 난 무어라 정의 내려야 하는 건가요. 당신에게 폭로하고 싶은 것들이 수두룩해요. 당신은 나를 거짓말쟁이라 칭하며 믿지 않으려 한다만 난 언제나 당신에게 꾸준히 진실만을 고백하고 있어요. 도대체 이 지겨운 회전문은 어느 계절에 멈추려나요. 하루빨리 미성숙한 내가 당신을 닮아 완벽한 어른으로 거듭나기를 원해요. 그러니까 진짜 잊읍시다. 문을 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잖아요. 가망 없는걸 일찌감치 포기하지 못한 내 잘못이 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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