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주또

[웅 날씨 좋아. 너의 마음에도 봄이 올 것이야.]

잠들어 있던 것들이 생명력을 되찾는 봄. 챙겨 입는 옷의 두께가 한껏 얇아졌다. 벚꽃이 만개했다. 그는 꽃구경을 갔을까? 샘이 났다. 뾰로통해진 얼굴로 알록달록한 거리를 활보했다. 그의 번호를 괜히 알았다고 후회했다. 장난스레 저장된 이름을 거듭 되뇌었다. 그는 무심히 번호를 알려주고는 연신 졸리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까 걱정했다. 지금 가장 걱정해야 할 건 당신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나를 뒤로 제쳐두었다. 그를 우선순위에 두었다. 항상 그는 나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의 큼지막해진 눈이 그리웠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토요일엔 뒤척이다 해가 뜨는 걸 맞이했다. 빼곡히 약속을 잡았다. 그래야만 잠시라도 그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 꾀를 썼다. 제발, 내 머릿속에서 좀 나와요. 그의 모든 면들이 생생했다. 손 모양. 걸음걸이. 살짝 내려온 앞 머리카락까지. 세세하게 전부 뇌리에 콕 박혀 금방이라도 마주할 수 있을 듯한 막연한 기대감에 빠졌다. 일요일에 한 소개팅은 망했다. 난 어느덧 상대를 볼 때 그를 잊게 해줄 수 있을 만한 인간인가?라는 기준에 초점을 맞춘 채 상대를 판단하게 되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하루빨리 비워내야 했다. 그리하여 조급했다. 들어오는 소개팅을 마다하지 않고서 죄다 참석했다. 하지만 외려 그럴수록 짙어지는 건 당신 생각과 더불어 공허함뿐이었다.


일부러 다른 사람에 관한 관심도를 높이려 했다. 그의 이야기를 줄이고 다른 이를 언급하려 인간 힘을 썼다. 꼬이는 발음을 바로 하려고 했다. 연이어 풀리는 신발 끈 따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어디서 우연히 들었던 말에 의의를 두고 있었다.


“신발 끈이 풀리는 건 누군가 너를 생각하고 있는 거래.”

지수였나. 희끄무레했다.


그는 내게 한층 낮아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너도 이제 스물 후반이니까 네 앞가림을 할 줄 알아야지.”

그와 놀고픈 마음과 내 앞가림이 연관 있는 게 맞는 건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걱정해서 해준 한마디인 건 알았다만 은근히 선을 긋는 듯한 것이 못마땅하여 퉁명스레 대꾸했다. 길이 자꾸만 짧아졌다. 영원했으면 좋겠다. 절대 헤어 나오지 못할 미로 같은 곳에 당신과 단둘이 갇혀있고 싶단 생각을 했다.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도 이러한 내 까만 속내를 읽었더라면 어처구니없다며 조소를 날렸을 테지. 그가 보고 싶다. 밥 안 먹고 일도 안 하고 잠도 안 자고서 주야장천 그 얼굴만 눈에 담고 싶다. 물끄러미 바라본 그의 얼굴엔 과연 어떠한 감정을 읽어낼 수 있을까. 내가 없으려나. 캄캄해졌다.


과자를 입에 물었다. 봄 내음이 풍겨져왔다.


*

이틀 내내 비가 내리더니만 오늘은 해가 쨍쨍하다. 햇살을 받으며 버스 창가 자리에 앉았다. 메고 있던 가방을 벗어 무릎 위에 살포시 얹어놨다. 통 기운이 없었다. 날이 밝아지고 나니 더더욱 숨을 곳이 없었다. 엊그제 꿈속에서 날 싸늘히 내려다보던 그의 눈동자가 선하다. 마치 현실인 것 마냥 생생하여 소름이 다 돋았더란다. 다른 이들에겐 무한한 다정을 선사하면서 그가 내게만 흐린 눈을 하는 내용이었다. 차가웠다. 가늘게 늘어진 눈매를 잠자코 들여다보며 문득 꿈인 와중에 자각했다. 아-, 본디 이런 사람이었지. 그간 내가 착각 속에 산 거지. 멀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우리. 그걸 한사코 손에 쥐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내 몫이었더라 지.


깨어나니 온몸을 두드려 맞은 듯 아팠다. 아무나 사랑하는 그에게 아무나 되고팠던 시절이 있었다. 그다음 해에는 아무도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다음 현재. 아무도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고 싶다. 사람 마음이란 게 이리도 갈대 같아서 되겠나. 곧은 인물이 되기에는 이미 글러먹었다. 유일무이해지고픈 바람을 품는다는 점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였다. 그를 대면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어김없이 눈시울이 붉어졌다. 더 이상 그한테 흔들리지 말아야지. 별거 아닌 대화에 기뻐하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내려서. 와르르 굴러떨어진 볼링핀 같은 내 가슴을 줍기엔 한참 걸려도 역부족이었다.


[힘이 없어 보여서.]

차라리 땅끝 어딘가로 달아나 하염없이 당신만 그리워하다 돌아오고픈 심정이다. 가령 입맛이 없을 땐 배가 고파 죽겠을 지경까지 참다가 다시금 입맛이 돌 때쯤 밥을 먹으면 되듯이, 잠이 오지 않으면 다시금 잠이 들 때까지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면 되듯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서 사뭇 감정에만 집중하다가 사랑이 다할 때쯤 비로소 제자리를 찾고 싶다. 소연 팀장님은 큰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물었다.


“주영이 왜 행복한 글은 안 써?”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행복한 적이 없어서요. 만약 행복하다 해도 금방 잊어요. 행복은 더 커다란 불행의 징조나 다름없거든요.”

가물가물하지도 않다. 행복에 관련된 질문을 받을 시 입을 열 수 없었다. 행복은 금세 휘발되고 불행은 끈질기도록 오래오래 엉겨 붙었다. 그를 사랑하는 일마저 예외는 아녔다. 영락없는 슬픔. 그가 보고 싶었다. 심지어 새롭게 잘 되어가는 이를 만나 나름 나쁘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무쳤다. 도무지 떨쳐낼 수 없었다. 그가 버리지 못하는 유일한 존재가 되려면 대체 어떤 수를 써야 하나. 별안간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10년 후에 넌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까?”

짐작할 수 없는 머나먼 훗날. 내 영혼을 팔아서라도 당신 곁에 남아 긴 세월을 함께 하고 싶다면, 가당치도 않은 소리일 테지.


[슬프지 말자, 봄이잖아.]


*

지금 이 순간 말이에요.

내가 탈 택시를 같이 기다려주는 사람이 말이에요.

당신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제법 괜찮은 사람을 만났어요.]

보내려다 관뒀어요.

당신이 축하해 줄 듯하여서.



keyword
작가의 이전글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