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나마 마음껏 그를 볼 수 있어 참 다행이다. 매일 운다. 그가 좋아서 매일을 운다. 조만간 비워야 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운다. 그가 미워서 울고 그가 좋아서 울고 그가 내 상처를 걱정해서 운다. 실은 그와 난 별개인 터라 걱정하는 척일 수도 있다는 걸 다 알면서도 운다. 모든 면에서 그는 완벽한 나의 이상형에 속한다고 생각했으나 다시금 정정해 보니 그가 좋아져 그가 나의 이상형이 되어버린 듯하다. 누구를 만나 시간을 보낸다 한들 그를 떠올린다. 상대의 모든 행동에서 그가 겹쳐 보인다. 나는 느닷없이 눈시울을 붉히다가 허둥지둥 웃어 보인다.
그를 떠올리는 시간이 괴로워 혼자 있기 버겁다. 난생처음 일주일 내내 약속을 잡았다. 억지로 낯선 이와 인연을 만들기까지 했다.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한눈팔 사이 도로 그의 앞이었다. 그와의 커피 한 잔이 간절했다. 몇천만 원을 지불해야 한다 하여도 망설임 없이 그리할듯했다. 난 그를 위해 저지르고픈 일들이 늘어가고 반면 그는 한없이 반대로 간다.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걷는다. 그는 다 아는 척을 한다. 한데 내가 약을 먹는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사람에게 상처받아서? 지나온 과거에 얽매어 힘겨워서. 물론 다 맞는 말이다만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빠졌다.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래야 너도 약을 먹지 않을 테니까.”
“딱히 인간관계 때문에서만 약을 먹는 것도 아닌데요, 뭘.”
그를 쳐다보지 못했다. 땅만 보았다. 애꿎은 돌멩이를 발로 뻥 찼다. 신발 앞코가 더러워졌다. 구깃 해졌다. 주머니에 넣은 손을 힘주어 말아 쥐었다. 내가 마음을 못 이겨 기어이 그의 손을 잡는 날이 오지 않기를. 수차례 되뇌었다. 햇살이 눈부셨다. 꽃잎이 떨어졌다. 봉숭아로 물들인 손톱이 첫눈 내릴 때까지 색이 남아있을 경우 첫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하던데. 어릴 적이나 진지하게 믿던 얘기를 다 큰 성인이 된 지금서야 실제로 행해볼까 고민한다.
지식인에 검색해 보았다. 질문을 올린 사람은 상당히 많았다.
[봉숭아 물들이고 첫눈 올 때까지 봉숭아 지켜내면 첫사랑이 이뤄진다는데 진짜인가요?]
그중 제일 기억에 남는 답변은
[아니요. 봉숭아 물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질 사람은 이루어지고 안될 사람은 안됩니다.]
비록 당신이 첫사랑은 아니지마는. 낭만은 단호함에 쉽게 파괴되었다.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내가 나중에 나이를 먹으면 본인은 그땐 더 젊은이들과 놀 거라는 그의 농담에 속이 상했다. 세월이 흐르는 게 두려워졌다. 나는 어려져야 했다. 그와 영원히 놀고 싶었다. 영원은 없는 걸 알면서도.
*
[넌 인생 얘기하기에는 좋은 사람이었는데. 사랑 얘기 같은 건 하지 말 걸 그랬어. 다음엔 나보다 좋은 사람 만나면 방생하지 마.]
두 달 전에 헤어졌던가. 이마저도 희미하니 미안하다. 약 한 달 정도 만나고서 이별을 고했다. 당시 나를 원망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던 그 사람의 메시지가 여태 문득문득 떠올라 마음을 얼얼하게 만든다. 그러게에. 인생 얘기만 하기에는 참 적합한 인간이었다. 아니 솔직히 사랑 얘기하기에도 적당히 괜찮은 인간이었던 것도 같다.
매우 결이 다르다 느꼈다. 애당초 알고 있어 정리하려 했다만 되레 매번 고백을 해오는 그 사람을 염두에 두다가 그래, 한번 만나보면 다르지 않을까 하고서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던 거였다. 하지만 역시나 그래, 한번,이라는 심보로 진행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서로에게 악영향만 미쳤다. 날이 갈수록 차가워지는 나는 자신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본인한테 놀라움과 충격을 얻었다.
[가볍게 만나려던 건 아녔어. 미안해. 변명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겸연쩍은 미소만 남겼다.
*
내가 있어야 할 자리와 있지 않아도 될 법한 자리를 구분하는 게 어려웠다. 내게 건네는 다정 안에 숨은 속셈이 숨겨져 있는 것인지 아님 본연 그대로의 진심인 것인지 걸러내는 점 또한 애를 먹었다. 하나 이젠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인간은 필요를 다 하면 쓸모가 사라진다. 제 역량을 다 할 이유마저 잃었다. 만남과 헤어짐은 인생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숙제라 하던데. 한 페이지도 제대로 풀어내지 못했다. 피부처럼 당연해진 무언가들. 숨 쉬듯 들이쉬고 내쉬던 이야기들.
[머잖아 지겨워 애정 했던 이 모든 것들과 안녕일 테다.]
날이 어둑해졌다. 여태껏 커튼을 치지 않아둔 상태였다. 슬그머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문 쪽으로 다가간다. 문을 연다. 답답하다. 먼지 쌓인 마음을 안고 살아 하루가 퀴퀴하다. 플레이리스트에는 죄다 우울한 음색들로 꽉 차있다. 신나는 노래를 언제 마지막으로 들었더라. 선호하는 편도 아닐뿐더러 그러한 노래들엔 공감을 하지 못해 못 듣겠다. 내가 듣는 노래들의 가사들은 하나같이 실연당한 사람들이다. 몽땅 오늘 헤어지고 내일 헤어지고 헤어진 지 며칠이 지났고 몇 달, 몇 해가 되어버린. 혹은 짝사랑. 외사랑. 내 사랑만 이리 궁상맞고 처량한 건 아닌 모양이다.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몹시 피로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주 동안 과도하게 약속을 잡은 탓이었을까. 도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오늘 인천 날씨는 최고 15도까지 올라간 듯한데 나는 매트를 44도까지 올려놓고 누워있다. 이대로인 몸 상태라면 내일 감기에 걸려도 이상하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그러면 안 되었다. 나는 기를 쓰고 건강해야 했다. 아프지 않고 쉬지 않고서 열렬히, 아주 부지런히 당신을 좋아해야 했다. 비록 기껏해야 당신 발치에 닿지도 못할 것이 자명했다만. 제아무리 외관을 꾸미고 쉼 없이 알짱거려 보아도 발전은 없을 것이었다. 아무런 성과 없는 사랑이 비웃음거리였다. 이럴 바엔 차라리 그가 자주 착용하는 옷이나 시계 따위로 태어날 걸 그랬다. 그러다 기어코 당신이 싫증 낼 때쯤 버려진다 하여도 나 군말 않고서 제 숙명을 받아들일 텐데.
“주영아 난 네 사랑을 응원해.”
언제나 마음가짐이 중요했다. 그를 정성껏 잘 좋아하다가 잘 놓아주어야지, 결심했다. 짝사랑에도 이별이 있었다. 누군가를 마음에 들여 설레하고 아파하며 보내주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예의를 갖춰야 진정한 사랑을 했다고 할 수 있는 거겠다. 서툰 포옹은 아프다. 칼날을 손에 쥐면 베인다. 최대한 부드러운 방식으로 그를 안고 칼날이 아닌 칼자루를 잡아 우리 둘 다 다치지 않기를 염원했다.
“다 지난 옛날 일일뿐인걸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아직도 과거에 얽매어 있나.”
시간 따라 잊힌다.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은 일들도 한철 지나면 희미해진다. 어떻게든 살아가게 된다. 무색해진다. 빛바래진다. 그러한데 왜 이토록 눈물이 나는 걸까? 핸드폰을 없애고픈 심정이다. 그리하면 완전히 단절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연락을 하고픈 마음만 어찌할 수 있어도 좀 나아지지 않으려나.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우스웠다.
*
[덕현아 왜 뭘 해도 즐겁지가 않지.]
주변엔 날 걱정하는 사람들이 널려있었다. 어제 상아만 해도 그녀의 남자친구인 은기와 함께 나를 데리고서 파주까지 갔다. 기분전환을 시켜주기 위해서였다. 아울렛에 가서 쇼핑도 하고 예쁜 카페에 가서 맛있는 디저트와 아인슈페너도 마셨다. 그 후엔 임진각 평화누리 공원에 가서 다 같이 사진도 찍고 산책도 했다. 봄날을 만끽했다. 한데 즐겁지 않았다. 내가 웃고 있는데 웃고 있는 것 같지 않단 기분이 들었다. 연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수시로 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