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by 주또

어김없이 일주일 내내 약속을 잡는다. 지인을 만나고 대화하며 정신이 딴 곳으로 새지 않도록 있는 힘껏 노력한다. 사람을 믿으면 안 되었다. 수차례 당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당연해야 할 그 사실을 자주 깜빡했다. 어느덧 눈 떠보면 사람의 어깨에 이마를 맞대고 졸고 있었다. 나는 따뜻한 것들이 좋다. 따스하고 상냥한 것들만 가득한 세상을 꿈꾼다. 하지만 당장 그건 불가능하다. 내 사랑마저 벼랑이다.


새로이 잘 되어가고 있는 사람에게서 고백 비스름한 말마디들을 들었다. 설레었는가. 설렘이 가능한가. 한 사람을 좋아해서 다른 사랑이 더디다. 더디다 못해 진전이 없다. 사귀자는 말처럼 들려오는 말끝마다 벽을 세웠다.


“아직 오빠에 대해 잘 몰라서.”

오늘날 집에서 구월동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도중에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을 잘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고백을 다음으로 미뤄버린 건 사실 핑계 아녔나. 여태 머릿속에 가득한 그가 문제였다. 그 사람을 만나는 동안에도 수시로 그를 떠올렸다. 굉장한 실례였다.


[그러게. 왜 이런 거에 의미를 두니.]

[당신이니까 의미를 둔 거죠.]

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들.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눈이 뻑뻑하고 두통이 밀려왔다. 만날 사람을 찾다 한 5년 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와 함께 카페를 왔다. 친구는 공부를 하고 나는 노트북을 두드렸다. 이전에 했던 작업물들을 입체화 시키는 작업을 했다. 허리가 아팠다. 요즘 필라테스를 예약하고서 출석을 완료하는 일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 핑계 저 핑계 다 생겼다. 사람만 주야장천 만나려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심지어 인제 진짜 잘나가보자, 결심하자마자 무섭게 발을 다쳤다. 회사에서 촬영을 돕다 벌어진 일이었다.


상품을 옮기다 가벽을 툭 건드리는 바람에 가벽이 쓰러졌다. 그러면서 내 발을 깔아뭉갰다. 악 소리도 내지 않았다. 지켜보던 소연 팀장님과 수진이 더더욱 놀랄까 봐 그랬다. 가벽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발을 뺄 수 있는 타이밍은 있었다만 그러지 않았다. 내가 발을 빼는 찰나 가벽이 주저앉는 속도를 더해 빠르게 내려앉아 두 동강 날까 봐 그랬다. 차라리 내가 두 동강 나는 편이 나았다. 여러 사람들에게 미안했고 쪽팔렸다. 얼굴이 붉어졌다. 수진과 소연 팀장님이 서둘러 내 발을 빼주었다.


사색이 된 수진이 내 신발을 벗기고 양말을 벗겼다. 발등이 붓고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민망해 웃었다. 소연 팀장님은 다급히 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다행스럽게도 가벼운 타박상이었다. 약을 먹고 이틀 아팠더니 멀쩡해졌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연락이 왔다.


[누가 다쳤어.]

[너 다리 괜찮아?]

[뭐야. 조심해라.]

등등. 두 볼이 화끈거렸다. 절로 한숨이 따라붙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난 다친 나를 걱정하지 않았다. 가벽이 망가질까 봐 발을 빼지 못했고 모든 게 우당탕탕 된 후에도 난 벌겋게 부어오른 본인 발등보다 가벽을 신경 썼다. 나 하나쯤이야 소중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항상 스스로한테 서운했다. 하나 그런다 한들 화해는 역부족이었다.


난 나를 좋아하지 않았고 네 잘못이 아니란 말에도 부정했다. 전부 내 탓이었다. 내가 문제아였다. 사고뭉치였다. 예민한 인간이었다. 고칠 건 고쳐야 한다 했다. 고치는 법을 몰라 발만 동동 굴렸다. 어릴 적엔 하늘을 많이 보았던 것 같은데 요새는 땅만 보고 걷는 날이 늘었다. 어제 아침엔 또다시 지겨운 비가 내렸다.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빗방울 따라 고개를 숙이며 과거에 일면식 없던 이와 주고받았던 메일을 끄집어냈다.


[비는 하늘이 사람을 위로하는 방식이래요.]

온몸이 눅눅했다. 물에 젖은 솜 이불을 덮은 것 마냥 무거웠다.


*

내가 불쌍했나 혹은 가벼웠나. 재미있었나. 상처를 치유해 주고자 하는 이의 말이 선뜻 믿기지 않았다. 계속 이어지는 이명과 극심한 어지럼증으로 인해 메니에르 약을 꺼내 먹었다. 항상 높은 곳에 있는 것처럼 귀가 먹먹했다. 가끔은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귓속이 꽉 막힐 때가 있다. 간혹 청력에 문제가 생기면 어쩌나, 차분하게 고민한다.


단언컨대 다른 건 몰라도 사람은 신뢰하는 게 아니었다. 한데 조금만 서글서글하면 그 중요한 걸 간과했다.


일교차가 심하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외투를 두껍게 껴입을 경우 더웠고 그렇다고 해서 얇게 입고 나올 경우 추웠다. 애매한 날씨에 모호한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졌다. 아니 실은 명확한데 나 혼자 불분명한 척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시금 모르겠다는 말이 들었고 이건 참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알고 싶지 않은 걸 수도 있겠다는 판단을 했다. 배가 고팠으나 밥을 먹지 않았다.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식욕이 돋아 이것저것 주워 먹고서 포동 포동 해졌다는 말까지 들었었는데 이틀이 지난 현재 입맛이 뚝 떨어졌다.


건강을 위해 끊겠다던 커피도 도로 마신다. 오히려 내가 술을 마실 수 있고 담배를 태울 수 있었더라면 한결 나았을 듯했다. 매 순간 일분일초마다 밀려오는 이 불안감과 두려움, 자기혐오를 어떻게 해야 외면할 수 있을는지.


[살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그 누구보다 오래오래 살 것이었다.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은 거겠지.]

정정해서 똑바로 고쳐 적었다.


이따금 꿈엔 아는 이들이 총출동하여 이유 없이 나를 조롱하고 핍박했다. 돌에 맞은 나는 대자로 쓰러져 죽었다. 깨어났다.


내일이 왔다.


*

너를 위한다는 말에 진심은 과연 몇 퍼센트 가미되어 있었을까?


*

다 필요 없고 그냥 그하고만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모저모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술을 진탕 마시고서 취한 뒤 그에게 연락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할 시에 그가 나타나 내 맞은편에 앉아주었으면 좋겠다.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왜 이리도 많이 마셨어.”

세상 가장 다정한 어투로 나를 걱정해 주었으면 좋겠다. 난 나를 걱정하지 않으니 당신이라도 나를 걱정해 줘요. 심보가 못되었다. 난 큰 사람이 되긴 글렀다. 내가 겪는 모든 계절은 푸르지 않고 알록달록하지도 않았다. 죄다 흐리멍덩하고 흑백이었다. 아주 드물게 그가 내 글을 보고 있지는 않을까, 의심해 본다.


[폐 끼치기 싫어서 안 볼 거야.]

그가 나의 인스타그램을 보지 않을 거란 선언은 진담이었을까. 실은 관심이 없어 이런 거에 시간을 할애하지 않겠단 속뜻은 아니었을까. 그를 가둬두고 나만 보고프다. 이러한 욕심이 들 때면 왜 난 신이 아닌가, 원망한다. 그만 생각해야겠다. 어디로 가야 제일 멀리 도망갈 수 있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행복한 적이 없다. 이대로 행복을 모르고 죽는다면 조금 억울하다. 규리의 생일날 규리가 보내왔던 메시지가 불현듯 시야를 드리웠다.


[나는 네가 나랑 다르게 감정에 참 예민하고 섬세한 게 보여서 개인의 고충이 참 크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다 보니까 네가 항상 행복했으면 좋겠어. 섬세한 만큼 행복도 두 배로 느끼지 않을까?]

규리야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 내가 있어야 할 곳을 못 찾겠어. 사방이 지뢰밭이야. 이 끔찍함을 너는 평생 몰랐으면 한다.


*

집에 오니 파마약 냄새가 진동한다. 동생 녀석이 집에서 다운펌을 한 까닭이다. 녀석이 천안 자취방으로 돌아가기 전, 같이 노래방에 가 12곡 정도 목이 터져라 부르고서 다코야키가 먹고 싶다길래 사줬다. 막 나온 다코야키 6알을 뜨겁지도 않은지 잘도 먹더라. 녀석을 보내는 길은 언제나 걱정이 태산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녀석이 수요일 밤에 다시 인천으로 올라오기까지 나도 내 생을 사느라 바빠 잠시 녀석을 잊는다.


하나밖에 없는 내 동생. 사람들은 남매가 어찌 이렇게 친할 수가 있냐며 의아해한다. 학창 시절 녀석에게 상당히 못해준 것이 마음에 걸려 성인이 된 후로는 줄곧 잘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녀석도 알고 있으려나? 알든 모르든 상관없다. 내가 좋아서 해주는 거니까. 동생이 버스에 올라타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들었다. 나 역시 덩달아 머리 위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녀석은 짐칸에 가방을 넣고 버스 계단 오르기 직전까지 나를 걱정했다.


[다 잘 될 거야. 걱정 마!]

왜 어린 네가 나를 걱정하지. 미안했다. 그러고 보니 난 미안을 왜 이리 남발한담. 별게 다 미안해지는 날이 수두룩했다. 달력엔 온통 비 내림이었다.


*

내일이 무섭다.

유난이다.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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