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듣고 싶다. 보고 싶다. 그립다. 그를 기다리는 시간.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이 년. 어느덧 삼 년. 사 년. 오 년. 그렇게 육 년. 어쩌면 더할지도. 단 한 번도 올 것 같던 순간이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서 까치발 든 채 맨발로 그를 기다린 이유는 다름 아닌 사랑의 속절없음을 증명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부질없는 걸 알면서도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마음을 돌려세우는 법을 몰라 아등바등했다. 노력이 무색하게 발버둥 쳐봐도 늘 같은 곳, 같은 자리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제 도달할 곳과 당도해야 할 곳이 사라졌다. 목표 잃은 깃발. 맥없이 쓰러져 발에 밟힌지 오래이다. 난 항상 그가 볼 수 있는 위치에 서있어야 했다. 다만 불가능하여 뒤로 한참을 밀려났다. 마음만 먹으면 그를 마주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이었다. 그리고 그 현실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노상 그를 꺼내봤다. 다 다른 모습의 그를 완벽히 회상해낼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을 깨달을 시엔 스스로가 얼마나 그를 유의 깊게 쳐다보았는지를 알 수 있다. 해가 저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캄캄했다. 고작 7시밖에 되지 않았었는데. 아주 오래간만에 응시한 하늘은 먹색이었다. 내일은 또 비가 온다고 하더라. 징글징글하다. 안 그래도 비 내리는 기분에 한몫 더한다.
내가 기다리는 그가 어디쯤 달아나있을까. 그래도 허공 위에 그려놓은 그의 모습은 전혀 흐트러짐 없었다. 반듯했다. 한 평생 연락할 구실을 찾아내느라 힘겨웠다. 조리 있게 말을 잘하고 싶었다. 최대한 담백하게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상대가 부담 갖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이건 누구를 만나든 간에 동일했다. 그렇지만 그가 가장 짙었다.
어쩌다 보니 나는 웃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재미있는 인간.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던 것 같다. 첫사랑에게는 재미없는 사람이란 소리를 들었었는데. 이따금 그가 뭐하고 지내나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의 인생에 나란 사람은 평생토록 존재할 수 있으려나. 영원을 믿지 않으면서도 또 이런 쓸데 없는, 근거 없는 소리를 한다.
근 이 년 만에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체육공원을 걸었다. 걸으면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저 멀리서 걸어오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영락없이 그를 그리워하는 중이었다. 도무지 부정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명확하다. 그가 보고 싶다. 오죽하면 입버릇처럼 하는 말. 보고 싶다. 현재에도 미래에도. 날 슬프게 할 사람은 그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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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씻는다. 열 마디 죄다 깨끗하게 씻는다. 뽀드득 뽀드득 효과음이 들려오는 것도 같다.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고는 닭 가슴살 하나와 마카롱. 사색이 된 얼굴로 거리를 활보한다.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만큼의 비극은 아녔으면 좋겠으나 점차 희극과 거리가 멀어진다. 상반된다. 좋지 않은 일들은 한꺼번에 몰려와 나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는다. 겨우 숨이 붙어있다. 호흡을 할 때마다 위가 쓰려 잠시 멈춘다. 어지럼증이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사람 눈을 보고 있는 데도 내가 정녕 눈을 마주하고 있는 게 맞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종종 이러할 경우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다시 뜨는데 매번 카메라 필름을 갈아끼우듯 사물이 한 템포 느리게 바뀐다.
새로 산 신발은 청바지 물이 들었다. 이 청바지는 여러 번 세탁해도 물 빠짐이 멈추지를 않는다. 그럼에도 애정 하는 바지인 터라 자주 입는다. 친했던 사람과 멀어지고 멀어졌던 사람과 도로 가까워졌다. 하나 나는 반가움보다는 슬픔에 더 크게 영향받는다. 재회가 민망할 정도로 무심해진다. 이번 연도에는 이별이 숱한 게 맞았다. 부서장님도 퇴사하고 날 괴롭혔던 이도 퇴사하고 정다웠던 사원과 단절하고 대학생 때부터 줄곧 친하게 지내왔던 친구와도 생판 남이 되었다. 더불어 이번 달을 끝으로 친애하는 우리 팀장님과도 안녕이다. 그리고 조만간 나 역시 여기 회사에 남아있는 인물들과 작별을 겪을 테지. 연이어 매일 가던 이마트 편의점 사장님과도 안녕. 빽다방 사장님과도 안녕. 안녕할 것들이 참 많기도 하다.
이곳은 나의 첫 직장이자 첫 사회생활의 시작이었다. 이전에 프리랜서와 패션 브랜드 스타트업 보조로 활동하기도 했다만 그건 이만큼 슬프지 않았더란다. 여기를 나가고 나면 못 볼 사람들이 아쉽다. 익숙해진 전부가 벌써 아련해 눈가를 촉촉이 적신다. 나는 과연 어떤 사원이었을까. 잘했으려나. 잘못한 점들만 한가득이었으려나. 켜켜이 쌓인 시간들이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 솔직히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힘든 추억을 이길만한 좋은 추억들이 선명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콕 집어 말 못 하겠다. 이때 퇴사를 하겠다,보다는 이때쯤이지 않을까, 한다. 나를 아쉬워하는 인물들은 몇이나 되려나.
“여기 나가면 밖에서 보면 되는 거지.”
정말 이들을 볼 수 있을까. 인연이라는 게 영속성을 가질 수 있을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과연 내가 여기서 얻은 게 있나?라는 질문을 수시로 해보았는데 오늘은 사뭇 달랐다. 내가 여기서 얻은 걸 잃어버리면 어쩌나? 란 물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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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표를 쉼표로 잘못 표시하는 일은 몹쓸 버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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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저질렀던 일들이 되레 화살이 되어 내게 꽂혔다.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람을 만나고 뒤를 도는 순간, 항상 반성했다. 내가 무얼 실수하지 않았을까? 아 왜 좀 더 자상하게 말을 하지 못했을까? 행동이 뻣뻣했을까? 별로였을까? 사실상 타인은 나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음이 분명한데 혼자 난리 법석이었다.
그렇다 보니 타인 잘못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펼쳐보기보단 나 자신을 낱낱이 파헤쳐 보았다. 정말 네 잘못은 없는가? 네가 이상했던 건 아닌가? 그럴 수도 있겠다. 본인을 꾸짖는 편은 빨랐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관련된 만화 이미지 스무 장 정도를 카카오톡 메시지로 전달받았다. 하나씩 넘겨보다가 인터넷 검색창에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검색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가토 다이조(加藤諦三)의 자녀교육서 『착한 아이의 비극』에서 제안한 신조어로, 타인으로부터 착한아이라는 반응을 듣기 위해 내면의 욕구나 소망을 억압하는 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심리적 콤플렉스를 뜻한다. 이러한 형태는 유기공포(fear of abandonment)를 자극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어린이의 기본적 욕구인 유아적 의존욕구를 거부하고 억압하는 방어기제로 탄생한다.]
몹시 어려운 낱말들이 즐비한다. 메시지로 받은 이미지에서는 조금 더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상대의 애정을 얻고 싶은 욕구가 지나쳐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살지 못하고 별것도 아닌 일에 불안감이나 죄책감을 느끼는 마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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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기 싫다. 이 지겨운 짓을 대체 언제까지 반복해야 하지. 짜증이 늘었다. 아라 씨는 내게 “요즘 주임님 화가 늘었어요.”했다.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감정 하나 제대로 통제 못하는 스스로가 못마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