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버스를 타러 가기 위해 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친한 차장님께 전화가 왔다. 마침 핸드폰을 보고 있던 터라 진동이 세 번 울리기 전에 냅다 받았다.
“여보세요.”
핸드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너 왜 그렇게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가냐.]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금방 사라질 웃음기였지만 말이다.
“저 슬퍼요.”
돌아오지 않을 것들이 슬펐다. 오늘 소연 팀장님이 퇴사를 했다. 이제 이층 쇼룸에 가도 소연 팀장님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한 생각이 날 슬프게 만들었다. 언제나 내가 갈 시 꺄르르 소녀처럼 웃으며 맞이해 줄 그녀가 사라졌다. 존재했다가 존재하지 않는다. 부재는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물론 우리는 두 달에 한 번 꼴로 만날 거다. 당장 다음 주만 해도 얼굴을 보기로 했다. 다만 평소대로 매일을 함께 하진 못할 거란 얘기이다. 수진은 사람이 나갈 때마다 우는 나를 보며 걱정했다.
“너 그래서 어떡할래.”
나도 울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눈물이 흐르는 걸 어떡하랴. 벌써 온기가 사라진듯한 쇼룸 소파에 앉아 슬피 울며 중얼거렸다.
“아, 애 같아.”
그런 나를 아라 씨는 감정에 솔직해서 좋은 거라고 했다. 때로는 부럽기까지 하다고 했다.
“운다고 해서 애 같은 건 아니에요.”
아라 씨의 따사로운 음성에 기대어 잠들고팠다. 소연 팀장님은 나의 버팀목이었다. 그녀가 육아휴직을 들어가기 전에도 의지했고 그녀가 육아휴직 중인 일 년 동안 그녀가 돌아오기를 꼬박 기다렸다. 마침내 돌아온 그녀였는데. 그녀는 나의 많은 부분들을 알고 있었다. 희한하리만치 그녀 앞에선 민낯이 되어버리는 나였다. 전적으로 신뢰했다. 남들에게 섣불리 하지 못하는 비밀조차도 낱낱이 풀어 보여주었다. 본래 난 보자기에 꽁꽁 감겨있는 사람 같았다.
그녀에게 줄 퇴사 선물과 편지를 준비했다.
[살아가면서 존경할 만한 인물을 만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전 운 좋게도 이르게 맞이했었네요. 존경해요. 항상 행복하시고 늘 그렇듯 예쁘게 웃을 일만 있었으면 해요.]
사랑 많은 소연을 만나 행복했다. 그녀가 내게 준 다정만큼 나 역시 그녀에게 전해주었을까. 앞으로 다가올 이별은 몇 번이 더 남았나. 수진은 또 볼 수 있는 사이이기에 이별이 아니라 했다. 그렇다면 또 볼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은 이별이 맞나.
민경이 포스트잇에 네잎클로버를 그려달라고 했다. 본인이 그려봤으나 잘 되지를 않았다고 대신 부탁한다고 했다. 행운이 필요한 사람에게 줄 거라고 덧붙였다. 정성스레 그림을 그렸다. 하나 내가 손목이 좋지 않아 글씨든 그림이든 펜을 잡고 종이에 하는 걸 잘 못하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삐뚤빼뚤. 찌그러지는 행운. 한 열 장 정도 포스트잇을 낭비했다. 그래도 행운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기에 제법 잘 그려주고팠다. 이름 모를 그 사람에게 정성과 다정을 한껏 들인 선물이 되고자 했다.
도로 위로 차들이 즐비했다. 내가 버려야 할 감정을 못내 버리지 못한다. 핸드폰을 확인했다. 어깨에 덮었던 외투가 사라져 추웠다. 이토록 추울 수가 있나. 봄이 이렇게 시려서야 되는 건가. 여름이 오면 좀 나을까.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 한결 부드러워질까. 누구는 봄이 푸릇푸릇해서 좋다고 하더라. 한데 나는 모든 게 앙상해진 겨울에 마음이 훨씬 편했다.
*
술을 마셨다.
“나 흐트러지는 사람 싫어해.”
그 말을 기억하며 난 한 평생 언제고 단정하리라, 다짐했다. 그에게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된다는 게 나쁘지 않았다. 나를 파악하고 있는 듯한 어투가 좋았다. 올곧은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의 말을 잘 들어야 했다. 그가 나를 미워하면 안 되었다. 그러면 우린 다신 볼 수 없을 사이가 되어버릴 듯해서. 그가 나를 만나 주지 않는 날이 올까 봐, 눈앞에 장막을 친 듯 캄캄해졌다. 보고 있어도 그리운 인간. 그를 사랑하는 모든 날들이 어릿하다.
그를 배제하고는 쓸 말이 없어 큰일이다. 이미 켜켜이 쌓인 슬픔이 한 무더기이다. 어쩌지. 어쩌면 좋지. 어찌할 수 없는, 아무런 대책도 해결책도 세울 수 없는. 우는 수밖에.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어 소란스럽고 위험한 거리를 몇 시간째 빙빙 돌았던 것이다. 무섭지 않았다. 겁은 엄청 많은 주제에 그 사람만 연락해 준다면 이러한 거리쯤은 몇백 번도 더 지나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방금 있었던 일도 한 일 년 전 일처럼 흐릿해. 무슨 말을 뱉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를 않아 애를 먹어. 과연 이 기억은 현실이었을까. 혹은 내가 쓴 글 중 일부였을까. 꿈이었을까. 허구와 사실 경계에서 허둥거려. 하지만 참 희한하지. 당신과 있었던 일들은 죄다 선명한 게. 근데 이 또한 언젠간 잊히고 희뿌옇게 번질거라는 것이 무서워. 없어진 기억만큼 더 멀어져 버릴 듯하여서 말이야.
*
[근데 제가 쉬어도 될지 모르겠어요.]
[주영이 쉬어도 돼!]
[그래요? 이 말이 듣고 싶었나 봐요.]
[주영이는 무조건이야. 여행 다녀와.]
이직할 곳을 구해두고서 퇴사를 해야 할지 조금은 쉬다가 다시 마음을 잡고서 취직 준비를 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사실상 쉬어갈 타이밍이 절실하긴 했다. 기계도 재정비 기간이 필요하듯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본래 여행이라면 질색하던 인간이었는데 해가 바뀌면서 여행을 자주 다녀야겠단 계획을 세웠다.
가는 곳마다 버리지 못한 것들을 버려두고 오자는 결심을 했다. 내일은 비록 가까운 곳이지만 친구들과 일박 이일로 가평에 다녀오기로 했다. 느지막한 점심쯤 기차를 타고서 저녁에 도착해 고기를 구워 먹을 예정이다. 그리고 그다음 날엔 남이섬에 가 자전거를 타고 카페에 가서 도란도란 수다를 떨 것이다.
자, 그렇다면 가평엔 무엇을 버려두고 와야 할까. 어김없이 당신이려나. 외에도 쓸데없는 잡생각, 미련, 두려움, 과거와 불신, 불안, 집착, 등등이 있을 테지. 가끔은 감정 없이 사는 사람들이 부럽다. 난 백날 천날 강해지라는 소리를 들어도 그러지를 못하는데. 감정에 한없이 굴복하는 타입인데. 친한 차장님이 속이 터질듯하단 어투로 한마디 하셨다.
“넌 왜 이렇게 다 꼬이냐. 연애도 그렇고 너한테 나쁘게 구는 사람한테도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마음이 너무 여려가지고 애가.”
“저도 이러고 싶지 않아요. 근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는데 어떡해요.”
내 머리카락이라도 쥐어뜯고픈 심정이다. 차장님과 나는 번갈아가며 한숨을 쉬었다. 태생이 이런 걸 어쩌 하나. 아니 태생부터 잘못된 게 맞나. 내가 나를 이렇게 망가지게 만든 건 아닐까. 대부분의 감정에 솔직했고 겉으로 드러났다. 숨기지 못했다. 네가 아직 순수해서 그런 것 같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그때마다 골몰한다. 얼마나 때묻어야 이 버거운 감정 속에서 무뎌질 수가 있는 것인가.
필라테스 강사님께서 몸을 풀어주시겠다며 뭉친 근육을 팔꿈치로 꾹꾹 눌러 마사지해 주셨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소리를 빽빽 질렀다. 그 와중에 사람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중 어느 것을 더 괴로워할까 궁금해했다.
속으로는 그의 이름을 연신 외쳤다.
차라리 몸이 아픈 게 나을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