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말부터는 약 40일간 비가 내릴 예정이란다. 이 소식을 접하고서는 사람들의 우울 기간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주위를 보면 날씨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래도 날이 흐리다 보면 해가 자취를 감춰 빛이 없고 몸도 축 처지고 스산해지기 때문인 것 같다. 이따금 비 오는 날 기분이 좋지 않아질 때면 이전에 패션 브랜드 스타트업 일을 도와주러 다녔던 기억을 떠올린다. 당시 사장이 두 명, 직원 아닌 직원은 나 한 명이었다. 사장 중 한 명은 사무실에 잘 나오지 않고 감정 기복이 무척 심했다. 특히나 비 오는 날에는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내내 뚱한 얼굴로 있다가 다른 사장이 힙합 음악을 틀었다고 화를 내며 방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황당했다. 한껏 짜증을 부리며 노트북을 탁, 소리 나게 닫던 게 종종 머릿속에 그려진다.
DHL 이벤트에서 여행을 가고 싶은 곳과 그 이유를 적으면 여행 굿즈를 주겠다고 했다. 난 일본이라고 답했고 내가 말한 이유를 옆자리 지훈 과장님이 받아 적었다.
[해보고 싶은 것은 한가하게 앞 동네 돌아다니고 커피 마시기. 거기 사는 인간처럼 그런 거 해보고 싶어요. 계획을 짜기 귀찮아서가 아니라.]
물론 계획을 세우는 일에 있어서는 형편없다. 그 쉬운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 정하는 면에서도 애를 먹는다. 차라리 누가 여기 가자, 이거 먹자, 정해주는 편이 훨씬 낫다. 그러면 군말 없이 잘 따르는 쪽이니 말이다. 여하튼 여행을 가서 그냥 하릴없이 동네나 걷고 카페에 들러 음료 한 잔을 마시고 어슬렁어슬렁 골목 어귀에서 시간을 소비하고 싶은 건, 그러한 이유에서가 아니다. 정말 말 그대로 그곳에 사는 인간 마냥 근사하고 특별한 일정 없이 소소한 일상스러운 걸 즐기고 싶은 까닭에서다.
어딘가로 멀리 떠나와 정착하여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싶은 것일 수도 있겠다. 늘 떠나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실행에 옮기지를 못했다. 겁이 많아서 혹은 게을러서 늘 생각으로 그쳤다. 남들이 어려운 거 아니라 하는 일들이 내겐 어려웠다. 누차 답답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수진과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문득 그런 글을 보았다고 했다. 마음이 건강해야 겉모습도 잘 늙지 않는다는 내용의 글. 동감했다. 잇따라 내가 덧붙였다.
“맞아. 마음 상태가 좋지 않으면 얼굴에서 먼저 드러나게 돼. 마음이 좋지 않은 사람은 동공에 힘부터 잃는 것 같더라. 뭔가 초점이 없고 생기가 없달까.”
수진은 골똘히 고민하는 듯 몇 초간 침묵하더니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런 거 같아. 너도 항상 초롱초롱하다가도 갑자기 보면 동태 눈깔 되어 있고 그렇더라. 갑자기 생각이 많아지는 건가?”
“그렇지 뭐.”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어물쩍 넘겼다.
바스락거리는 이불 소리가 듣기 좋았다. 이대로 깊은 잠에 빠지고팠다. 소연 팀장님이 전화로 다 추억이 될 거라는 말을 했었다. 진짜로 그럴까? 잠깐 눈 감았다가 뜰 경우 아주 길고 긴 꿈을 꾸고서 이제야 막 깨어난 것처럼 개운하기를 바란다. 힘들어할 시간이 없었다. 꺾어 신은 신발을 제대로 고쳐 신고서 걸어가야 한다. 상당히 오래 꺾여 있던 탓에 자국이 남아 당분간은 신경이 쓰일 테지만 머잖아 이마저도 무뎌지는 날이 올 거였다. 제아무리 슬퍼도 절대로 울지 말자고 다짐했다. 잔뜩 화가 난 상아에게 메시지를 입력했다.
[이제 힘들지도 않을 거고 마냥 무너지고 있지만도 않을게. 내 삶 착실히 살아가며 내 행복 내가 찾을게.]
더 이상 그에 관한 글을 적지 않기로 했다. 그를 상기시키는 모든 걸 관두기로 마음먹었다. 그간 그를 떠올릴 경우 글을 쓰는 일이 한결 쉬웠다. 조금 더 세세히 적기 위해 머리를 굴리다 보면 어느덧 스펀지처럼 그를 흡수해버린 내가 있었다. 도로 뱉어내야 한다. 적지 않을 것이다. 온전한 나로 돌아갈 것이다. 할 수 있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게 뭐야, 네가 생각하는 글을 잘 쓴다는 건 뭔데?”
“글쎄요. 솔직하고 진정성 있는 글을 쓰고 싶어요.”
“지금은 안 그러고 있어?”
“그러고 있죠.”
“그럼 지금도 잘 쓰고 있는 거 아니야?”
“흠, 그런가.”
근데 이젠 그러지 못할 것 같다는 게 문제였다. 그를 배제한 채 글을 적고 숨을 쉬며 멀쩡한 척 새로운 인연을 만나 살아가야 한다니.
당신은 나의 지난 추억이 되세요.
거짓되면 어쩌나.
*
마지막으로 하고픈 말은, 다음 생엔 같은 나이대에 태어나 이른 나이에 그를 만나고 싶다. 어린아이인 그가 어엿한 성인이 되어 오늘날이 되기까지의 성장 과정을 함께 하며 지켜보고 싶다.
모쪼록 10년 뒤엔 그가 가진 꿈 전부 다 이루었기를 바란다.
*
“한번 만나볼래?”
벤치에 앉아 길거리 음식을 먹다가 받은 다소 뜬금없는 고백이었다. 무드도 없었다. 이 애를 알게 된 지 정확히 일주일 되는 날이었다. 첫 만남은 친구의 친구로 모여 밥을 먹었고 그 후 정산을 하기 위해 카카오톡으로 돈 봉투를 보냈더란다.
[부자 되세요, 선생님.]
솔직히 답장이 오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아니면 오더라도 짤막한 응,이라든가 고마워, 따위일 줄 알았다. 그래서 별 신경 안 쓰고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 일어나 보니 새벽 2시 본인은 이제 들어간다는 식의 연락이 와있었다. 그 계기로 꾸준히 카카오톡을 주고받았다. 금요일에 밥을 먹자길래 먹었다. 밥을 먹고서 카페에 가 한 4시간가량 떠들었던 거 같다. 생각 깊고 진중한 애라는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그 애가 나 같은 애를 처음 본다는 둥, 우주를 떠돌다 얼떨결에 발견한 거 같다는 둥, 원시인이 처음 불을 본 것 같다는 둥, 했을 땐 내 생 그런 말을 들어본 게 처음인지라 마음을 휘젓는 표현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 종이 댕댕 울렸다.
그렇게 월요일을 첫 만남으로 금요일, 일요일에도 만나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내 딴엔 최단 시간 안에 결정된 일이었다. 본래 같았으면 너무 성급하다며 시간을 달라 하거나 생각이 필요하다며 에둘러 밀어냈을 텐데 전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나도 얘랑 만나면 좋겠네, 확신이 들었다. 그간 실현 불가능할 거라 단정 지었던 행복한 연애가 펼쳐질 듯했다. 동네방네 자랑을 했다. 가령 연애를 하더라도 일절 티를 내지 않아 스쳐간 인연들이 섭섭해하곤 했었는데 이번엔 달랐다.
[여태껏 만난 사람들과 달라?]
[완전 달라요.]
그 애가 하는 모든 말들이 담백했다. 과장하거나 치장하지 않아 거부감이 없고 편안했다. 고작 사귄 지 4일밖에 되지 않았을 때, 내가 헤어지자 하는 꿈을 꿔 좌절했단다. 귀여웠다. 그 애한테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줘도 실망하지 않을 거란 믿음을 받았다. 그래서 일부러 웃거나 잘 보이기 위해 불편한 자세를 취하거나 하지 않았다. 대화 주제도 끊임없이 바뀌었다. 그 애는 내가 스스로를 생각하게 만들 법한 질문을 주로 했다. 그 점이 가장 좋았다. 더군다나 그 질문에 대한 답변마다 난 감정이 앞선 사람인 걸 확연히 드러내게 되는데 반대로 그 애는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인 듯하여 마음에 들었다. 자주 기울어지는 나를 꼿꼿이 바로 세워줄 듯했다.
그 애와 썸원(SumOne)이라는 앱을 깔았다. 하루마다 서로에게 동일한 질문이 주어지고 그에 답하는 방식이었다. 3번째 질문과 답변이 인상 깊다.
[상대방이 좋아지기 시작한 결정적인 순간은 언제였는지 말해주세요!]
그 애가 문장을 입력했다.
[자기만의 심오한 세계를 가진 사람이란 걸 알았을 때 더 알아가고 싶었고, 작고 귀여운 모습이 예뻤다.]
지훈 과장님은 나의 연애 소식을 듣고서, 작은 목소리로 흡족해했다.
“올해 목표를 빠르게 달성했네.”
지훈 과장님과 세웠던 올해 목표는 안정적인 사랑하기,였다.
*
추억
1.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이나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