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by 주또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 순 없는 인생이다만 좋아하는 사람들과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는 인생이라면 어떨까? 바이레도 로즈 오브 노 맨즈 랜드. 향수를 거의 절반 가까이 사용하였다. 같은 향으로 먼저 구매했던 핸드크림은 이제 기껏해야 찔끔 정도밖에 나오지를 않는다. 시간이 이만큼 흘렀다. 부지런히 이 향과 어울리기 위해 꾸준했다. 누가 나를 떠올릴 경우 이 향으로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단 바람을 품었다. 이 향수를 다 사용한 뒤 재구매할 의사는 백 프로였다. 앞으로도 한 평생 고집할 작정이었다. 애인이 왜 그리 이 향에 집착하느냐 물으면 차라리 솔직한 편을 택할지언정 포기할 의향은 없었다.


*

밤공기가 선선했다. 푹푹 찌는 열기가 한풀 꺾였다. 오랜만에 윤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얼추 이 년 만에 재회였다. 녀석은 훨씬 더 멋있어졌다. 여전히 오른 팔에 자리한 타투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내 생 만나본 타투를 한 사람들 중 녀석이 가장 잘 어울렸다. 꽃과 카메라가 그려져 있었는데 꽃은 녀석 친구의 할머니께서 좋아하셨던 꽃이고 카메라는 사진을 배우던 시절 처음으로 샀던 것이라 했다. 타투마다 의미가 있었다. 외에도 여러 가지 더 있다고 했다.


나 또한 타투를 고민한 적이 줄곧 있었다. 바로 지난주만 해도 예약을 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도안은 내가 그림을 그릴 때마다 귀퉁이에 넣는 로고였다. 그냥 네모난 점선 박스 위에 juddo라고 쓰여있는 심심하고도 재미없는 디자인. 하지만 잠시 뒤로 미뤄두었다. 애인이 타투가 싫단다. 그러면서도 네가 하고프면 하라 하던데. 어이없고 귀여워서 순순히 안 하겠다 했다.


“질투는 되게 본인한테 손해인 감정이에요.”

골똘히 생각했다. 그를 떠올려냈다.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노라 마음먹긴 했다만 이러한 측면에선 어김없이 그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누구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리고 그걸 혼자 삭히지 못해 꼭 티를 내고야 말았다. 무척이나 어린 행동이라 반성한다. 굳이 그래야만 했나? 하나 시간을 되돌려도 어른스러운 태도를 보이진 못했을 것 같다. 작은 일에도 서운하고 화가 나고 그러다 그가 자상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르르 녹아내리고. 감정에 이상이 생긴 건가 했다. 이렇게 심각해도 되는 거 맞나.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며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서 늘어지고픈 심정. 잇따라 엄습해오던 불안감과 초조함. 여유가 없었다.


윤에게는 짝사랑했던 인물에 관하여 대강 설명해 주었다. 윤의 사랑도 들었다. 윤은 꽤나 낭만적인 인생을 살고 있는 듯하단 느낌을 받았다. 헤어진 연인과 멕시코에서 우연한 만남을 가지고 일주일을 함께 보낸 뒤 미련 없이 헤어진 일화. 만일 나였더라면 그 과정 안에서 영락없이 흔들려 재결합을 원했을 텐데. 윤은 달랐다. 본인의 결정에 있어 확고한 면이 있는 듯했다. 그게 일이든 사랑이든 뭐든 간에. 내가 백날 천날 이루고자 했던 모습을 윤을 통해 봤다. 윤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가?


“완벽한 이상형을 만나긴 어려운 것 같아요. 그런 사람을 한 번도 못 만난 것 같네.”

“그렇지. 근데 나는 한번 있었다. 진짜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상형이었어. 하얗고 눈매 길고.. 웃기지만 티베트 여우 닮은.”

“첫사랑을 잊게 해줬다던 사람?”

“응.”

감히 입어보지 못할 옷인 양 탐이 났던가.


*

그때 그러지 말걸. 신호등을 조금 늦게 건널걸. 그걸 사지 말걸. 그 길을 걷지 말걸. 좀 더 상냥하게 대할걸. 내가 그때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새벽 한시가 넘어서까지 깨어있었더라면? 후회로 달라질 일은 전혀 없다는 걸 아주아주 잘 안다. 후회는 스스로를 갉아먹기만 할뿐더러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거를 바꿔줄 수 없다. 대체 언제쯤 희망찬 얘기를 할 수 있을까?


*

입사 초반이 자꾸 멋대로 불쑥불쑥 피어올라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출근 첫날 엘리베이터 앞에서 사장님을 만나 놀랐던 기억. 처음 내 자리를 알게 되었던 순간. 본부장님이 내게 동기가 있다고 알려주어 왠지 모를 기대감과 안도감, 기쁨, 설렘,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던 찰나. 나의 사수이자 당시 주임이었던 예원. 그리고 쭉 연달아 나타나 인사하던 팀원들. 그리고 마침내 등장한 나의 동기 수진. 나보다 일주일 먼저 입사하였다더라. 우리는 동갑이었고 대화도 잘 통했다. 웃음 코드도 잘 맞아 내가 하는 장난에 수진은 연신 웃어주었다. 하얗고 말간 얼굴. 토끼 상의 예쁘장한 이목구비. 갈색 머리카락. 봄이란 계절이 참 잘 어울린다 싶었던 아이.


[주영아 안녕 너의 삼 년 지기 동기이자 베프 수진이야.

우리 정말 지지고 볶고 별의별 일도 많았고 둘이서 정말 많이 의지하면서 지냈다. 나도 이제 곧 이별이라고 하니까 너무 아쉽고 슬픈 거 같아. 나는 죽었다 깨도 너 같은 동료 동기 못 만날 거 같아. 우리 둘 사이에는 착한 네가 있었기에 오래갈 수 있었다고 생각해! 내 생각엔 서로 노력하고 배려한 게 가장 큰 이유 같고. 너 글 보니까 다시 한번 더 슬프다. 험난한 세상 사회에서 너처럼 따듯하고 귀여운 아이를 만나 삼 년을 버티고 무서웠던 게 없었던 거 같은데 우리가 이별하면 이제는 좀 세상이 무서울 거 같아. 각자 다른 위치에서 일하는 걸 생각한다면 영화 같기도 하고.

너는 근데 이 회사와는 안 어울리는 꽃 같았어. 이 회사가 추운 겨울이면 너는 봄에 피는 꽃이었달까? 정말이야. 넌 너무 좋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고 더 좋은 곳에서 있었을 거 같은데 여기 와서 풀이 죽어가고 아파하는 너를 보면서 나도 마음이 아릴 때가 많았어. 다른 곳에선 더 이쁨 받고 더 사랑받고. 누구에게든 일 잘하고 착한 만능인으로 인정받을 거라고 의심치 않아. 나도 요즘 머리가 아프고 고민이 많다, 주영아. 너도 그럴 거라 생각 들어. 그렇지만 이 시기 서로 또 의지하면서 가보자! 마지막까지 서로 붙어있으면서 의지하자고.

난 그리고 가끔 매정할 때가 있는 거 같아서 잘 못 놀아주는 거 같아. 미안해. 언젠간 너한테 상아급으로 될 수 있는 친구가 되고프다. 사룽해. 잘 자. -영원한 너의 동기이자 친구-]


블로그에 남긴 수진의 댓글을 보자 울컥 북받치는 감정에 절로 입술을 깨물을 수밖에 없었다. 수진은 퇴사를 할 예정이다.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하기로 결정했다. 삼 년 만에 작별이다. 함께 희로애락을 다 겪었다. 다사다난했다. 우리는 분명 약속만 잡으면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있는데 왜 오래도록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걸까? 그녀의 자전거 뒤에 올라타 바라보았던 풍경들과 그녀의 자그마한 어깨가 생각이 난다. 연이어 나도 한 글자 한 글자 진심을 담아 적었다.


[수진아 나는 아무렴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너 아녔으면 절대 이곳에서 버티지 못했을 것 같아. 첫 직장. 처음 사회에 발을 들이게 된 날 너를 만난 건 가장 큰 행운 아니었을까? 아직도 나의 동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설레했던 것과 마침내 마주한 너의 하얗고 예쁜 얼굴에 기뻤던 장면이 눈에 선해. 너는 내게 맞춤형 인간이었던 것 같아. 때론 친구가 되어주고 언니가 되어주고 가족이 되어주며 내 곁에 머물러주었던 것 같아. 너랑 울고 웃고 하면서 다양한 감정을 함께 했는데 이젠 그러지 못할 거라는 현실이 받아들이기 버거우면서도 힘드네.

내가 봄에 피는 꽃이었다면 넌 봄날의 햇살이었지. 따사로운 네게 빛을 받아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종종 사회라는 곳이 정말이지 춥고 차갑고 각자의 인생만 바라보는 곳 같아 무서웠어. 그런데 넌 그럴 때마다 내 손잡아 주더라. 우리 같이 삼 년이란 시간을 보내면서 내게 서운한 점이 있었을 수도 있고 미웠던 적이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부디 좋은 기억만 남겨주길 바랄게.

난 진짜 네가 어딜 가든 사랑받을 아이란 걸 알아서 가끔 부러워지고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만나 즐거워하고 나는 점차 희미해질 걸 생각하면 질투가 나기도 해. 그러니까 나 절대 잊지 말아 줘. 늘 씩씩하고 멋있고 추진력도 있고 나랑은 반대인 듯하면서도 닮은 구석이 많아 항상 본받고 싶었어. 장난삼아 한 말이었다만 한편으론 진심을 다해 너로 태어나고픈 날들도 있었다.]


퇴사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나와 친하면 다 나가는 건가? 하는 당최 말도 안 되는 생각도 든다. 다들 가야할 때가 되어 간 것 뿐인데. 남겨진 것도 아니나 버림받은 것 마냥 한껏 풀이 죽어 내내 눈물만 훔치고 낑낑 앓는다. 오죽하면 사주를 볼 때 이별수가 많냐는 질문까지 했더란다. 이별수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고서 묻지도 않았다. 그냥 다급했다. 뭔가 해결책이 있기를 기대했다. 따지고 보면 누차 말하듯 이건 이별이 아니고 누가 영원히 떠나고 말고가 아님에도 말이다.


요새 과거 추억에 잠겨 산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부정하다가 인정하다가 폭풍 눈물을 흘리다가. 이별은 언니만 그런 게 아니라 원래 슬픈 거란 민경의 말에 위안을 얻어본다.


“나 실은 연달아 오는 헤어짐에 굉장히 힘들거든. 말은 못 했는데 진짜 버거워. 슬퍼 죽겠어.”

막막해. 어떤 사람은 경험이 쌓일수록 단단해지고 무뎌지는 거라 하던데 그건 그냥 성향마다 다른 거 아니야?


*

소연 팀장님이 잠깐 회사에 방문했다. 전날 내가 입사 초반, 그러니까 즉 현재 퇴사한 사람들이 전부 다 있던 시절이 그립단 얘기를 흘려서인가 생각했다. 먹을 거 갖고 나오란 그녀의 장난기 넘치는 음성에 냅다 서랍속 비축해두었던 과자들을 모조리 챙겨 내려갔다. 엘레베이터 층수가 한층씩 내려갈 때마다 심장이 파도를 타듯 울렁거렸다. 얼마 안 가 그녀의 차가 주차장쪽으로 들어섰다.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녀가 차에서 내리고 여전히 소녀스러운 미소로 나를 반겼다.


“이주영!”

코맹맹이 소리가 났다. 감기에 걸렸더란다.

그녀가 와서 잠시나마 들떴다. 그리웠다.


*

수진이 제 물건을 주며 농담한다.

“이거 너 가져. 나 이제 떠나니까.”

난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 마냥 두 볼을 부풀린 채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싫어. 그냥 가지마.”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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