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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또 Jun 22. 2023

아무 의미

애인이 나를 버리지 않을 거란 어떠한 확신이 주는 안정감이 따분했던 걸까. 갈수록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 까닭일까. 무슨 이유를 갖다 붙이든 간에 내가 너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결론이 난다. 내가 더 사랑했더라면 ~했을 테지. 더군다나 내가 실제로 사랑을 할 시 맹목적인 모습을 잘 알기에 더더욱 대비되어 보였을 수도 있다. 완전히 꺼진 불은 아녔지만 위태롭게 남아있는 불씨에 장작을 넣어주지 않았다. 어쩌면 네 손을 놓은 건 나지만 추락한 것 또한 나일 수도 있겠다.


항상 난 정이 많은 사람이라 하지만 싫은 티는 곧이곧대로 났다. 극명한 온도차를 누구든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하나의 단점이라고 생각하지만 주변에선 오히려 장점일 수도 있겠다 한다. 그게 맞나? 전혀 아닌듯한데. 화가 나면 화가 난 대로 얼굴에 티 나고 슬프면 슬픈 대로 울상이 되고 기쁘면 기쁜 대로 설레면 설레는 대로 두 볼이 발그레해진다. 뭐 어느 누구나 이러한 사람쯤은 주변에 여럿 있을 테지만.


민경이는 본인이 약한 점을 빌미로 계속해서 합리화하면 안 된다고 했다. 옳은 말에 반박은 못하겠고 수진과 둘이 요즘 유행하는 MBTI, T에게 하는 말. 젓가락을 들고서 “너 T야?”를 연신 외쳤다. 그러면서도 나 또한 마음 한구석으로는 극복하는 방법을 어서 빨리 터득해야 한다고 조급했다. 근데 또 보면 그리 복잡하게 여길 문제가 아니긴 하다. 약간의 긍정만 첨가하면 단순함이 된다.


스무 살 초반까진 제일 많이 달고 살았던 말이 그럴 수도 있지,였다. 그땐 그래도 그런 말을 내뱉고 난 후엔 현재 벌어진 처지가 금세 별거 아닌 게 될 것 같았고 지레 겁을 먹는 불안정한 상황도 그저 시시한 평범한 일상에 불과해질 듯했다. 하나 언제부터 그런 말을 삼가게 되었다. 그럴 수 있던 일들이 그럴 수 없다,로 뒤바뀌어 혼자 단정 짓고 삽질하며 굴을 파게 되었다.


늘 반박할 여지없이 맞는 말만 쏙쏙 골라 하는 사람에게 내가 짐이 된 거 같아 미안해진다. 당분간은, 아니 아주아주 오랫동안은 여전히 내가 의지하려 드는 이와 아무런 접점도 없으려 한다. 구태여 연락을 하거나 대화를 이어가려 하지 않아야겠다는 소리이다. 이런 말을 언제까지고 반복할 수 없다. 관둔다 하고서 번복하는 짓거리에 스스로도 진저리가 날 지경이니 말이다. 게다가 이대로라면 난 영영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돌기밖에 하지 못한다. 그만큼 다시 누군가에게 목매어서는 안되는 노릇이다.


두발로 꼿꼿이 홀로 서야 한다. 제자리로 돌아가면 된다. 있다 없는 부재에 태연해지면 된다. 어린애 마냥 물고 늘어지기는 이제 금지. 잘못된 현실을 인지하고 하나씩 차근차근 바로 잡아가자. 본래 이건 한참 전부터 실행했어야 하는 거였다. 다만 단지 구구절절 변명만 늘어놓아 한참 걸렸을 뿐이다.


이렇게 보통날이 하루 더 지나간다. 조금 울적하고 약간의 희망과 기대 그리고 포기가 공존하는 그런 날. 체념은 다소 이른가 싶은 날.


머잖아 모든 게 아예 궁금하지 않은 날들도 오겠지.


*

상당히 머리가 지끈거렸다. 우연히 듣게 된 험담으로 인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오죽하면 일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며 시야가 핑! 돌기까지 했다. 울분을 토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차츰 시간이 흐르고 나니 어느 정도 진정이 되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달라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 소통이 안 되었을 수도 있지. 다만 그쪽이 못돼 처먹은 건 틀림없었다. 냅다 돌 맞았으면 좋겠다.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그러고 퇴근 후 회식 중 부장님이 하시는 말씀을 잠자코 듣다가 빈번히 반복되는 문장을 발견했다. “그거 아무 의미 없어. 의미 없다. 신경 쓰지 마라.” 그 말마디에 굉장한 위로를 얻은 건 왜일까?


지나보면 아무 의미 없었다.


*

만사가 심란해졌다. 시간을 갖는 동안 빈자리를 느끼지 못해 헤어졌다. 이번에도 단기간 연애였다. 마음을 나눌 여유가 부족했다,고 한다면 비겁한 핑계일 거다. 한데 헤어졌으나 헤어진 것 같지가 않았다. 굳이 주변인들에게 일일이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차차 알게 될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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