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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또 Jun 24. 2023

오사카를 기다려

이별 당일 기다렸단 듯이 그가 꿈에 나왔다. 이건 반칙 아닌가. 깨어나 어안이 벙벙했다. 꿈속의 우린 어쩌다 우산을 놓쳤다. 우산은 파란색이었다. 우리는 그대로 쫄딱 젖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하나 그게 결코 불쾌하다거나 찝찝하지 않았다. 되레 시원했다. 묵은 체증이 한 번에 쑥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푹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손을 내밀었다. 지체 없이 맞잡았다. 쏴아아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내리는 빗줄기. 생긋 예쁘게 올라간 그의 입꼬리. 전부 다 생생했다.


그렇지만 슬프진 않았다. 영락없는 그리움이 존재한다만 슬프지 않았다. 그로부터 겪을 수 있는 감정 중 슬픔은 차단하기로 했다. 잘 되진 않아도 억지로 그러기로 했다. 슬퍼질 틈이 보이면 즐거울 거리들을 찾았다. 일부러 웃고 딴청 피웠다. 슬퍼할 시간에 생산적인 무언가를 하려 움직였다. 초반엔 빈틈이 생기는 게 두려웠다. 어김없이 생각에 지배 당하고 말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대로 괜찮다. 생각이 나면 나는 대로 골몰하면 되는 거다. 받아들인다.


지인들이 의외로 내 글을 꼼꼼히 읽는단 사실을 접해듣게 되어 조금은 감출까, 몇 차례 망설였다. 너무 낱낱이 드러내어도 득이 될 게 없단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서야 가치를 둘 수 없다. 내 글은 솔직한 편이 어울렸다. 사실을 말하지 않고서는 단 한 글자도 써 내려갈 수 없었다. 그래서 매일을 고백하는 심정으로 살기로 했다. 그냥 한바탕 욕을 한 뒤 모른체해주기를 바란다. 얘 아직도 이 지랄이네, 하면서.


한사코 적지 않겠다며 호언장담했으나 실은 은연중 드러나기를 바랐을 수도 있겠다. 굉장히 이상한 발언이다만 내가 그를 완벽히 놓지 못하는 까닭은 아무래도 가져본 적 없기 때문이 아니려나. 소매 끝이라도 살포시 쥐어봤더라면 이리 오래도록 안달 나 하진 않았을 것 같다. 어디서 그랬다. 이루지 못한 건 평생 가는 거라고. 다만 난 이제 평생 갈까 두렵지 않다. 그러라면 그러라 하지. 비단 조금 더 선한 마음으로 그를 보기로 작정했다. 그냥 필요로 할 때만 얼굴을 비추고 얌전히 기다리며 무언가를 바라지 않은 채 잔잔히 있어주는 것.


그러다 그에게 완전히 잊히면 잊히는 거다. 이전에 그를 통하여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똑바로 인지했다. 바닥과 불안의 절정을 보았다. 하루에도 수백 번 오락가락했다. 두 번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을 지경이다. 더불어 친구도 잃을 뻔했으니 말 다 했다. 사랑이 뭐길래? 걔가 너한테 뭐길래. 질리도록 들었다. 더 이상은 부정하거나 거짓말하지 않는다. 그래, 난 그를 쉽게 못 잊는단 걸 인정한다.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속 편한 것 같기도 하다. 그가 아주아주 잘 살고 아주아주 행복하며 아주아주 건강한 삶을 유지하길 바란다. 떠난 그의 자유를 원망하지 않는다.


소연 팀장님은 내가 모 아님 도,라고 하더라. 이다음번엔 확실히 뒤엎을 만한 인물이 등장할 수도 있을 테지. 모든 게 안정화를 이루게 된다면 말이다. 현재로썬 고민해야 할 거리들도 산더미이고 여러 방면으로 눈치 봐야 할 처지이기도 하다. 불완전한 나는 스스로가 완성해 가야 한다.


내일은 추억이 깃든 장소에 가려 한다.


*

옆 사람이 태우는 담배 향기에 콜록거렸다. 그러면서도 그게 진짜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나, 궁금했다. 나도 짤막한 손가락 사이에 끼워보고팠다. 그러나 궁금, 그 이상을 넘어가지는 않았다. 다행인가? 용기 없이 헐렁한 거 아닌가. 솔직히 난 사춘기 시절을 넘어선 스무 살 이후로는 딱히 주어진 환경에 불만이랄 게 없었다. 불안만 함께 했을 뿐이었다. 퇴사를 결심한 일이 옳은 일인지도 헷갈린다. 사실상 회사란 내가 하고픈 작업을, 예를 들자면 그림이라든가 글이라든가 여러 창작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돈을 벌어주기만 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한데 팀원들이 다 나가고 혼자 남은 쓸쓸함과 날 괴롭히는 몇몇 못돼 먹은 심보 인들로 인하여 정녕 퇴사를 하는 게 잘하는 선택인 건가, 싶다.


만일 여기에 남는다면 어떻게 할 거고 떠날 거라면 뭘 할 건지 생각해 보란 조언에 좀처럼 방향을 잡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겐 원하는 일이 회사와 관련된 쪽이 아녔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가 조건적으론 내게 최적이었다. 규모가 없는 편이 아녔고 욕심이 없어 월급에 부족함을 느끼는 것도 아녔으며 거리도 가깝다. 심지어는 디자이너라는 직업적 특성상 야근이 잦은 곳이 허다함에도 불구하고 여긴 남아서 잔업을 하고 그런 적이 없었다. 여섯시 땡 치면 내가 제일 먼저 일어나 후다닥 튀어 민망할 정도이다. 기다리라는 옆자리 지훈 과장님 말은 한 귀로 듣고 흘린다.


그러고는 집으로 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필라테스 하고. 책도 읽고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들도 보정하며 최근엔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선 모두들 그렇겠지만 워라벨이란 게 무진장 중요한 점인지라 섣불리 이직하기를 망설이는 거다. 누구는 내게 괴롭히는 무리로 인해 하루빨리 탈출하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몇몇은 오히려 지금이 좋은 기회라며 조금만 더 참아보라 한다. 이럴 경우 굉장히 얄팍한 귀가 미울 지경이다. 으아, 두통약을 되게 자주 먹는다.


결론은 내가 만약 떠난다면 도망치는 감이 없잖아 있다. 되게 창피하다. 여기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은 어떻게 잃지. 지훈 과장님과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일도 앞자리 민경과 레이저를 쏴가며 쪽지를 주고받는 일도 며칠 남지 않은 것 같다. 그리워질 장면들을 충분히 세세히 기록하고 기억하려 한다. 이제야 보니 그리움이란 게 마냥 나쁘지만은 않은듯하다. 그리워서 살아지기도 하며 그리워서 무심코 마주한 이름에 반가움 두 배,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어쩌다 우연히 혹은 작정하고서 만나는 날을 고대하려 한다.


*

친한 김 차장님이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왜 이리 폭삭 늙었냐 하신다. 그럼 난 심드렁한 얼굴로 요즘 통 잠을 못 자서 그렇다 실토한다. 수진이는 내게 다시 열시면 잠들던 때로 돌아가란다. 나도 그러고 싶다. 그 당시엔 마음 불편할 일이 덜했던 것 같다. 아, 용량이 꽉 찬 머릿속이 괴로워 시체처럼 잠만 자려 하던 시기를 제외하고서 말이다.


[처음부터 잘할 순 없지. 그것 또한 언젠간 적응될 테고 그게 너의 실력으로 바뀌겠지. 잘할 테니까 너무 걱정 마.]

6월 1일 받았던 메시지를 도로 꺼내읽었다. 새로 감당해야 할 상황에 있어 심심찮은 위로가 되었다.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나름대로 열심히인 나는 매우 다른가, 골몰했다. 기를 쓰고 살기에는 몹시 피로하다. 기지개를 켠다. 최선을 다하진 않는다는 잔소리가 어디쯤에서 들려오는듯했다. 에라이.


내년 봄에 가기로 했던 채원과의 여행 약속이 앞당겨졌다. 올해 12월 초 오사카에 갈 예정이다. 비행기도 바로 예약했다. 일부러 본래 가고 싶던 곳과는 다른 곳을 계획했다. 이유는 비밀. 얼른 가고프다. 퍼석해진 삶에 물도 주고 거름도 주고 그래야지. 뭐 아직 한참 남았다만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지 않을까? 그 사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걱정 대신 들뜬 호기심을 가져보려 한다.


*

여름인가. 슬슬 벌레들이 사방을 지배하려 시동을 거는 모양이다. 지훈 과장님이랑 김 차장님, 아라 씨 그리고 나. 넷이서 건너편에 있는 이마트 24 편의점으로 향하던 참이었다. 불쑥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까만 벌레가 내 쪽으로 붕 날아왔다. 어랍쇼? 각도상으로 보니 신발에 내려앉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어림없지. 마침 온종일 신경이 날카로웠던 탓이었다.


그리하여 평소라면 질색하고 피했을 거, 도전장으로 받아들이겠다며 덩달아 점프를 뛰었다. 몸이 낮게 올랐다가 떨어졌다. 녀석의 바로 코앞에서 착지했다. 한데 이게 무슨 일이람. 벌레가 죽었다. 죽은 건가 기절한 건가. 아무튼 배를 보이며 뒤집어졌다. 황당했다. 진짜로 밟은 건 아니었다. 결백했다. 연이어 식겁한 지훈 과장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헉 설마 죽인 거야?”

아니 그러려던 건 아녔는데요. 당황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두 눈 동그란 과장님을 응시하니 불현듯 드라마 <나의 아저씨>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극중 박동훈이 사무실 내로 들어온 무당벌레 한 마리를 잡지 못하고서 내뱉은 대사가 있었다.


“마음에 걸리는 게 없으면 무얼 죽여도 문제없어. 그런데 마음에 걸리면 벌레만 죽여도 탈 나.”

사이좋게 핫바를 하나씩 손에 쥐었다. 전부 천사 지훈 과장님이 결제한 거였다. 전자레인지에 돌린 뒤 오물거리며 바깥으로 나왔다. 근데 그 순간 다시금 벌레가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다리를 휘두르려다 흠칫했다. 내 시선은 지훈 과장님에게 닿았다. 과장님이 빙그레 웃었다. 왜 눈치를 보느냐며.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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