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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또 Jun 28. 2023

온정

생각해 보니 난 마냥 슬프기만 한 사람은 아녔다. 슬프기도 했으나 즐겁기도 했다. 하하 호호 웃음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즐거운 적도 자주 있었다. 다만 좋은 감정은 금세 휘발되고 수시로 내면의 슬픔을 채워갈 뿐이었다. 덜어내려고 열심히 노력하지도 않았다. 아니 했어도 해봤자 무소용이란 관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잘 수용되지를 않았다. 그래서 맨날 슬펐다. 즐거운 상황에서도 마음 한구석은 슬펐다.


어떤 날은 슬프지 않을 경우 이상하다 여겨 일부러 슬픈 드라마라든가 영화를 찾아서 본 적도 있었다. 그리곤 펑펑 울었다. 해소가 되긴커녕 배가 되어 쌓였다. 결과가 그럴 걸 알면서도 굳이 굳이 그 난리였다. 되레 기쁨과 행복이란 것이 거추장스럽고 어울리지 않는 옷 마냥 낯설어 그런 감정을 느낄 시 부끄러워 서둘러 벗으려 했다. 누군가 내게 하는 밝아서 좋단 칭찬이 괴리감 있게 와닿았던 까닭 또한 이러한 심사에서 일 듯하다.


난 점점 내가 극도로 혐오하던 인물들과 비슷한 형상을 하게 되었다. 어디 한군데 부족한 인간인 양 굴었다. 그런 모습들을 속속들이 발견할 때면 여간 심각한 게 아닌지라 어떻게든 되돌리고파 했다. 하나 것도 금방 시도했어야 했다. 이미 물들고 고착되어버린 지 꽤 된 모양이었다. 박박 지워도 남았다. 하물며 욕을 듣게 될지언정 고칠 순 없다고 단언하려 했다. 분명 안 되는 건 없다, 하는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난 각을 재고서 안 되는 건 일찌감치 포기한다. 최선을 다하는 일은 피로해졌다. 사랑은 제외하고 말이다.


근래엔 꾸미는 일도 귀찮아져서 헐렁하게 입고 헐렁헐렁하게 다니는 모양새를 선호한다. 그립다는 말은 시시해져서 하지 않기로 했다. 비단 내 일상 중 한 사람의 분량이 넘쳐날 따름이었다. 생각이 나면 생각이 나는 대로. 난 뭐든 잘 질리는 인간이니까 이 그리움에도 끝이 있겠지. 장맛비가 내린다. 더위가 좀 가셨다만 습해서 더 찝찝하다. 바람이 심하게 분다. 가슴 아래께로 내려온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휘날린다. 이게 어제 일이다.


*

오늘은 장마 전선이 계속된다는 일기예보와는 정반대로 맑고 화창한 날이었다. 늘 그렇듯 시답잖은 일에 자신감이 사라져 구시렁대었다. 댓 발 나온 입술. 사람들이 요새 왜 이리 퀭해 보이냐 한다. 제대로 못 자서요. 피곤해서요. 요즘 신경 쓸게 많네요. 등등의 이유를 붙이는 일도 지겨워진다. 수진은 내게 그랬다. 이직 처를 알아보느라 골머리 썩는 내게 일침을 내렸다.


“이 회사에 가야지, 하는 것보다 가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고 있는 거 같아.”

그럴 수도 있겠다. 근데 실은 잘 가고 싶은 건데. 되짚어 보면 아닐 수도 있겠고. 거리를 선택해야 할지 가고픈 곳을 선택해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서 허둥거린다. 사실상 어디도 모르겠다. 그냥 맘 편한 곳에 가서 대충 앉아 대충 일하고 집에 와 취미스러운 일들만 하다 잠에 들고 싶다. 사람은 좀 착했으면 좋겠고. 또 막상 이런 내 진심과는 달리 누군가에게 말하기에도 나쁘지 않은가, 하는 면이 있다. 이게 젤 솔직한 속내일 터이다.


물론 수진이 한 말이 제법 틀리진 않았다. 난 뭐든 해야 할 이유보다는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파악해 내기 급급했다. 예를 들자면 연애에서도 동일했다. 이 사람과 사귀어야 할 이유보단 헤어져야 할 이유를 먼저 파냈다. 그리곤 혼자 맘 정리를 완료한 채 떠났다. 날 겪어본 사람들은 정이 많고 좋은 사람이다만 이러한 방면에선 냉정하단 말을 자주 하곤 했다. 그렇다. 좋고 싫음이 어느 정도 분명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 후로 후회를 일삼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번복하는 때도 있었고. 하나 곧장인 경우는 드물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간혹 그랬다.


예외는 있었다. 다름 아닌 그,라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암만 냉정해지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매달리고 있는 나 자신이 비참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어도 별다른 방도가 없어 그냥저냥 포기했다. 고로 그의 앞에선 한없이 온정을 베풀려고 한다.


*

내일은 다시 비가 오려나. 인터넷 검색만 하면 나올 상념들을 구태여 질질 끌고 다니며 버스에 올라탔다. 한 삼십분가량 달렸을까. 검지 손톱만 한 벌레가 날아와 내 바지에 붙었다. 일순간 얼었다. 당장 얘를 어떻게 해야 하나? 손가락으로 튕겨 날려버리려 하는데 옆자리에 사람이 앉아있단 사실을 간과했다. 그래서 그 여자와 눈이 마주친 찰나 아차, 하며 동작을 멈췄다. 민망한 웃음을 흘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여자와 난 둘 다 허우적거렸다. 차마 날리지 못한 벌레가 내 바지 밑단 속으로 기어들어갈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제 품에 안고 있던 쇼핑백에서 종이 같은 걸 꺼냈다. 그걸로 잡으려 한 모양이었다. 한데 그게 하필 툭 떨어졌다. 바닥으로 추락하길래 진짜 어쩌지 싶었다. 여자는 사색이 된 얼굴로 뜨악하다가 갑자기 핸드폰을 들기 시작했다. 핸드폰으로 벌레는 떼어냈다. 그러곤 우리의 바로 아래로 떨어진 벌레를 사정없이 핸드폰으로 밀었다. 와 저러다 핸드폰 다 긁히겠다, 염려되었으나 다행히 멀쩡한듯했다. 여자와 난 벌레를 퇴치한 후 마주 보고서 어색하게 웃었다. 이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로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소 우스꽝스러운 위기를 함께 모면하고서 이런다는 게 마냥 웃겼다.


그리하여 난 망설이다가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아까 멋있었다고. 고맙다고. 그 계기로 여자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놀랍게도 여자는 나와 동갑이었고 직장도 코앞이었으며 심지어는 이름도 비슷했다. 난 주영. 그 여자는 주연. 게다가 여자는 우리 집 앞에 있는 중학교를 나왔고 번호와 인스타그램 교환을 하며 알게 된 사실은 우리가 겹치는 친구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런 우연이 다 있나.


[나 거짓말 아니고ㅋㅋㅋㅋㅋ 벌레 밀쳐내기 전에 잠깐 눈 마주치고 웃었잖아! 친구 하자고 해볼까 했는데 너무 쪽팔려서 못했는데 먼저 말 걸어줘서 냅다 번호 물어본 거다ㅋㅋㅋㅋㅋ]

여자가, 아니 주연이가 먼저 내려 인사를 했다. 이어서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저장된 이름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이런 식으로도 친구를 맺는다는 게 새삼 신기해져, 괜한 의미 부여였을 수도 있겠다만 살면서 한 번쯤 만나게 될 인연이 아니었나 싶어졌다. 저기압이었던 기분이 다시금 몽실몽실 구름이 되어 부풀어 올랐다. 난 정말 단순하기 그지없다 인정했다. 좋은 인연이면 좋겠다. 인연이 가면 인연이 또 온다.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만 대개 그런 편이었다.


소연 팀장님은 누누이 내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녀의 안목이 틀리지 않은 것이기를 바란다. 최근 퇴사 생각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이별을 거듭 상상해 본다. 이곳을 다니며 떠나보낸 사람들은 수두룩했지만 정작 본인이 떠나는 건 처음이니 말이다. 다음 주 월요일 이후로는 수진마저 없다.


“내가 너 가는 것까지 다 보고서 마무리하고 마지막으로 갈게.”

과거에 우스갯소리로 했던 농담이 현실이 되었다. 진짜 그렇네. 수진이 떠나는 장면 모조리 같이 하고서 마지막으로 내가 장식하겠네. 맨날 날 걱정하고 챙겨주는 김 차장님. 비닐봉지 같은 거 하나 제대로 못 뜯는 날 옆에서 돕는 아라 씨. 허구한 날 이상한 개그 치고 내가 컴퓨터가 고장 난 것 같아서 도움 요청하면 또 바로 되어서 무안해지는 걸 다 받아주는 시스템부 대리님. 앞자리에서 눈 마주칠 때마다 방긋방긋 웃어주는 민경이. 시간이 맞을 때마다 차를 태워다 주고 저녁 꼭 먹으라고 당부하던 김대리님. 내 별수롭지 않은 얘기들 경청해 주고 인제 내가 감동받는 특이한 포인트를 깡그리 읊는 지훈 과장님. 등등.


되돌아보니 좋은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자주 잊었다.


“넌 그래도 애가 욕심이 있는 거 같아.”

“난 정말이지 잘 되고 싶어. 잘 되어야 해. 날 위해서라기보다는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보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파서 잘 되고 싶어. 내가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되어서 소연 팀장님 스튜디오도 홍보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고 나중에 지훈 과장님이 스냅 사진을 한다면 것도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어.”

될 수 있으려나. 미래를 알 턱이 없다. 하지만 꾸준히 하려 한다. 그러다 보면 뭐라도 되어있지 않을까.


[근데 주영인 열심히 잘 살았으니까 지금 남아있는 인연 다 남을 수도 있지.]

부디 내게 남아주는 인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자랑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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