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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또 Jul 05. 2023

단단한 건 머리통뿐

웬일로 맘 구석이 정리되는 기미를 보였다. 그래, 뭐든 될 대로 되라지! 그는 내가 아침마다 빽다방에 들러 바나나 라떼를 마신단 것과 과자 중 땅콩샌드를 가장 좋아한단 사실을 모른다. 아울러 두통약을 달고 산단 점도 밥보다 군것질로 배를 채우는 날이 허다하단 점도 모른다. 게다가 요즘 어울려 지내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없고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아주아주 당연하다. 다만 내가 유별났던 거다. 그와 별 관계도 아니면서 일거수일투족을 알고파 했고 사소한 인연도 질투했으며 일부라도 되고 싶어 낑낑거렸다. 소유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쑥불쑥 감정을 내비쳤다. 덜 사랑할 순 없었어도 나름의 절제는 했어야 했으나 미성숙하게 굴었다. 곧이곧대로 충실했다. 그러면서 이따금 각별함이 들 때에는 좋아 죽어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늘의 난, 어김없이 빽다방 키오스크로 바나나 라떼를 주문하며 불현듯 깨달았다. 그게 다 무슨 소용?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 그리 대단하지 않은 무난 무난한 인물 1에 불과했다. 이대로 잊힌다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더 맞는듯하다.


바쁜 일상을 살다가 우연히 닮은 사람을 발견하거나 비슷한 이름을 마주할 경우 넌지시 안부를 물을 수도 있다. 그리고 반가울 수도 있는 거다. 훗날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만났을 시에는 결혼 소식을 전할 수도 있고 하객이 되어 방문할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흘러가는 대로 살면 된다. 일일이 생각하기에도 귀찮아졌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잡념들을 끊어내진 못했다만 그나마 뭉뚱그려 모른체하려 한다. 내가 지금 정확히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가?에 관련하여 집중하지 않으려 한다. 쉽게 쉽게 살자.


헛된 곳에 마음을 너무 길게 쏟았다.


*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와 안녕, 하려니 슬픈 감이 있었는데 지금으로써는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다. 오죽하면 아무 데나 가서 얼른 적응하고픈 심정이다. 타부서 팀원은 수진이 퇴사할 때 이러한 질문을 했다고 한다.


[너 사실 주영이랑 성향 안 맞았지?ㅋㅋㅋ]

수진이 상종하지 않으려 대답을 회피했음에도 집요했다고 했다. 내 얼굴엔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종종 그 팀 술자리에서 내가 안줏거리가 된단 얘기도 다른 이를 통해 전해 들었던 참이었다. 아울러 나를 벼르고 있단 소리도. 그들은 왜 날 까내리지 못해 안달인 걸까? 익숙한 듯 한숨이 절로 나왔다.


족히 오백가지는 넘는 자사 제품들이 빽빽이 진열되어 있는 이층 쇼룸. 텅 빈 느낌이다. 이 넓은 곳이 이토록 황량할 수가 없다. 하필이면 새로 촬영 의뢰가 들어온 제품이 무게가 꽤 나가는 것이었다. 혼자서 접이식 끌차를 가져와 제품을 들어옮겼다. 땀이 났다. 그러다 문득 제품에 들러붙은 스티커 자국을 발견했다. 손가락으로 암만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아 애를 먹었다. 주먹으로 한대 치고 싶었다.


그러던 찰나, 친한 차장님이 들어왔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차장님은 내게 너 요즘 왜 이리 야위었냐, 물었다. 대충 밥 잘 먹고 있단 대답으로 둘러댔다. 푸석해진 얼굴에 트러블이 여러 개 올라와 엉망진창이었다. 만사가 피로했다. 한쪽 눈을 자꾸 찡그렸다. 그가 가지고 있던 습관이었다.


소품을 뒤적거리던 중 문득 선반에 있는 물티슈에 눈길이 갔다. 뚜껑이 열려있었다. 성큼 다가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손을 뻗어 집었다. 바싹 말라있었다. 순간 사고 회로가 정지되어 어찌하지, 하다가 한 장을 뽑아 버렸다. 뚜껑을 닫았다. 멍한 기분이 가시지를 않았다. 갈수록 멍청해지고 있단 느낌을 받았다. 욕이 늘었다. 카메라를 챙겼다. SD카드를 넣고 망연히 서있었다. 햇빛이 비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죄다 시시했다.


수진의 마지막 날 편지를 적었다. 첫 문장은 집에 편지지가 있는 줄 알았으나 찾고 보니 크리스마스카드 밖에 없었단 내용이었다. 그 뒤로 활자들을 이어나갔다. 대강 고마웠단 글들이었다.


[네가 가는 새로운 회사에서도 사랑받고 예쁨 받으며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그곳에서도 네가 중국요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 것과 굳이 먹어도 볶음밥을 시킨다는 점과 초콜릿은 좋아하지 않고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좋아하며 피부가 예민하고 소화가 잘되지 않는단 걸 알아주는 사람들이 넘쳐났으면 좋겠다. 앞으로 네 삶의 영화 장르는 코미디이자 해피엔딩의 연속이기를 바랄게. 너의 앞날을 응원해.]

수진은 하필 남아도 네가 남냐고 했다. 제일 정 많고 여린 애가 남았다며 어떻게 해서든 간에 설득하여 같은 날 퇴사를 하도록 했어야 했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의사가 완강해 그럴 수 없었다고. 단골 카페에 앉아 눈물을 훔쳤다. 그런 수진을 빤히 응시하며 난, 그저 고생 많았단 말로 녀석을 다독였다. 나름 씩씩한 태도를 보였다. 바깥에서도 보자. 누가 죽이기야 하겠어?


어둠이 깔린 거리는 선선했다. 여름밤은 감성 충만하게 만드는 데에 뭐가 있다. 이런 생각은 비단 나만 하는 건 아닐 테다. 무감정 해지기 위해 여태 노력 중에 있다. 그리고 이 과정 안에서 정신을 차려 보니 주변인들은 늘 같은 말을 되뇌고 있었다. 너는 너무 여려,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지 마, 강해져야 해, 쓸데없는 고민 그만, 넌 생각이 너무 많아. 수차례 곱씹었다. 내가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려보낸 게 아녔다. 스스로도 부단히 애를 썼다. 하나, 드라마 <멜로가 체질>의 대사처럼 내게 단단한 건 머리통뿐이었다. 아 팔꿈치랑 무릎도. 억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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