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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또 Jul 10. 2023

경주

수진이 떠난 지 일주일 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빈자리는 선연했다. 별일은 없다. 누가 크게 뭐라 한 적도 없고 일이 감당 안 될 정도로 몰아치지도 않았다. 수진의 자리에는 종종 사람들이 와서 앉는다. 김 차장님이 와서 몇 마디 건네고 사라지기도 하고 아라 씨가 앉아 힘듦을 털어놓기도 한다. 엊그제는 민경이 와서 내 달력에 그림을 그리고 갔다. 김수진 넌 달력에 내 생일 잘못 표시해뒀더라. 내 생일은 8월 9일인데 네가 화려하게 꾸며놓은 하루는 8월 8일이야. 내가 직접 볼펜으로 한 칸 옆에 화살표를 쳐놨다.


아침엔 부장님이 나를 불렀다. 이번 상여 평가에 관한 이야기였다. 수진과 나랑 평가를 동등하게 했다고 했다. 거의 같음이나 다름없다고. 그러니 수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퇴사가 확정된 날부터 퇴사일까지 내내 걱정했으니 말이다. 수진은 없으나 일본 본사에서 백여 가지가 넘는 자사 상품의 스티커 디자인을 바꾸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막막함에 덩달아 짜증마저 치밀어 올랐다.


“저 혼자 남은 거 안다고 해요?”

“알 게 뭐야. 거기선 그런 거 신경 쓸게 아니지.”

그렇지. 사람인과 잡코리아에 들어가 회사 채용 공고를 살펴보았다. 그래도 이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다. 어떻게든 해낼 테지. 못한다고 해서 죽이는 것도 아니고. 수진이 떠나고서 약을 먹는 횟수가 늘었다. 더불어 디저트를 먹는 양도 늘었다. 밥은 안 먹고 하루에 미니 약과를 여섯 개나 먹는다. 옆자리 지훈 과장님도 그만큼 먹는다. 앞서 말했듯 크게 별일은 없다. 희한하리만치 무탈하다. 무탈한데 다만 네 자리를 똑바로 못 보겠고 말이 조금 줄었으며 이층 쇼룸을 내려가는 일이 쓸쓸해졌을 뿐이다. 그래서 이따금 촬영 의뢰가 오는 게 싫다. 미루고 미루고 한없이 미루고 싶다.


수진아 너는 갔는데 몸살이 왔다.

에어컨이 춥다며 회사에서 두꺼운 점퍼를 입고 있다.


*

경주에서는 반드시 남김없이 버리고 돌아올 줄 알았는데 장장 네 시간 사십분을 달려야 하는 버스 안에서 돌아보았을 때, 여태 부스러기가 남아 까끌까끌 거리더라. 일박 이일 여행이었다. 첫날은 우려했던 바와 다르게 날이 덥지 않았다. 흐리멍덩한 게 더더욱 운치 있게 했을뿐더러 선선한 바람이 불러와 꼭 여름보다는 가을을 걷고 있는 듯했다. 비는 조금 내렸다만 우산은 필요하지 않았다. 부슬비였고 우리가 어디를 들렀다가 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뚝 그쳐있었다. 운이 좋았다. 엄청나게 다양한 음식을 먹었다. 황리단길에서 유명한 십 원 빵만 해도 세 개는 먹었다. 아마 몸무게를 재어본다면 고작 하루 만에 족히 삼 킬로그램이 불어났을 법한 둔함이었다.


상아에겐 이젠 그가 질려버렸다고 했다. 일상을 공유할 수 없고 나를 궁금해하지 않는 이에게 온갖 마음을 쏟는 일이 지겨워져버렸다고 장담했다. 고로 이제 절대 절대, 다신 먼저 연락을 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목소리에 힘을 실어 또박또박 발음했다. 하나 이게 하루 이틀인가. 하루 일정을 모두 마친 뒤 숙소를 돌아왔을 타이밍에 날라온 메시지는 모든 걸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렇지만 심장이 철렁거린다거나 설레발치는 지경까진 안 갔다. 나름 담담했던 것도 같다. 의미 없단 걸 확연히 알아버려서 그런 거 같았다. 어차피 단언컨대 달라질 리 없는 현실이고 그와 나의 감정은 명백히 다른 류의 감정이니, 체념했다.


차라리 정이라고 쳤다. 한결 속 편했다. 너무 길어서 정이다. 난 정에도 약하니까, 정이나 사랑이나 별반 다를 것 없다. 정든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놓아버리는 일에도 여간 애를 먹는 게 아니기에 그냥 통틀어 그를 정과 동일하다 여기는 쪽이 낫겠다 싶었다. 이 시간 후로 그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오래 붙어있던 친구인 양 그는 오래 맘에 품던 친구다. 이렇게 최면하고서 단순 친구가 되면 되는 거다. 아우 징하다. 얘기하고 나니 또 이 무한 굴레에 한 번 더 질린다.


숙소는 잠만 잘 용으로 싼값에 구했다. 그래도 좁은 공간 안에 발 디딜 틈은 별로 없으나 2인용 침대와 소파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따뜻한 물도 잘 나왔고 에어컨도 빵빵했다. 새벽 한시가 넘어 잠에 들었을 적엔 상아가 내 이불을 죄다 가져간 탓에 추워 덜덜 떨며 깨어나기도 했다. 에어컨 온도 좀 내리고 잠들 걸 그랬다.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아침 여덟시가 조금 넘은 시각 눈을 떴다. 뭉그적거리며 조식을 먹으러 나갔다. 핫케이크와 샐러드,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테이블 위로 놓였다. 우리 옆 테이블에서는 영어로 하는 대화가 이어졌다. 한국 부부 같았는데 아무튼 그랬다. 외국어를 유창하게 한다는 게 신기하고 멋있었다. 난 한국어도 어렵고 현재 시작한 일본어도 겨우 몇 개 되지 않는 단어를 못 외워 동생에게 똥 멍청이 소리나 주야장천 듣고 있는데. 우리 뒤 테이블에서 떨떠름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디서 솰라솰라 소리가 들리냐.”

순간 상아와 동시에 입안의 내용물을 뿜을 뻔했다. 솰라솰라란 단어 선택이 귀여웠고 그게 즉 옆에서 들려오는 영어 대화를 뜻한단 것에서 웃겼다.


*

이튿날은 전날 황리단길이며 대릉원이며 첨성대, 동궁과 월지, 줄기차게 걸어 다닌 탓에 그냥 인천에 올라가는 버스를 타기 전 황리단길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그럼에도 미리 짠 계획에서는 엑스포 대공원에 가는 것 빼고는 모두 완료해냈다. 엑스포 대공원은 카페에서 수다를 떨다가 도저히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포기했다. 상아랑은 서로 결이 비슷해 고민을 공감할 수 있었다. 회사 사람들 눈치를 많이 보고 해야 할 말을 못 하며 혼자 지레 짐작하고 땅굴파기를 한단 점이 똑같았다.


“이게 그래도 우리가 주변 친구들이랑 가족들은 생각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으니까 불안하지 않은데 회사 사람들은 속을 몰라서 불안해지는 것 같아. 친구들이라면 아 얘가 나를 아니까, 이러고 마는데 회사 사람들은 아녀서 혹시 나를 싫어하나? 이 부분이 마음을 상하게 했을까? 혼자 상상해서 걱정하게 되는 거 같은 거 있지.”

“며칠 전에 친한 사람이 인스타그램 DM으로 어떤 게시물을 공유해 줬거든. 내용이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주변 사람들은 나한테 관심 없다는 얘기였어. 정작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한다는. 맞는 말이더라.”

“난 이제 회사 사람들은 회사 사람들로만 분리해서 생각하기로 했어.”

“나도. 그리고 또 이런 생각도 들더라. 숱하게 이런 내 모습을 봐온 사람들은 얼마나 지겨울까. 매번 같은 소리를 반복하게 만드는 게, 얼마나 지겨워. 이쯤 했으니 진짜 변화할 필요가 있어.”


상아는 먹고 싶단 음식을 사고서 단 두 입 밖에 먹지 않았다. 입에 맞지 않는 걸로 굳이 배를 채우고 싶지 않다며 표정을 찡그렸다. 난 그런 상아에게 돈 아까워서 어떻게 해, 나무랐다. 내가 다 해치웠다. 이런 녀석도 사랑스러웠다. 상아가 나를 데리고 다니느라 고생이었다. 계획이라든가 길을 찾는가 하는 면에 있어 영 소질이 없는 난 상아의 손에 이끌려 다녔다. 우정 아이템을 맞추자길래 소품 숍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으나 마땅히 끌리는 걸 찾지 못했다.


“그냥 인천에 가서 주문을 하자.”

상아의 낭만이었던 것도 같은데 내가 너무 대수롭잖게 툭 내뱉었나 싶기도 하다. 뜬금없이 이마에 점이 생겼단 말을 했다. 상아는 정말이네, 했다. 얼굴에 점이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나는 막상 생길 거면 눈에 띄는 쪽에 생기지 하필 여기냐는 투정을 부렸다. 더군다나 앞머리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는 위치라며. 상아는 뭘 그런 걸 부러워하냐고 웃었다. 몇 주 전엔 인스타그램 팔로우인 분이 스토리에 본인 사진을 올리셨는데 입가 점이 매우 매력적이라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선크림 한 번만 바르시고 야외 걷거나 등산 위주로 하시다 보면 금방 생길 거예요..]

재밌는 건, 그분은 점이 생기는 방법을 알려주셨단 거다. 내리쬐는 경주의 햇빛을 올려다보았다. 선크림을 몇 번 발랐더라? 적어도 네시에 경주 시외터미널에 도착해야 했다.


노래방에 들렀다. 삼십분 시간제를 이용했는데 한 곡에 오분이 사라지는 기적 같은 계산법 노래방이었다. 그곳에서 빅나티의 정이라고 하자를 열창했다. 부르면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물품보관소에서 짐을 찾았다. 묵직한 내 가방과 상아의 가방을 빼고 난 그 안에 내 본래 성격을 던져두었다. 타고난 건지 자라면서 변질된 건지 모를 성격은 마음에 드는 점이 단 하나도 없어서 필요 없었다. 되레 걸림돌이 되었다. 보관함 문을 툭, 두드리고 걸음을 돌렸다. 원체 땀이 많아 본래 같았으면 벌써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도 남았어야 했는데 이상하게 이번 여행은 땀이 별로 나지 않았다. 택시를 탈까? 물음에 그냥 걷자, 하고서 터미널까지 걸어갔다. 뙤약볕에 이십분가량 걸었다. 상아의 이마 위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많이 더워?

서울엔 폭우가 쏟아지고 있대.

인천에도 비가 오나.


돌아가기 싫다.


*

월요일 연차 내길 잘했다. 더 쉬라는 부장님의 말씀에도 중간중간 알차게 쓰겠다며 단 하루만 휴가로 냈다. 달리는 버스 창가로 어둠이 내린 걸 보면서 문득 어처구니없는 의문이 들더라. 그는 진짜로 날 헷갈리게 할 의도가 없었을까? 내가 의미 부여를 잘하는 걸까? 덧없는 나날. 눈을 감았으나 잠도 안 왔다. 인천 터미널에 도착하여 짐을 챙겨 내리니 경주에 있었던 시간이 전부 꿈같았다. 모기를 두 방 물렸고 매미소리를 듣지 못했다.


보고 싶은 걸 보기 싫다, 발음한다.

여름날의 밤공기를 사랑한 적이 있던가.

근래엔 자주 좋다.


“병신 새끼.”

내가 나한테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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