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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또 Jul 22. 2023

여름이 한창

배고프다. 최근 회사에선 통 입맛이 없어 점심을 거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과자 같은 걸로 배를 채운다. 사무실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곤욕이고 스트레스다. 아무도 내게 뭐라는 사람은 없다. 일도 오히려 업무 속도가 빨라져 한나절 걸려 완성할 이벤트 프로모션 배너를 이젠 하루에 네개씩 처리해낸다. 품의서를 작성하는 일에도 애를 먹지 않는다. 서툴던 인쇄물도 척척해낸다.


어색해진 공간은 비단 사층 사무실뿐만이 아녔다. 주로 가던 1층부터 5층까지 빠짐없이 발길 닿던 곳곳마다 숨이 막히는 증세를 보였다. 가슴 위로 돌덩이 스무 개가 얹어진 듯이 묵직했다. 갑갑해 헐렁한 옷만 고집한다. 할 일을 마치고서 다섯시 무렵 사람들 눈을 피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제일 그나마 추억이 없는 곳이란 생각이 들어 선택했다. 끼익- 무거운 철문 소리와 함께 뜨거운 열기가 날 반겼다. 팀원들이랑도 잘 오지 않던 장소였다. 아주 가끔 출근하여 겨울엔 일출이나 저녁 어스름이 젖어드는 광경을 목격하러 오긴 했다. 여름엔 더워 없었다.


푹푹 찌는 더위가 어제오늘 지속되었다. 저만치 내다보았다. 이런 게 미생인가, 온갖 똥폼은 다 잡았다. 기지개를 켰다. 창고 비슷한 곳과 화단 사이에 그늘이 생겨있었다. 그 안에 쭈그리고 앉았다. 옆에 벤치도 있었으나 그냥 그렇게 앉아있고 싶었다. 귀에 에어팟을 꽂았다. 대놓고 여름과 관련된 음악을 틀었다. 제목은 Summer. 가사를 따라읽었다. 내가 아닌 저 사람과 새 삶을 만들어가지 마.


청춘은 한창인지라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그렇지만 명확히 뭘 해야 할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는 계절이었다.


*

남이 되자는 말도 웃기다. 우린 남이 아녔던 적이 없는데 나 혼자 그와 남이니 친구니 뭐니 관계를 정의 내리고자 하는 것도 우스운 짓거리다. 능소화는 여름에 피는 꽃이라 한다. 업신 여길 능. 하늘 소. 꽃말은 이름을 날림. 명성. 여성. 애절한 사연이 담겨있었다. 옛날 왕의 사랑을 받던 소화라는 궁녀가 왕의 발길이 끊긴 후 왕을 기다리다 상사병에 걸려 숨졌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해 여름 소화의 처소 담장에 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능소화의 꽃말에 그리움과 기다림도 있는 거라고. 작년 여름 길목에서 꽃 아래 사진을 찍었다. 그게 바로 능소화인 걸 이제야 알았다.


턱을 괸 상태로 검색창을 연다. 상사병을 검색한다. 사랑을 하면서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해 생긴 마음의 병. 요새는 헛것도 보인다. 깜짝깜짝 놀란다. 철렁거리는 심장은 지상 100층에서 지하 1층까지 순식간에 빠른 속도로 내려앉는다. 잘못 봤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계속해서 잘못 볼 경우, 그러니까 즉 헛것을 보는 빈도수가 잦아진다면 마치 그를 실제 마주한듯한 느낌에 빠질 수 있지 않을까? 핸드폰을 머리맡에 던져둔다.


장마철이다. 일주일 내내 비가 내리니 귀뚜라미 우는소리도 매미 우는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죄다 젖어서 어딘가에 피신해있는 모양이다. 모기는 무려 여섯 방을 물렸다. 동생 녀석과 버스를 기다리던 중 까맣고 커다란 놈이 날아와 인정사정없이 물어뜯더라. 벌에 쏘인 것 마냥 퉁퉁 부었다. 모기 맞냐며 회사 사람들이 걱정했다. 온라인 영업팀 정 대리님께서는 약까지 사서 친절히 발라주셨다. 다정이 한 겹 두 겹 쌓아 올려진다. 켜켜이 덧대어진 약은 기대와 달리 효과는 없다.


주변엔 의외로 날 기쁘게 해주는 사람들이 다수이다. 하나 단 한 명이 슬픔의 발단이 되어 늪으로 끌고 간다. 하필이면, 이란 표현이 퍽 잘 어울리도록 그 한 명은 제일 영향력이 커버린 바람에 나의 하루를 잘 망치는 셈이다. 좀 더 바빴어야 했다. 한가로이 SNS나 바라보고 있을 게 아녔다. 보고 싶던 얼굴은 곧장 보기 싫은 얼굴로 뒤바뀌어 날 인상 짓도록 만들었다. 감정이라는걸. 젖 먹던 힘까지 다 써서 있는 힘껏 던졌다. 하지만 허무맹랑하게 돌아오더라. 부메랑처럼 불결한 사랑은 반복되었다.


약국에서 진통제를 계산했다. 영수증을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편의점에선 샌드위치를 샀다. CU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뚱실 참치 샌드위치에 꽂혀있다. 그가 좋아하던 과자를 발견하는 일에 익숙지 않다. 한참 그 앞에 머무르다가 발길을 돌린다. 그와 갔던 카페를 가려고 며칠 전 상아에게 떼를 썼다. 상아는 단칼에 거절했다. 머리가 윙윙 울렸다. 가지 않는 게 맞았다. 그랑 카페에서 나눴던 대화와 차를 타고서 길을 잃던 그의 모습이 어지럽혀졌다. 이마를 감쌌다. 미워하고 싶다. 미워하던 날들이 그리웠다. 한데 미움도 일종의 사랑이기 마련이란다.


“야 미워하는 감정도 사랑이야. 신경 쓰이고 관심을 가지니까 미워지기도 하는 거야. 너 걔 사랑하니? 그런 거 아니라면 미워하지도 마.”

어떤 이가 죽도록 누군가를 미워하길래 잠자코 듣고 있던 다른 누군가가 대꾸했다.


*

상아한테 그와 친구가 될 거라고 했다. 상아는 오만상을 지었다.


“그래. 사귀다 헤어져서 친구로 남는 경우도 있으니까 일방적으로 좋아하다 친구로 남을 수도 있지. 근데 너 못 잊잖아. 어떻게 친구가 돼.”

친구라는 명분으로 연락할 구실을 찾고 만날 이유를 생성해냈다. 솔직히 억지였다. 보고 싶어서 발악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애당초 비집고 들어갈 틈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 그의 완벽한 일상이었다. 흠잡을 거리가 없었다. 만일 내가 비집고 들어갈 시 그게 바로 흠이었다.


난 거듭 그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투정, 어리광이라 치기엔 그한텐 영락없는 화였던 모양이다. 할 말이 없어 답변을 삼갔다. 그의 앞에서 여전히 감정이 앞서는 스스로가 끔찍이도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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