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등 위에 자리 잡은 점

내 사랑이 당신에겐 벌이었을까?

by 주또

가기 싫은 곳을 억지로 나갔을 경우 그곳에서 이상형을 만날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 당신을 처음 보았던 때로 시간을 돌아가 본다. 매사 부정적인 내가 인생이 참 잘 짜인 영화 같다는 생각을 불쑥하게 되었던 시점으로 되돌아가본다. 날이 아직 추웠다. 바람이 세게 불었고 두꺼운 롱패딩을 팔에 걸친 상태로 들어섰다. 지겨웠다. 빽빽이 들어차있는 사람들 사이를 한숨 쉬며 걸어들어갔다.


기다렸다. 고작 이십 대 후반의 나이를 달리고 있는 중이면서 얼굴은 꼭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의 형상을 띄고 있었다. 무미건조한 손가락 놀이가 이어졌다. 톡토독톡. 액정을 두드리는 소리 따라 글자가 쓰였다. 'ㅋㅋㅋㅋㅋ' 웃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웃긴 사람처럼 반응했다. 즐겁지 않았다. 실제 내 기분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타인을 위한 연기가 제법 그럴싸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손목에 차여진 시계를 확인했다. 십분 먼저 빠른 시간. 시간을 맞춰야 했으나 방법을 알아보기 귀찮아서 그냥 들고 다녔다.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후 누군가를 만나기로 되어있었다. 지루함에 목덜미마저 뻐근해졌다. 슬슬 한계에 다다라 입술을 물었다.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나 그 찰나 도로 맥없이 주저앉아야 했다.


이유는 곧 문이 열렸고 등장한 인물로 인해 공기는 완전히 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온몸이 얼어붙었다. 깔끔하게 올린 앞머리. 커다란 체구로 성큼 걸어오는 저 사람. 자체적으로 슬로모션이 걸려 세상이 느릿해졌다. 당신을 중심으로 두었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맥박이 뛰는 소리가 아주아주 커다랗게 귓가를 통해 들려왔다. 동시에 이어지는 이명은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음을 제거 시켰다.


마치 빛을 본 사람처럼 입이 떡 벌어졌다. 너무 근사한 것을 마주하면 할 말을 잃는다. 내 꼴이 딱 그거였다. 할 말을 잃었다. 별안간 정신을 차리지 못해 이름도 잘못 듣고서 나를 부르는 줄 알고 당차게 들어갔다. 뒤이어 밀려오는 쪽팔림에 정신은 더욱 혼미해졌다. '어쩌지.'하며 다시 나가려는 타이밍에 당신이 나를 불러 세웠다.


'그냥 들어오세요.' 나는 그 목소리를 오래도록 간직하게 될 거라 예상했다. '아, 내가 저 목소리가 그리워 울게 되는 날도 있겠구나.' 짐작했다. 당신을 마주 보니 더욱더 확실히 그런 예감이 들었다. 당신은 이 지구상에 있을 법한 사람이 아녔다. 이리도 완벽히 나의 이상형일 수가 있나? 이게 꿈이야 생시야. 허벅지 안쪽을 세게 꼬집었다. 잇따라 오는 통증에 눈물을 찔끔 삼켰다. 내가 뿌린 향수 향이 나고 있을까? 생각했다. 내가 떠난 후에도 이 안에 나의 향기가 가득했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마음의 문을 연,

아니 아예 박살을 내버린 당신이었다.


이렇게 처음 알았다.

그리고 다시 현재.


-'ㅎㅎ'만이라도 보내주세요.


어렵사리 적은 문장. 너무 부담 주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간단 명료하게. 고르고 골라 적은 몇 문장. 하지만 당신은 끝내 연락이 오지를 않았다. '본디 오지 않을 사람'이라고 애당초 염두에 두고서 행한 일이었으나 막상 이렇게 되니 내면에 균열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신을 볼 수 있는 기회조차 영영 사라져버렸다. 마치 농담 같았다. 웃고 넘어가면 그만일 장난. 장난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이런 멍청한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좀 더 잘난 사람이었더라면~'하는 상상. 터무니없었다. 당신은 좋은 것만 보고 경험하며 휘황찬란한 곳을 활보할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난 턱없이 부족했다. 어딜 감히? 정말이지 어딜 감히 당신을 넘보았을까? 어차피 인연이 아녔음을. 단념하라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당신 콧등 위에 자리 잡은 점을 가까이 들여다보고 싶다. 하필이면 또 왜 내가 좋아하는 위치에 점이 있어서는. 일부러 당신 눈치채라고 당신에 관한 특징들을 녹여내 적었다. 맞다. 미련을 버리지 못해 당신과의 우연을 바라는 거다. 당신이 우연히 이 글을 읽고서 본인임을 알아차리기를. 좋아해서 미안해요. 때로는 일방적인 사랑이 죄가 될 때도 있는 법이기에.


내 사랑이 당신에겐 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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