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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쥬드 Oct 22. 2021

누군가를 떠나보낸다는 것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했던가.

주말 동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만나러 간다던 엄마한테 월요일 오후 한 시 사십 분경 전화가 왔다.

회사에 있는 시간엔 절대 전화하는 법이 없는 엄마였다. 순간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지나갔고, 두려움에 전화를 받았다.

차분하려고 하지만 심각하게 떨려오는 엄마의 목소리.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인생에 큰 굴곡을 겪지 않았다고 자부하던 나에게는 아직 조부모님들이 모두 살아계시다는 것도 하나의 자랑거리 였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났더니, 나의 가족 중 한 분이 '돌아가셨다'라고 입 밖에 내뱉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비고 소식을 알릴 때마다 그 사실이 꿈이 아니란 걸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는 기분이었다.


대구로 급하게 내려가는 길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짐을 얼마나 챙겨야 하는지부터 옷은 또 어떻게 입어야 하며 회사에 휴가는 얼마나 나오는지, 경조사 서비스는 어떻게 받는지, 심지어는 나는 지금 어떤 감정을 가지고 가야 하는지 까지.

자칫 잘못하면 '슬픈 척하는 모습'이 나올까 그게 가장 두려웠다.


헐레벌떡 도착한 장례식장에 외가 친지분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엄마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보였고, 외할머니는 많이 야위셨다. 새삼 내가 얼마나 외조부모님을 오랫동안 못 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엄마는, 엄마의 아빠를 주말 내 봤다는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당뇨를 40년간 앓으셨다.

이미 60대 때, 병원에서는 얼마 남지 않으셨다고도 말하셨었다. 그런데 20년을 훌쩍 더 버티어 내셨다. 향년 85세. 살아온 세월의 절반을 당뇨와 함께하셨다.


엄마는 왜인지 마음이 급했었다고 했다.

이러다간 울 엄마 아빠 얼마 보도 몬하고 보낸다면서

급한 일이 끝나자 바로 내려온 게 외할아버지 돌아가시기 3일 전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외할아버지는 집에 계셨다. 반가운 엄마의 얼굴을 보자, 이곳저곳 불편한 곳을 말씀하셨다 한다. 데리고 병원에 가보니, 작은 병원에서 측정한 당뇨 수치는 'HIGH' 최대 600까지 당뇨 수치가 표시되는 기계가 담아내지 못하는 수치가 나왔다.

바로 큰 병원으로 가 정밀 검사를 해보니, 당뇨 수치가 '1113'이 나왔단다. 일반인은 식후 2시간 기준 '200'만 넘으면 당뇨병인데 말이다.


엄마는 주말 내 외할아버지 옆에서 얼굴을 닦아주고 밥을 먹이며 병시중을 들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네가 고생이 많다'라고 하셨단다. 당뇨 수치만 안정화되면 퇴원할 수 있다는 말에 엄마는 아쉽지만 인사를 하고 서울로 출발했다.

대전쯤 도착했을까, 외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다시 대구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 두 시간 동안 엄마는 차 안에서 세상이 무너져 내렸을 거다.


엄마 덕분에, 작은 외삼촌과 큰 외삼촌도 외할아버지를 만나 뵐 수 있었다. 함께 그들의 아버지를 보내드릴 수 있었다. 엄마가 만약 외할아버지를 뵈러 못 갔으면 어땠을까. 얼마나 후회스러웠을까? 6개월 만에 뵌 모습이 마지막이 된 게 참으로 서럽지만 그래도 엄마는 얼굴도 닦아드리고 다 했다며 한숨을 푹 쉬었다.

나는 어쩌면, 어쩌면 외할아버지가 엄마를 기다린 거 같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서울로 돌아가기 전, 외할아버지께 뭐 더 하고 싶냐고 물으니 '너희 삼 남매 봤으니 됐다'라고 하셨단다. 외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삼 남매 얼굴을 보고파서 정신력으로 버티셨나 보다. 못 보고 보내면 괴로워할 자식들 생각해서 힘들어도 버티셨나 보다.


장례식장 분위기는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다 보니 서로 그간 밀린 얘기들도 많았다. 외할아버지가 잘 키워낸 삼 남매와 8명의 손자 손녀들 덕에 화환이 물밀듯이 밀려들어 왔다. 장례식장을 빙 두를 만큼 많이 왔다.

반가운 손님들이 오실 때면 여기저기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가끔, 엄마가 빈소에 앉아 멍하니 영정 사진을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뜨일 때 빼고는 다 괜찮았다.


아까도 말했듯, 나는 모든 게 처음이었다. 입관이 무언지, 발인이 무언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입관에 참관하겠냐는 엄마의 말에 살아계실 때 얼마 못 봬서 죄송한데, 가시는 길이라도 봐야 않겠냐며

담담하게 따라나섰더랬다. 깨끗이 닦여 누운 외할아버지를 만났을 때 숨이 헉 막혔다.

한분씩 돌아가며 인사를 고하고 무너지는 엄마, 아빠의 목소리를 들을 때 난생처음 느끼는 감정에 어쩔 줄을 몰랐다. 외할아버지께 나는 자주 못 뵈어 죄송하다는 인사를 남겼다.

왜 고맙다고 하지 못했을까, 왜 후회를 뱉어냈을까.

이것마저 처음이라 그런 거라며 애써 넘겨야 했다.


할아버지의 관을 들어 차에 올렸다.

화장터에 도착해서 다시 할아버지를 들어 올렸다.

관을 잡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데

3일 내 담담하던 외할머니가 흐느꼈다.

외삼촌이 엄마 울면 아빠 가기 힘들다며 달랬다.

엄마는 삶이 참 덧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할아버지 삶은 덧없지 않았을 거라고 내가 말했다.


화장을 기다리는 1시간 반 동안 아침 식사를 했다.

날씨가 참 맑았다. 구름 한 점 없이.

엄마는 외할아버지 여행하기 참 좋은 날씨라며

살짝 웃었다. 엄마의 어깨를 꼭 감싸주었다.


화장이 끝나고, 유골함에 유골을 담았다.

뭐랄까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아직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마 평생 모르지 싶다.


할아버지는 경치 좋은 납골당에 모셨다.

본인께선 평생 땅 디디고 살았다고, 어디에도 묻지 말고 흐르는 강에 뿌려달라 하셨는데 작은 외삼촌이 그럼 아빠 보고 싶을 땐 어떻게 하냐며 반대했다.

끝까지 결정을 못하다 마지막에 가서 납골당으로 정해졌다. 모시고 나오는 길에 외할머니도, 큰외삼촌도, 작은 외삼촌도, 우리 엄마도 모두 맘이 편하다 했다.

햇살도 기분이 좋았다.

납골당 근처 나오는 길에 글램핑장도 보였다. 이제 우리 여행지는 정해졌다며 웃음이 퍼졌고, 차 안이 조금은 너그러워졌다.


돌아오는 길에 지도 앱을 켜서 납골당 위치를 저장해 두었다.


'외할아버지 계신 곳'


나도 마음이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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