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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쥬드 Dec 03. 2021

이 만년필은 당신과 함께 늙어갈 거예요

#오나의물건씨 2. 카웨코 릴리풋 스테인리스 만년필

25살의 생일이었던가, 생일 선물 뭐 필요하냐는 형의 말에 덥석 만년필이 필요하다 말했다. 그것도 정확하게 '카웨코 릴리풋 스테인리스'라고. 만년필을 써본 적도 없던 내가 이 제품에 끌렸던 건 어느 사이트의 소개 문구 때문이었다. '사용자에 맞춰 이 만년필은 함께 늙어갈 것입니다.' 과연 스테인리스 재질의 이 제품은 필통 속에서, 나의 손 속에서 자욱이 남겨지며 온전히 내 것이 되어갔다.


품질 보증서 디자인이 매우 깜찍하다.

받아본 만년필은 귀여운 틴케이스에 들어있었고, 생각보다 훨씬 작았다. 가운데 손가락 크기 정도? 스테인리스가 주는 묵직함과 오묘한 은빛 색이 썩 맘에 들었다.


처음 만년필을 써보는지라 만년필의 장점이 무언지도 몰랐었다. 그래서 카웨코 릴리풋을 처음 그어봤을 때, 응? 하는 기분이 먼저였다. 생각보다 잘 안 써졌다. 어느 정도 힘을 주어야만 틈새를 비집고 잉크가 흘러나왔다. 힘을 주면 스테인리스의 묵직함이 손가락을 눌렀다. 손에 자욱이 남을 지경이라 금방 내려놓게 되었다. 만년필이라면 다 그런 줄 알았다. 불편함을 감수하는 물건인줄 알았다.


그러던 중 동료가 사용하는 라미 만년필을 써봤는데 웬걸, 힘을 전혀 주지 않아도 스윽 미끄러지는 느낌에 충격을 받았다. 뭔가 잘못됐음을 느끼고 폭풍 검색을 해보니 만년필의 장점은 '힘을 들이지 않아도 써지는 필기감'에 있다는 거 아닌가? 약간 화가 치밀었다. 이 녀석은 라미보다 훨씬 비싸다고!


보증서에 작성된 연락처로 연락하여 주말에 예약을 하고 방문했다. 어느 상가의 지하 작은 공간에 아저씨가 앉아있었다. 내 만년필을 요리저리 작성해보시고, 분해해서 세척하고, 필름 사포로 몇 번씩 갈아내어 주셨다. 이내 스윽- 잘 써지는 만년필로 다시 탄생했다.


하지만 예민한 이 친구는 그 뒤로도 몇 번씩 먹통이 되곤 했다. 덕분에 필름 사포도 사고, 루페(주로 시계 등 작은 부품을 수리할 때 사용하는 돋보기)도 구비하고, 온 손이 잉크로 물들도록 이리저리 만년필을 만져봤다. 정말 싫어져서 내팽게치고나면 불현듯 다시금 글귀가 떠올랐다. '만년필은 필기체에 따라 형태가 변화한다. 즉, 주인을 닮아간다.' 뭐야, 지금 이게 다 나 때문이라는 거야?


더군다나 이 친구는 뚜껑을 돌려서 열고, 뒤에 돌려서 끼워야만 펜 하나의 크기가 된다. 급하게 뭔가 적어야 할 때는 사용할 수가 없다. 세상엔 너무나 편리한 도구들이 많다.


그럼에도 나는 중요한 순간이면 이 친구를 들어 올린다. 그 뒤로 만년필이 3개 정도 더 생겼지만, 여전히 이 녀석 만한 게 없다. 까탈을 부리지 않는 날이면 부드럽게 써지는 필기감이 기분 좋다. 뚜껑을 돌리고 꽂는 번거로움도 어느 순간에 여유로움으로 느껴졌다. 여기저기 난 생채기가 나랑 함께한 시간들 같아서 좋다. 무엇보다 이 친구를 첫 만년필로 접한 덕에 만년필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어느 사이트의 제품 소개글에서 본 것처럼, 이 제품은 나와 함께 늙어가고 있다. 오래토록 함께 종이 위를 달려나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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