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담그는 날
가족을 위해 노력하는 내가 나 다운 것 아닌가?
- 어, 김치가 얼마 없네?
김치가 떨어져 간다는 마나님의 한 마디가 부엌에서 서재로 넘어와 귀에까지 들리면 나는 몸이 먼저 반응한다. 혼잣말이 내 귀에까지 들릴 만큼 크게 말을 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반백년 눈칫밥만 먹던 내가 모를쏘냐. 쓰던 글을 저장해 놓고 얼른 밖으로 나가 늘 다니던 한인마트에서 배추랑 대파, 양파 등등 필요한 재료들을 배달시켜놓고 돌아왔다. 흐뭇해하는 마나님의 표정을 보니 내가 참 잘했구나 생각이 드니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뿌듯함에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전혀 겁나지 않는다. 잠시 후 김치 재료가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는 그것을 부엌으로 옮겨 손질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배추를 꺼내어 겉잎사귀들을 뜯어내 시래기용으로 분리하고 예쁘게 벗겨놓아 샛노랗게 익은 속을 네 등분한다. 커다란 스뎅 대야에 네 등분한 배추를 넣고 살짝 잠길 만큼 물을 부은 후 적당량의 소금을 뿌려 빳빳하게 힘주고 있는 배추를 겸손하게 만든다. 이때 무거운 것을 올려 스스로 겸손해지기 싫어하는 버르장머리 없는 배추를 도와주어야 하는데 마땅한 게 없어 주전자에 물을 가득 담아 올려놓았다. 누군가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은 약간의 시간이 필요한지라 그동안 따로 분리해둔 시래기용 겉잎사귀들을 깨끗하게 씻어 삶는다. 오래 삶을 필요는 없으니 바로 꺼내어 물을 짜내고 한 번 먹을 만큼씩 비닐 팩에 담아 냉동실에 안치시킨다.
그러고 나면 속을 준비할 차례. 우선 대파를 깨끗하게 씻어 파뿌리는 따로 보관하고 반은 1cm 반은 3cm 크기로 잘라 놓는다. 작은 것들은 평소 음식할 때 사용할 것들이라 비닐 팩에 담아 냉동실로 직행하고 큰 것은 김치 담그기 마지막 순간에 들어갈 것이라 따로 보관해 둔다. 다음은 양파를 씻어 껍질을 벗기고 예쁘게 잘라 놓는다. 이때 파뿌리와 양파 껍질 등은 향후 마나님이 육수를 낼 때 사용해야 하니 다시 한 번 깨끗하게 씻어 전용 보관 장소에 모셔 놓아야 한다. 잊어버리면 괜히 한 소리 듣게 되니까.
마지막으로 밀가루로 풀을 쑤어 준비해놓고, 굵은 고춧가루와 고운 고춧가루를 각각 한 컵씩, 올리고당 반 컵, 설탕, 다진 마늘, 다진 생강, 소금, 깨 등을 한데 섞어 믹서기로 갈아준다. 매실액이 있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같은 서민은 이곳 브라질에서 사기가 좀 버겁다. 어쨌든 여기까지 했으면 준비 끝.
손 깨끗하게 씻고 정육점으로 가 저녁에 생김치랑 먹을 삼겹살을 사와 가족들의 대대적인 호응을 이끌어 낸다. 냉장실에 고이 접어 보관해두고 배추가 얼마나 겸손해졌는지 확인. 아직 멀었으니 커피 타임을 가져본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온 몸의 마디마디에서 들려오는 괴상한 신음소리는 쿨하게 무시해줘야 한다. 입 밖으로 새나오는 순간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갈 수 있으니.
배추를 다시 확인하니 많이 겸손해졌다. 바로 꺼내어 그간의 고생을 깨끗한 물로 위로해 준다. 그리고 바로 충만한 자비심이 깃든 칼질로 배추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바로 먹을 것들이니 포기김치는 포기했다. 신들린 솜씨로 잘라주면 폼이 나겠지만 없는 솜씨 어쩌랴. 대충 잘라내어 도로 스뎅 대야에 넣는다. 4포기를 사왔으니 16등분한 것을 잘라내는 셈인데 어설픈 칼질은 시간도 어설프게 보내게 마련이다. 한참의 칼질 끝에 수북이 쌓인 배추 쪼가리들 위에 준비해둔 속을 싹싹 긁어 남김없이 넣어준다.
머리엔 일회용 캡 양 손엔 일회용 장갑을 착용하고 바닥까지 손을 집어넣어 버무리다 굵은 고춧가루와 고운 고춧가루를 조금씩 추가해 색깔을 맞춰준다. 아참, 멸치 액젓을 까먹었다. 바로 마나님께 부탁하여 따라주는 액젓을 두 손으로 정성껏 받들어 모신다. 계속해서 섞어주기. 한참을 섞다가 대충 색깔이 괜찮다싶으면 맛을 한 번 본다. 모자란 듯하면 조금씩 추가해 맛을 맞춰주고 김치 통에 넣어 주면 끝...이 아니고 뒷정리할 시간이다. 이제 저녁 먹을 준비해야 할 시간까지 자유시간이다. 물론 그 전에 준비한 삼겹살을 물 속에 퐁당 빠뜨리고 커피 알갱이랑 된장 등을 넣어 수육을 준비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이쯤되면 어머니들의 노고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김치를 담그다보면 가끔 소금을 많이 먹으면 나도 겸손해질까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리가 없겠지. 겸손 대신 고혈압이나 오지 않으면 다행이지. 다양한 재료들을 한데 넣어 섞다보면 각 재료들의 본연의 맛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김치 맛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나도 내 성질 머리들을 한데 섞어 믹서기에 넣어 돌리고 버무리면 다른 맛이 나오려나. 그러고 보니 내가 요즘 열심히 하는 글쓰기에도 그래보면 어떨까싶다. 톡 쏘는 독설 반 숟가락, 달달한 위트 한 국자, 매콤한 감성 한 국자, 묵혀두었던 상처 한 숟가락, 고소한 아이들 이야기 한 국자, 오묘한 맛의 판타지 한 숟가락을 넣어 한데 섞어 통에 넣고 며칠 푹 익히고 나면 맛난 글이 나오지 않을까?
힘든 것은 그때그때 풀어주어야 하니 노트북을 켜고 김치 담그느라 고생한 나를 글로 위로해보는데 써놓고 보니 나름 괜찮네하며 자족한다. 그때 휙하며 머리 위로 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다. 아, 이 글을 한식 공모전에 보냈어야 하는 건데. 이미 떠나버린 버스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리 가버렸으니 아쉬워도 어쩌랴. 운이라곤 참... 없는 실력을 이렇게 포장하고 위장할 수도 있구나. ㅋㅋ
그런데 울 마나님 손목은 언제나 괜찮아지시려나. 가족을 위해 나는 오늘도 부엌에서 시작하여 부엌에서 끝을 보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