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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실, 나약하잖아

by Judy

나는 어떤 사람이다 규정짓는 것이 유행이어서 그런 건진 몰라도, 나 역시 나는 이렇다고 한마디로 표현하는 게 꽤나 좋았다. 그 한마디로 내가 평가되고,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나를 바라봐 주는 게 만족스러웠다. MBTI가 붐이 된 것에 대한 마땅한 이유가 있듯이. 심지어 회사의 워크숍에서도 MBTI 기준으로 조를 짜줬고, 이후에도 종종 성격유형 검사를 통해 서로를 진단하고 파악하는 워크숍을 진행했었다.


이렇듯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중요해진 시기이다. 모두들 한마디로 서로를 표현하는 것을 원하고, 나 역시 그 한마디로 나를 드러내는 것이 편리했다. 그렇지만 나는 늘 MBTI 검사를 할 때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나의 성격 탓에 답을 하기 어려운 적이 많았다. 아마도 이 때문에 오락가락하게 대답해서 취업 준비 시절 여타 대기업의 인적성 검사에서 탈락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라 본다.


'나는 원래 이래'라고 말하는 게 쉬운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사람은 늘 상황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고 반응하기 마련인데. 원래 이랬던 사람조차, 특별한 상황에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변하기 마련이다. 나는 거진 대학교 때까진 별명이 '얼음공주'로 통했었다. 어지간한 일에선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요즘말론 '쌉T'여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왜 저따위 일로 쉽게 눈물을 흘리고 감정이 격해지는 것인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 감정소비를 할 시간에 해결책을 마련하지. 한심할 때도 있었다.


그러던 내가 지금은 고작 드라마 한 장면에서도 엉엉 울어버린다. 조금 전에는 넷플릭스에서 '트렁크'라는 시리즈를 정주행 했는데, 인생의 쓴맛을 한참 본 여주인공이 드디어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마주했을 때 꾹꾹 눌러왔던 울음을 어떤 이유도 없이 얼굴을 보자마자 툭 터져 버려서, 한참을 쏟아내며 소리 질러 우는데, 그 장면을 보며 같이 울었다. 그냥, 그 주인공이 억눌렀을 고통과 참아왔던 괴로움과, 그리고 마침내 어떤 따뜻한 온기 속에서 그것을 터뜨려도 된다는 믿음을 가졌을 때의 그 마음이 너무 공감이 되고 이입이 돼서 나도 모르게 끅끅 따라 울게 되었다.


'잘 우는 사람'은, 물론 공감을 잘하고 쉽게 마음이 동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많이 시달렸던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쉽게 그 슬픈 마음에 이입이 되고, 공감이 되고 그리고 이해가 되는 그런 삶을 살았나 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요즘 내가 울만한 대목이 아닌 곳에서 자꾸 눈시울이 빨개지는 것을 보면 '아, 이런 일로도 이렇게 생각을 하게되는 사람이었나 보구나'하고 상대를 이해를 하게 된다.


자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그래서 나는 MBTI얘기를 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아직도 나의 MBTI 결과가 꽤나 만족스럽다. 결과지를 읽었을 때, 내가 원하는 이상향의 사람을 그려낸 것 같았다. 그래서 그게 진짜 나인지 아니면 내가 바라는 나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다만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봐줬으면 좋겠다는 마음만은 여전하다. 검사 결과상 나는 아주 강인하고, 굳건하고, 심지가 곧은 사람이다. 쉽게 흔들리지도 않으며, 앞을 보고 달리며, 나를 늘 다그쳐서 원하는 결과지를 만들어내는 그런 사람이다. 그래 나는 그렇게 살고 싶다. 그리고 내가 그런 사람이라 믿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내가 얼마나 유약했는지. 사실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 사람들인지. 찰나의 바람결 만으로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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