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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 살아진다

feat. 폭삭 속았수다

by Judy

최근 정이 들어버린 드라마가 있다. 아이유, 박보검 주연의 '폭삭 속았수다.' 고단한 오늘과 팍팍한 내일밖에 없는 주인공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살면, 살아진다." 그래 그거 참 맞는 말 같다. 사고로 가족을 잃고도, 사기로 수억을 날리고도,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도, 선천적으로 어느 한 곳이 아픈 채 평생을 살아가야 한대도, 그래도, 내가 나 스스로를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숨 쉬며 시간이 흐르는 대로 살면 어떻게 꾸역꾸역 또 살아지는 게 삶인 것 같다.


속을 열어봤을 때 밝기만 한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다들 마음이란 장기가 반쯤은 까맣게 타서 녹아있을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거의 다 타서 재만 남아있는 채로도 살겠지. 곧 죽을 것 같이 마음에 돌덩이가 콱 박히고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아픔과 고통을 겪더라도, 그래도 시간이 약이고 그래도 숨 쉬고 버티면 또 내일이 오고 그렇게 살아지는 것 같다. 오늘은 떠난 아이의 기일이다. 작디작고 예쁜 내 새끼가 떠난 지 꼬박 1년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살아있다. 살아서 아이를 추억하며 글을 쓰고 있다.


처음엔 정말, 이렇게나 큰 고통 속에서 살아있느니 아이를 따라가는 게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아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너무 그립고 안고 싶어서, 내가 여기서 생을 마감하면 아이를 만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반복됐다. 그러다 이 생각의 굴레에서 조금은 벗어나고 싶어서 운동을 시작했고, 심리 상담을 받게 되고, 직장생활 외에도 퇴근 후에 다양한 활동들을 시작하며 '아이를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을 할 새가 없도록 나를 바쁜 스케줄 안에 가둬놨다. 마음의 안정을 위해 몸을 혹사했다.


상실과 아픔, 크나큰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버티고 견디는 방법은 다 비슷한가 보다. '폭삭 속았수다'에도 이런 대사가 있었다.

살다가 살다가 한 번씩 똑 죽고 싶은 날이 오거든 잠녀 엄마 물질하던 생각 해. 흙 밟고 사는 것들이야 끄덕하면 죽는다 소리 입에 달고 사는데 암만 죽겠고 서러워도 잠녀 입에서는 그 소리 절대 안 나와. 그 드신 물속에서 죽을 고비 골백번마다 살고 싶은 이유가 골백개더라. 몸 고되면 마음이 엄살 못해. 살다가 살다가 똑 죽겠는 날이 오거든 죽어라 발버둥을 쳐. 이불이라도 꺼내다 밟아. 밭 갈아엎고 품이라도 팔러 나가. 나는 안 죽어. 죽어도 살고야 만다. 죽어라 팔다리를 흔들면 꺼먼 바다 다 지나고 반드시 하늘 보여. 반드시 숨통 트여.


물론, 이렇게 살아있다고 아픔이 치유된 것은 아니다. 나도 모르는 무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나는 후회와 자책을 하고 있다. 아이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게 너무 많은데 이제 해 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갚을 방법이 없으니까. 이 마음이 영영 해소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작년 11월에 수면 내시경을 했었는데, 수면 마취에서 깨는 그 비몽사몽 한 와중에 아이의 생각이 선명하게 스쳤고, 나는 내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간호사님이 날 깨우러 와서 등을 토닥여 주고, 회복실에서 나와 환자복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에 가서 까지도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누군가 있는 힘껏 발로 찬 축구공이 아주 세게 날아와서 내 명치에 맞은 것처럼, 가슴이 너무 아팠고 아이가 너무 보고 싶었다. 현생에서는 마음 놓고 아이 생각을 할 새를 안 줬으니까. 분 단위로 시간표를 짜서 계속 계속 몸을 움직였으니까. 그래서 그나마 살고 있었는데, 몸도 정신도 몽롱한 상태가 되자 어김없이 나는 원점으로 돌아가서 처음의 겪었던 만큼의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매일 죽어라 팔다리를 흔들며 살고 있는 것 같다. 나를 살아지게 하기 위해서. 아이가 떠난 후 오늘까지 꼬박 1년의 시간을 그렇게 살았고, 이렇게 살아진 것 같다.


보고 싶은 내 아가. 사랑하는 내 아가.

다시 너를 처음 만난 순간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기쁘게 안고 집으로 데려올 거야. 지금도 그 겨울 12월 31일에 우리 집에 네가 처음 왔던 순간을 기억해. 집안에 꼬순내를 풍기며 똥꼬발랄한 어린 시절의 모습들이 아직도 선명해. 커가면서는 또 얼마나 예뻤는지. 밖에서 아무리 상처받고 기분 상한 일이 있어도, 집에 가면 늘 나를 반겨주는 우리 아가가 있어 기뻤어. 너와 눈을 맞추고 있으면 나는 매일 밤 치유된 마음으로 잠들 수 있었어. 나는 너무 고마운 마음밖에 없어서, 아가한테 이렇게 많이 사랑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고마워서, 그렇게 아픈 병에 걸려서도 내색 안 하고 활기찬 모습으로 항상 사랑만 주려고 했던 게 너무 미안해서,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이렇게 너를 보내지는 않을 텐데.. 더 많이 바라보고 더 많이 사랑한다 말해주고 더 많이 안아줄 텐데.. 평상 우리 아가를 추억하며 사랑하며 그렇게 살게. 사랑해. 아프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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