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마지막 날에도 에든버러의 하늘엔 잿빛 구름이 가득했다. 바람은 강하게 불었고, 낮게 드리워진 구름들은 곧 빗방울을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이 시기의 에든버러 날씨가 변덕스럽다는 것을 미리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일정 내내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 하니 조금 당황스럽긴 했다. 처음엔 회색 하늘과 에든버러 올드타운의 분위기가 운치 있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좋아하기도 했지만 계속해서 흐린 하늘을 보니 답답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절망감마저 들기도 했다.
날씨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나는 오늘도 윈드스토퍼의 지퍼를 턱 아래까지 끌어올리고 야구 모자를 눌러쓴 채 거리로 나섰다.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산을 쓰기에는 애매했다. 그래서 나는 모자를 다시 고쳐 쓰고 그냥 비를 맞으며 걷기로 했다. 숙소에서 나오면 눈앞에 바로 스콧 기념탑이 보인다. 고딕풍의 기괴하고 시커먼 탑의 형태는 마치 오래된 SF 영화에 나올 것만 같은 우주로켓처럼 보였다. 비가 흩뿌리는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검은색 스콧 기념탑. 이 곳에 머무른 며칠 동안 나에겐 파란 하늘에 떠있는 하얀 구름만큼이나 자연스럽고 익숙해져 버린 이미지였다.
4년 동안 다니던 회사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끝내 도망치듯 그만두었을 때 나는 아무런 대책도, 계획도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막막한 상태로 그저 멍하니 하루하루를 흘려보내기만 했다. 그렇게 의미 없이 보내던 어느 날, 나는 갑자기 어디론가 떠나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냥 이곳이 아닌 내가 잘 모르는 먼 이국의 땅으로 가고 싶었다. 잠깐만이라도 이곳의 생활을 벗어나 완전한 이방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막연하긴 하지만 뭔가 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갑작스럽게 떠나 온 곳이 바로 여기, 에든버러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열흘간의 여행이 과연 내게 무엇을 주었을까? 난 이 여행에서 무엇을 느꼈고, 그로 인해 어떤 것이 변했을까? 기대와는 달리 여행 일정이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낯선 타국에서의 외로움과 막막함만이 커져갈 뿐이었다.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부터 무엇이 변할 거라고 기대했던 것이 잘못된 생각이었을까?
걷다 보니 로열 마일 거리에 들어섰다. 이 거리의 풍경이 이제는 익숙했다. 어둡고 빛이 바랜 건물들과 그 건물들 1층에 있는 캐시미어와 스카치위스키 상점들, 돌로 포장된 오래된 도로, 그리고 그 도로 위를 걸어 다니는 관광객들. 처음 이 거리에 왔을 때는 고풍스럽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낡고 쓸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 낡고 쓸쓸함이 왠지 모를 따뜻함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흩뿌리던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나는 윈드스토퍼를 벗어 물기를 털어내고 작게 접어 가방에 넣었다. 바람이 조금은 서늘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서늘한 공기가 폐 속으로 가득 들어왔고 상쾌한 기분이 느껴졌다. 나는 모자를 벗어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 다시 모자를 눌러쓰고 앞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저기요.” 어디선가 한국말이 들렸다. 나를 부른 건가?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 뒤에는 2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녀는 하얀색 컨버스화에 짙은 색 청바지, 그리고 선명한 붉은색의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커다란 크로스백을 매고 있었고,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네?” 나의 목소리는 조금 어색했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한 한국말이었다. 나는 여행을 시작하고 나서 단 한 번도 한국말을 하지 않았다. 꼭 필요했던 순간을 제외하면 말 자체를 거의 안 했다. 오랜만에 목소리를 내니, 그것도 한국말로 내니 내 목소리가 아닌 듯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 한국 분 맞으시구나. 다행이다. 괜찮으시다면 사진 좀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녀는 나에게 사진기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걸고 부탁을 한 것이 고맙게 느껴졌다. 그녀는 가로등 옆에 기대어 섰다. 자신의 뒤로 로열 마일 거리와 상점들이 나오게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다양하게 구도를 잡으며 여러 장을 찍었다. 사진이 마음에 안 들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카메라를 받아 든 뒤 사진을 바로 확인하지는 않았다.
“감사합니다. 혹시 저도 찍어드릴까요?”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나는 감사하지만 괜찮다고 말했다.
“아 네. 여행 중이신 건가요?” 그녀가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네, 그럼 남은 여행도 즐겁게 잘하시고요. 행운을 빌어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내가 걷던 방향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나는 한참 동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단발머리, 하얀색 컨버스화, 그리고 붉은색 스웨터. 그녀의 색채는 빛바랜 풍경 속에서 선명한 작은 점이 되어 내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친구와 몇 년 전에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난 건 바로 그때였다. 친구는 내게 행운의 여신에 대한 얘기를 했었다. 왜 갑자기 그 얘기가 생각났을까. 아마 그녀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 때문일 것이다. 행운을 빌어요.
“행운의 여신이 와줬으면 좋겠어.”
우리는 자주 가는 주점에서 두부김치를 시켜놓고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잔에 가득 차 있던 소주를 단번에 입안에 털어 넣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그녀가 짠하고 나타나서는 ‘당신에게 행운을 드릴게요.’ 이러면서 나에게 키스를 해 주는 거지.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로 말이야.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거야.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오직 그녀의 키스 한 번이면.”
그는 세 번째 회사를 그만두고 백수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그는 항상 자기가 진짜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지금까지 다녔던 회사들은 그의 고민에 대한 해답이 아니었다.
“행운의 여신이라니, 너도 참 웃긴다. 그래 뭐 어떻게 되는 건데? 로또라도 당첨되나?” 나는 그의 잔을 다시 채워주며 말했다. 그는 키득거리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소주잔을 들어 가득 채운 소주를 또 한 번에 비워 냈다.
“글쎄, 뭐가 어떻게 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그는 빈 잔에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음, 내가 생각하는, 내가 바라는 행운은 말이야, 그런 눈에 보이는 갑작스러운 큰 변화는 아니었으면 좋겠어. 그런 것보다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스스로 알아채지도 못하지만 어느새 상황이 근본적으로 변해 있는 거. 마치 계절이 변하듯 자연스럽게.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어. 그녀가 주는 행운은.”
그는 살짝 풀린 눈동자로 허공을 잠깐 응시했다.
“물론 실제로 그런 행운이 나에게 오지는 않겠지. 그래도 희망은 가질 수 있잖아?” 그는 술잔을 들고 나를 보며 얘기했다.
“너도 언젠가 나처럼 행운의 여신을 기다리는 순간이 올 거야.” 그는 들고 있던 술잔을 나를 향해 앞으로 내밀었다.
“우리 모두 그녀가 오기를 바라며, 건배.”
나에게 행운의 여신에 대해 얘기해줬던 그해 겨울에 그는 인사불성으로 술에 취해 새벽에 집으로 가던 중 빙판에서 미끄러져 뇌진탕을 일으켰고, 결국 먼저 세상을 떠났다. 기다렸던 행운의 여신으로부터의 키스를 그는 받지 못했다. 대신 세상 사람들이 흔히들 불행이라고 부르는, 가장 비극적인 불행이 친구에게 찾아왔다.
그때 친구가 그렇게 말했었다. 나도 행운의 여신을 기다리는 순간이 올 거라고. 나는 지금 행운의 여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지금 나의 상황을 변하게 해 줄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녀가 오지 않는다면, 그러면 결국 나에게도 불행이 찾아오게 될까? 만약 불행이 찾아온다면 이곳에서는 아니길 바랐다. 먼 이국땅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불행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로열 마일을 시작으로 올드 타운의 곳곳을 걸어 다녔고, 칼튼 힐에도 다시 올라갔다 내려왔다. 걸어 다니는 동안 보이는 시내 곳곳의 공동묘지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그냥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에든버러의 모습을 그렇게 담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담긴 에든버러의 풍경들 속에는, 나의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붉은색 스웨터가 풍경 어딘가에 항상 담겨 있었다.
시간이 지나 서서히 해가 지고 빗방울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공기의 온도가 빠르게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접어두었던 윈드스토퍼를 다시 꺼내 입었다. 하지만 몸속까지 파고드는 한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갑자기 졸음이 밀려왔고, 가벼운 두통을 느꼈다. 숙소로 돌아가 잠을 자고 싶었다. 여행의 마지막 밤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숙소로 빠르게 이동했다. 내가 묵고 있는 6인실 도미토리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내 침대에 그대로 쓰러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을 꾸었다.
나는 숙소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내가 묵고 있던 방은 맨 꼭대기 층이었고, 낡고 오래된 엘리베이터는 매우 느린 속도로 내려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중간에 서더니 문이 열렸다. 그리고 로열 마일에서 만났던 붉은색 스웨터의 그녀가 엘리베이터에 탔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여기 숙소에 묵고 계세요?”
“네, 전 어제부터 여기서 묵고 있어요. 여기서 묵고 계신 거예요?”
“네, 전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내일 오후에 한국으로 돌아가거든요.”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엘리베이터가 3층에 도착했고 천천히 문이 열렸다.
“저는 여기서 내려요. 그럼. 내일 한국으로 잘 돌아가시고요.” 그녀는 웃으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전에 나를 보며 말했다.
“행운을 빌어요.”
“저기요, 잠깐만요.” 나는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봤다. 나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저에게 키스를 해주지 않으시겠어요? 저는 지금 행운이 필요하거든요.” 그녀는 조금은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놀라셨겠지만, 전 지금 간절해요.” 그녀를 보며 나는 말했다. 그녀는 나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혔다.
“내 키스가 당신한테 도움이 된다면, 해 드릴게요.”
그녀는 내 입술에 키스를 했다. 내 입술 위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입술이 느껴졌다. 그녀는 내게서 한발 물러선 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모든 건 변할 거예요.”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고, 그녀는 내렸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아침이었다. 방에서 나와 복도에 있는 창문을 통해서 본 에든버러의 하늘은 온통 파란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얇게 펼쳐져 있는 구름은 언제 잿빛이었었냐는 듯이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고, 햇살은 거리 곳곳의 물웅덩이 위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아침을 먹고, 캐리어에 짐을 챙기고, 체크아웃을 한 뒤 거리로 나왔다. 햇살은 따뜻했고, 공기는 신선했다. 거리 저편으로 보이는 스콧 기념탑을 보았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검은색 스콧 기념탑도 인상적이었다. 나는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정류장으로 가던 중 가로변 상점의 쇼윈도에 붉은색 캐시미어 스웨터가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멈춰 서서 그 옷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입술을 살며시 만져보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그 스웨터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이제 모든 건 변할 거야.” 나는 혼자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다시 캐리어를 끌고 정류장으로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