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주간 단편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 이 세계를 통과하는 거야

by 주얼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라고 그림자는 답답하다는 듯 내게 말했다.

4월 중순의 밤공기에는 아직까지 서늘함이 남아 있었다. 천(川) 변의 둑 위로 부는 바람은 그 서늘함을 얇게 도려내어 내 옷깃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나는 점퍼의 지퍼를 턱밑까지 올리고 무릎을 세우고 앉아 팔로 무릎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글쎄,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어. 도대체 뭘 해야 하는지.” 내 힘없는 대답은 마치 연기가 공기 중으로 퍼지듯 희미하게 사라졌다. 그동안 나를 이해해주고 내 곁에서 항상 나를 응원해 줬던 그림자도 지금 대답에는 적잖게 실망한 듯했다.

“네가 지금 힘들다는 거 나도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우리가 당장 어떤 거창한 변화를 기대하는 건 아니잖아. 난 최소한 네가 지금의 그 무기력함에서 벗어나 보려는 시늉이라도 해봤으면 좋겠어.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건 아닌 것 같아”라고 그림자는 말했다.

그림자의 말이 맞았다. 나는 지금 빠져나올 방법을 도무지 알 수 없는 무기력함이라는 늪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벗어나 보려는 최소한의 발버둥도 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누군가 나를 이 지독한 곳에서 건져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바닥이 보이지도 않는 어둠 속으로 서서히 침잠해 가고 있는 내게 튼튼한 밧줄을 던져주며 ‘자, 어서 그 밧줄을 잡아요. 내가 당신을 끌어올려 줄게요’라고 말해 주기를. 그리고 힘이 세 보이는 팔로 밧줄을 잡아당겨줄 누군가가 나타나 주기를. 하지만 그 누구도 나에게 밧줄 같은 것을 던져주지 않았다.

“아무도 너에게 밧줄 같은 걸 던져주지는 않아”라고 그림자는 말했다.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오로지 네 힘만으로 해야 해. 네가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그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주지 않아. 그 어둠 속에서는 나도 어떻게 도와줄 수가 없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나는 가만히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았다. 서늘한 바람이 불었고, 낮은 수풀들이 조용히 흔들렸다. 그 위로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도 함께 흔들리는 듯 보였다.


이런저런 실패를 겪고 나서 인생을 새롭게 다시 시작해보자고 다짐했었다. 새로운 내가 되기 위한 ‘어떠한 변화’를 간절히 원했었다. 하지만 과연 그 '어떠한 변화'가 무엇인지 알기 위한 제대로 된 질문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떠한 답을 찾아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바라는 모습은 마치 불투명한 유리를 통해 보는 것처럼 그 명확한 형태를 도저히 그릴 수 없었다. 그렇게 그려지지 않는 모습에 절망한 나는 결국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무기력감에 빠지게 되었고, 방향을 잃어버린 채 시간만 헛되이 보내고 있었다.


“아까는 내가 너무 채근하듯 말해서 미안해.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졌었나 봐”라고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내게 말했다. 내 등 뒤의 키가 낮은 가로등은 그를 비현실적으로 길게 늘어뜨려 놓고 있었다. 그의 머리맡으로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었고 그 길을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운동복을 차려입고 빠르게 걷고 있는 사람들, 손을 잡고 천천히 걸으며 봄밤의 여유를 즐기는 연인들,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가끔씩 벨을 울리며 이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치는 자전거들. 그들은 모두 각자의 목적과 방향을 갖고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아니야. 네 말이 맞아. 지금처럼 가만히 있으면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최소한 발버둥이라도 쳐보는 게 맞아.”

“그래도 너무 쫓기듯 서두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우선은 시간을 가지면서 차분히 집중해보자. 그러면 분명 어느 순간, 마치 네 주변의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은 순간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 순간을 기다려보자.”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는 순간." 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림자의 말을 따라 했다.

"하지만 난 그 순간이 이미 지나가 버린 건 아닐까 걱정이 돼. 내가 그 떨림을 느끼지 못하고 놓쳐버린 건 아닐까 하고 말이야”라고 나는 말하며 작게 숨을 내뱉었다. 어쩌면 나는 이미 그 순간이 지나가 버린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스스로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아 버렸을지도. 지금의 나는 그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나도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너에게 도움이 되지 못해서 나도 안타까울 뿐이야"라고 그림자가 나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선택은 오로지 너의 몫이야. 여기서 그냥 주저앉아 버리면 너는 지금 모습 그대로일 거고,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간다면 아마도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겠지. 비록 그 모습이 네가 원하던 게 아닐지라도 말이야.” 그림자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나직이 속삭였다.

“그 어떤 선택을 한다 해도 난 네 곁에 계속 남아 있을 거야. 네가 어떤 모습이든 그 모습은 나고, 나는 너일 수밖에 없어.”


산책로의 한쪽 끝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러닝 동호회처럼 보이는 그들은 서로 속도를 맞추며 힘차게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가슴을 내밀고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두 다리로 탄력 있게 땅을 박차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 모습은 그들의 지금 목적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듯 보였다. 어떤 장애물이나 어려움에도 그들은 멈추지 않을 것처럼 주저 없이 앞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내 시선은 그들을 계속해서 쫓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 거칠게 내뱉는 숨과 앞뒤로 흔들리는 주먹 쥔 손, 그리고 지면을 밟을 때마다 근육들 하나하나가 꿈틀거리는 강인해 보이는 두 다리. 그들의 모습은 내게 어떠한 상징이나 은유처럼 다가왔다. 그들은 나를 향해 바라는 모습을 몰라도 상관없다고, 중요한 건 단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어떤 계시와도 같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바라는 것을 몰라도 상관없어

네가 서있는 곳이 불확실한 현실 속이더라도

그 속에 서 있을 수 있는 건 너의 그 두 다리가 너를 지탱해 주고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너를 움직이게 하는 것도 결국 그 두 다리이고

나아가는 속도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네가 원하는 세계는 너에게 스스로 다가오지 않아


등 뒤에서는 한결 부드러워진 바람이 불고 있었고, 가로등 빛이 반사된 물결은 반짝이며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나는 점퍼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산책로에 일정한 간격으로 서있는 가로등 때문에 그림자는 내 앞뒤로 계속 그 위치를 바꿔가며 나와 함께 걷고 있었다. 흐르는 물과 산책로, 그리고 노란 가로등 불빛들이 저 멀리 하나의 소실점으로 합쳐지고 있었다. 나는 그곳을 바라보며 그들이 과연 이 길을 따라 어디까지 달려갔을지 생각했다. 그리고 도착한 목적지에서 숨을 고르고 뭉친 근육을 풀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어쩌면 그들은 오늘 밤의 러닝에 만족스러워하며 환하게 웃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웃음은 목적지에 도착한 자들만이 지을 수 있는 자신감 가득한 웃음이었다. 언젠가는 나도 그런 웃음을 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걷다 보니 산책로가 다리 밑으로 통과하는 지점에 도착했다. 다리 밑은 가로등이 없어 어두웠고 물 흐르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 어둠은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나는 다리 밑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 멈춰 서서 내 앞에 희미하게 서 있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다리 밑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는 잠시 사라질 것이다. 그는 나를 보며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네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 주변의 어둠과 불확실함을 뒤로 밀어내며 이 세계를 통과해 가는 거야. 그렇게 나아가다가 어느 순간 멈추었을 때 주변의 세계는 여전히 그대로이고, 거기에 서 있는 너의 모습도 예전과 같을 수 있어. 하지만 그 세계를 지나온 너의 시선과 너의 심장은 분명 달라져 있을 거야. 그렇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그게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의 의미인 거야. 내가 거기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게. 너는 내게 와서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기만 하면 돼.”


나는 고개를 들어 저쪽 끝의 다리를 통과한 지점을 바라보았다. 거기서부터는 가로등이 다시 노란 불빛을 비추고 있었다. 등 뒤에서 불어온 바람이 나의 머리와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다리 밑을 통과하여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고,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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