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탁기에서 세탁을 마치고 꺼낸 셔츠는 옷걸이에 걸어 아무리 판판하게 펴서 건조대에 널어놓는다 해도 구김과 주름이 잔뜩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구겨지고 주름진 셔츠는 다림질이 필요하다. 구김과 주름이 가득했던 셔츠는 다림질이라는 행위를 통해 칼날 같은 줄이 선 매끄럽고 찰랑이는 셔츠로 변한다.
그는 다림질하는 것을 좋아한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옷을, 특히 남성의 셔츠를 다림질하는 일이 귀찮고 누가 대신해줬으면 하는 일이겠지만 그에게는 아니다. 그는 자신의 셔츠를 다림질하는 시간을 정말로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긴다.
그가 이처럼 다림질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히 구겨졌던 셔츠가 다리미발이 반지르르한 셔츠로 변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혼란이 가득한 카오스 상태와도 같던 주름진 셔츠가 다리미라는 절대적이고 막강한 존재에 의해 매끈하고 깔끔하게 바뀌는 과정은 그에게 충분히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그는 이 과정에서 작은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에게 다림질이 매력적인 이유는 바로 다림질을 하는 동안에는 그의 머릿속이 그 어느 때보다 맑아지고 평온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다림질을 하고 있으면, 최소한 그 순간만큼은, 셔츠의 구김과 주름이 사라지듯 머릿속의 온갖 고민과 잡스러운 생각들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다림질을 할수록 마음이 차분해지고, 때에 따라서는 무겁고 울적했던 기분이 가벼워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에게 있어 다림질은 단순한 가사 노동이 아닌 일종의 힐링 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그에게 다림질이 이렇게 의미 있고 특별한 의식이 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다림질이라는 행위가 그에게 어떠한 선택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일을 할 때, 밥을 먹을 때, 여자 친구를 만날 때, 심지어 집에서 혼자 편하게 쉴 때까지 그는 매 순간, 매일매일 온갖 선택을 요구받으며 살고 있다.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지 계속해서 고민해야 하고 선택해야만 한다. 흔히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운명적으로 끊임없는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고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한다’ 식의 말들을 많이 한다. 그는 그게 틀린 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에겐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과 그 순간 자신이 결정해야만 하는 선택이 너무나 버겁고 피곤하기만 하다.
그런데 다림질은 그에게 어떠한 선택도 요구하지 않는다. 다림질에 관한 모든 것은 그에게 이미 하나의 루틴이자 법칙으로 정해져 있다. 우선 다림질을 하는 날은 보통 일요일 저녁이다. 만약 매일 저녁마다 다림질을 하며 지친 마음을 다스리고 리프레쉬시킬 수만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보통은 일주일 동안 쌓였던 온갖 잡생각들과 스트레스를 일요일 저녁에 셔츠의 주름과 함께 없애버린다. 물론 정말 머릿속이 복잡하고 급하게 심신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그때그때 다림질을 하기도 한다. 다림질의 양은—그는 보통 출근할 때만 셔츠를 입기 때문에—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 다섯 벌이다. 마지막으로 다림질의 순서와 세부적인 방법은 이미 너무나 익숙해서 눈을 감은 채로 해도 손이 알아서 움직일 정도이다. 목의 칼라부터 시작해서 양 어깨와 소매, 그리고 등판과 앞판까지 다리면 셔츠 한 벌의 다림질은 끝이다.
이렇듯 다림질을 하는 데 있어 그에게는 선택의 고민 따위는 없다. 그저 한 시간이 조금 못 되는 시간 동안 오로지 다리는 행위에만 집중하며 한 벌 한 벌 정성을 다해 세심하게 셔츠를 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다림질을 마치고 나면 다리도 아프고 손목이 욱신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마음이 평온해지고 고단했던 심신이 치유되는 느낌은 그러한 고통도 감수할 수 있게 만든다. 다림질을 하는 동안에 머릿속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새로운 기분으로 뭐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2.
그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만 둔지는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입사 후 5년이 넘었을 때부터 그는 조금씩 권태와 함께 자신이 정체되어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퇴사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커져갔다. 그리고 퇴사 직전에 있었던 상사와의, 어떻게 보면 사소했던 이유로 인해 일어난 언쟁은 그가 결정적으로 퇴사를 결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퇴사를 하고 나자 여자 친구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녀는 회사 생활에 힘들어했던 그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삼십 대 중반을 넘은 적지 않은 나이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퇴사를 하고 나서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는 그가 답답하기도 했다. 그와 그녀는 이전보다 사소한 말다툼이 잦아졌다. 그러면서 서로 연락을 잘 안 하게 되었고, 만남도 줄어들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이별에 대한 생각이 각자의 마음속에서 조금씩 커져갔다.
회사에 다니지 않으니 그는 이제 셔츠를 입을 일이 없었다. 퇴사 이후 한 번도 셔츠를 입지 않았고, 그래서—당연하게도—셔츠를 다림질할 일도 없었다. 퇴사를 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그는 그의 고민과 스트레스의 원인이었던 회사를 나왔으니 딱히 이전처럼 매주 다림질을 하며 마음을 다스릴 필요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 동안은 정말 그랬다. 선택에 대한 고민과 스트레스가 현저하게 줄어들었기 때문에 마음의 평온함이 다림질이라는 그만의 ‘특별한 의식’이 없이도 잘 유지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마음의 평온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잘할 수 있을지 수많은 고민과 걱정이 금세 꼬리를 물며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고민은 여자 친구와의 관계였다. 처음엔 그를 이해해 주지 못하는 그녀에게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는 그녀와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그녀와 헤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야만 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퇴사 이후 그의 머릿속이 이렇게 심란하고 복잡한 건 처음이었다. 그는 머릿속을 차분하게 만들어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옷 방으로 가 한쪽 벽면에 설치된 행거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약 서른 벌의 셔츠가 나란히 걸려있었다. 예전에는 깨닫지 못했었는데 지금 가만히 보니 푸른색 계열의 셔츠가 절반 이상이었다. 예전에 여자 친구가 그에게 좋아하는 색상이 뭐냐고 물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때 그는 특별히 좋아하는 색은 없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걸려있는 셔츠를 보니 아마 자신은 푸른색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한 스카이 블루부터 짙은 네이비 사이의 그 어떤 색들을.
그는 걸려있는 셔츠를 모두 꺼내었다. 그리고 그 전부를 세탁기에 욱여넣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세탁기의 작은 LCD창에 '세탁 시간 1시간 6분'이 표시되면서 작동을 시작했다. 그는 주방으로 돌아와 냉장고에 있는 반찬을 꺼내어 밥을 먹고 바로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욕실에 들어가 정성스럽게 양치를 하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면도를 했다. 욕실에서 나오니 세탁이 끝났음을 알리는 벨소리가 들렸다. 그는 세탁된 셔츠를 꺼내어 하나하나 옷걸이에 걸어 건조대에 널었다. 공간이 부족해 건조대에 걸지 못한 셔츠들은 옷 방의 행거와 방문 틀에 충분히 간격을 띄워 널었다. 셔츠를 모두 널고 나서 그는 침실의 커튼을 치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가 일어난 시간은 밤 10시경이었다. 낮 3시쯤부터 잤으니 7시간 정도 잔 것이었다. 그는 주방으로 나와 물을 한 잔 마시고 널려있는 셔츠들을 만져보았다. 여름의 더운 날씨 덕분에 셔츠는 이미 다 말라있었다. 그는 모든 셔츠를 걷어 옷 방으로 가지고 왔다. 그리고 다리미판을 설치하고, 스팀다리미의 전원 코드를 콘센트에 꽂았다. 다림질을 시작하기 전에 그는 거실의 턴테이블 앞으로 갔다. 긴 밤이 될 것이었다. 음악은 충분히 필요할 것이므로 선반 위의 바이닐들 중 우선 손에 잡히는 것을 턴테이블에 올렸다. 이승환의 B.C.603 앨범이었다. 턴테이블의 스타트 버튼을 누르고 다시 다리미 판 앞으로 돌아왔다. 그는 첫 번째 셔츠를 다리미 판 위에 조심스럽게 펼쳐놓고 다리미를 들어 오랜만의 다림질을 시작했다. 셔츠의 구김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그는 점점 다림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서른 벌의 셔츠를 다림질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중간중간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바이닐도 계속 바꿔줘야 했다. 처음을 오래된 가요로 시작했기에 계속 가요 앨범으로 골랐다. 김현식을 들었고, 이문세를 들었으며, 양수경을 들었다. 양수경까지 듣고 나서는 이승환부터 다시 들었다. 다림질이 필요한 셔츠가 조금씩 줄어들수록 그는 복잡했던 머릿속이 점점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 다림질을 마치고 나서 자신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그려졌다.
모든 셔츠의 다림질을 마치고 나자 시간은 새벽 5시가 넘어있었다. 그는 다리미와 다리미판을 정리하여 제자리에 넣어놓았다. 기지개를 크게 한 뒤 냉장고에 있던 탄산수를 꺼내어 마셨다. 창문을 열어 바라본 하늘에는 새벽녘 특유의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새벽의 공기는 신선하고 시원했으며 그의 기분을 산뜻하게 만들었다. 그는 새로워진 기분으로 지금 자신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했다. 그는 전화기를 들어 여자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잘 잤어? 오늘 우리 저녁 같이 먹을까?
너와 얘기를 하고 싶어
새로운 기분으로 다시 뭔가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출근 잘하고
답 기다릴게